인지할 권리에 관하여...

[신과 나눈 이야기 3] 닐 도널드 월쉬 - 2nd -

by 글짓는 목수

“인지는 인정이 먼저다.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인지(認知: Recognition)는 인정하는 앎이다. 그럼 인정할 수 없는 앎은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논리와 과학과 수학적인 지식은 모두가 이견 없이 인정한다. 알진 못하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증명의 영역이다. 논쟁의 여지가 없다. 정치와 경제도 지식이지만 논쟁의 여지가 분분한 인지이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지식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다수의 지지를 통해 살아남은 혹은 보이지 않은 힘에 의해 의해 인정된 지식이다.


문학과 예술도 일종의 지식으로 볼 수 있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분야는 토론은 가능해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쟁은 할 수 없다. 인식에 머물기 때문이다. 과학적 논리적 설득이 어렵다. 다만 호불호가 있으며 같은 것을 봐도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진다. 인식의 자유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억압할 수 없고 서로 존중하자는 전제를 깔고 있다. 표현의 자유이다.


그런데 인식이라는 개념을 쓰기도 어려운 영역이 있다. 그건 바로 영성과 초월의 세계이다. 느낌적인 느낌의 세계이다. 느낌도 인지가 가능할까?


Avatar 3: Fire and Ash (불과 재)

얼마 전 영화관에서 본 아바타 3가 떠올랐다.

영화는 나에게 인간과 나비족(외계 생명체) 중 과연 누가 더 우월한 종족인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당연히 인간이 가장 우월한 존재라고 인지한다.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다른 존재를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과학기술이다. 그래서 인간은 과학을 신봉한다.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신과 같은 힘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그 힘은 군사력, 즉 무력이다. 상대를 강제로 굴복시키는 힘이다. 반면에 나비족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의 모든 생명과 의식을 가진 존재들과 소통하고 교류한다. 이것은 나비족이 가진 힘이다. 이 힘은 무엇인가? 인류가 가진 힘보다 더 우월한 것인가?

[신과 나눈 이야기 3] 닐 도널드 월쉬 in Campus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힘과, 만물과 자신의 상호관계, 그리고 영적 존재로서 자신들의 참된 정체성을 깨달아가고 있다.”

- 닐 도널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3] 445p -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힘은 인지의 영역이 될 수 없다. 인지는 언제나 내가 머무는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지 밖은 초월이다. 나는 종종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나에게 열려 있는 세계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설계한 채 조용히 작동만 하도록 내버려진 거대한 기계 안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스위치를 누르고, 카드를 긁고, 동의 버튼을 누르며 살아간다. 그 모든 행위는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질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침묵이 아닐까? 나는 가끔 이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이 빛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묻는다. 발전소에서 일까, 전선에서 일까, 아니면 그 이전에 이 도시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서 일까? 우리는 결과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원인에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버크민스터 풀러가 말한 ‘인지권(Noosphere = Right to Know)’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유다.


그에게 인지권은 법적 권리라기보다 문명에 대한 윤리적 선언에 가까웠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할 권리이자 의무를 가진 존재라는 선언. 나는 이 말이 유난히 불편하게 다가온다. 권리라면 편안해야 하는데, 의무라는 단어가 끼어들자 인지권은 윤리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Buckminster Fuller (1895~1983), Architect

왜 우리는 알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세계의 구조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는가? 풀러의 대답은 단순했다. 우리는 세계 위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전기가 흐르는 원리를 모르고 빛을 누리는 인간, 자원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고 소비하는 시민, 알고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 채 판단을 맡기는 사용자. 풀러의 눈에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정교하게 포장된 무지였다.


나는 이 지점에서 신앙과 종교의 차이를 떠올렸다.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자기 내면으로 끌어와 스스로 감당하는 일이라면, 종교란 그 보이지 않음을 제도와 권위로 대행시키는 장치일 것이다. 인지권 역시 비슷하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해를 대행하지 말라”는 요청이다.

풀러가 두려워한 것은 지식이 없는 인간이 아니라, 생각할 필요가 없도록 길들여진 인간이었다.


나는 우리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손에 쥐면서도 점점 덜 이해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검색은 쉬워졌지만 사유는 얕아졌고, 접근성은 높아졌지만 해석의 권리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알아두면 좋은 것’과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않게 되었을까? 경제 뉴스는 매일 넘쳐나지만 경제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은 드물고, 정치는 끊임없이 소비되지만 정치가 왜 필요한지를 다시 묻는 일은 드물다. 이것은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 구조의 문제다. 풀러가 말한 인지권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이해의 구조에 대한 권리였다.


나는 가끔 문학과 언론 사이에 서 있는 어딘가 애매한 자리에 내 글이 놓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감정만을 토해내는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왜’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리. 문학이 해야 할 일은 현실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구조를 낯설게 다시 보여주는 일 아닐까? 보이는 것 너머를 묻는 일, 당연해 보이는 것을 다시 질문의 자리로 끌어오는 일, 그리고 사유를 다시 삶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 일.


질문한다는 건...


인지권은 민주주의 이전의 권리다. 투표하기 전에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하기 전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 없는 선택은 자유가 아니라 우연에 가까운 복종이다. 나는 가끔 묻는다. 우리는 정말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선택하고 있다고 믿도록 설계된 동선 위를 걷고 있는가. 광고는 우리에게 욕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던 욕망을 더 빠르고 더 세련되게 증폭시킬 뿐이다. 그러나 그 욕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도시는 왜 이 구조를 가졌는가? 노동은 왜 이 형태를 띠는가? 에너지는 왜 이 방식으로 공급되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소비하고, 왜 이렇게 버려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철학자의 사치가 아니라 시민의 최소한의 권리이자 책임이다. 풀러에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구조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인식이 차단될 때, 인간은 가장 먼저 자기 삶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게 된다.


나는 글을 쓸 때 항상 두 개의 세계 사이에 서 있다고 느낀다. 하나는 보이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보임을 가능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구조의 세계다. 나의 문장은 종종 그 둘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통로가 된다. 누군가는 그 통로를 통해 조금 더 깊은 세계로 들어오고, 누군가는 다시 자기 일상으로 돌아가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인지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알기 위해 쓰고, 쓰기 위해 다시 묻는 일. 풀러는 돔을 만들고, 지도를 다시 그리고, 도시를 재설계하며 인류에게 말했다.

[Conversations with God] Neale Donald Walsch in MGC

“세계는 이해 가능해야 한다.”


나는 이 문장이 기술자의 선언이 아니라 시인의 문장처럼 들린다. 이해 가능하다는 것은 통제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 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은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쉽게 파괴된다. 그래서 인지권은 혁명의 언어가 아니라 보존의 언어다. 부수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아는 것.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소비한다. 그리고 너무 적은 것을 천천히 이해한다. 문명은 속도를 사랑하지만, 인간은 이해의 속도로만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묻는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다른 방식은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정말 알고 선택하고 있는가?


인지권이란 바로 이 질문이 허락된 사회가 아니라, 필요한 사회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그 선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누군가는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고, 누군가는 알지 못하도록 설계된 구조 속에 조용히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설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Writing in library


일요일 연재
이전 25화실직이 문제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