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상상인 신춘문예 출품작 (에세이 부문)
집중의 뇌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집중은 나의 시간을 줄여버린다.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게 흘러간다고들 한다. 그건 아마도 모두가 무언가에 집중만 하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무언가에 한 눈이 팔려 살아가는 것과 같다. 돈과 권력 그리고 일, 그것도 아님 그 어떤 중독에 빠져서 시간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몰입하고 싶다. 몰입한다는 것은 현실의 시간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건 현실의 시간을 쓰지 않고 초월의 세계에서 시간을 쓰는 것이기에 몰입에서 빠져나오면 현실의 시간은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몰입 속에서 몇 년 동안의 이야기가 흘렀지만 그 몰입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고작 1~2시간 밖에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면 나의 시간은 계속 연장되어 다른 이들의 시간에 두 배 세배 열 배 백 배로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사실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과학자도 아닌데 증명하려 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다. 먼 훗날 이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질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밝혀지게 된다면 과거의 사람들은 인간 스스로 만든 시간의 감옥에서 속도와 효율을 강요받으며 무한하고 영원한 시간을 모두 빼앗겨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신께 기도하고 영생의 줄기세포를 얻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하고 하는 것이 모두 헛된 일이었음이 드러날지 모른다. 그런 종교와 과학에 의존한 영생이 오히려 그들을 더욱더 덧없는 삶의 시간 속에 가둬버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영원한 시간은 인간이 만든 것을 통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좀 덜 어리석은 인간들의 조종과 통제 속에서 그들의 부와 힘을 보태주기 위해 일생을 헌납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영원히 살기 원한다면 그들이 만든 그 촘촘한 현실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그 그물망이 너무도 촘촘해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과거 현인들은 그들이 구축한 세상을 떠나 홀로 자신의 시간 속 몰입해 시간을 연장했다. 그들은 결국 다른 이들 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았다. 사실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것이 시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은 결국 시간 개념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밖에 없도록 인간 스스로가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이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시간이 없다."
"바쁘다."
"세월이 빠르게 흐른다."
이런 말은 인간들이 하는 말이다. 이 우주에 시간을 말하고 논하는 존재는 오직 인간밖에 없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서로 합의하고 모두가 이 보이지 않는 것의 통제와 압박 속에서 괴로워한다. 그들은 당장 내일 죽는 줄도 모르지만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며 입으로는 항상 저와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이 시간이 나를 통제하고 나는 이 시간을 의식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1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시간을 연장시키는 일을 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1년이 아니다. 카페를 전전하며 이른 아침마다 몰입 속에서 이야기를 썼다. 그 이야기 속의 시간이 현실의 시간에 더해져 시간이 연장되어가고 있었다. 그 안에 빠져 있을 때는 현실의 시간은 잠시 멈춰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현실의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것은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고 주변의 사물이 희미하게나마 움직이고 주변의 소리가 조금이라도 귀속으로 스며들며 현실의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최소한으로나마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다.
몰입이 깊어지면 시야에서 보이고 움직이는 것을 의식하고 반응하는 시간보다 내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의식하게 된다. 그것들은 현실의 시간에 따라 보이고 움직이지 않는다. 이건 아주 깊은 몰입 단계에서 느껴지는 것인데... 그때는 눈을 뜨고 있어도 주변의 사물과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게 좀 더 쉽게 가능해진 이유는 아마도 귀를 덮고 있는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때문일 것이다. 외부의 소리를 차단한 채 음악의 흐름(flow)에 따라 몰입(flow) 속으로 빠져든다.
"요즘 작가는 SNS로 여기저기 팔로워를 만들고 스스로 홍보도 하고 해야 돼요."
최근에 알게 된 한 출판사 사장은 작가가 되기 전에 인플루언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글 속에서 사람들은 결국 눈에 띄는 글을 읽을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서 눈에 띄는 상품은 상품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상품을 눈에 띄게 만드는 마케팅 기술 때문이더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산업 자본주의 세상은 팔리지 않으면 잊히고 사라져 버린다. 냄비근성이 뛰어난 한국인에게 더욱 그렇다. 글이 돈이 되지 않으면 계속 쓸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쓰기 위해 글을 돈으로 바꿔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또한 글에서 멀어지는 과정과도 같음을 알지 못한다.
글을 통해 내 안에 나를 발견했다. 얼마나 힘들게 찾아낸 내 안에 나였던가? 그 내 안에 내가 그토록 나오고 싶어 했지만 알을 깨고 나올 수 없었던 것은 세상이 그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이 '돈'이라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돈이라는 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가 부족하면 죽게 된다. 돈 없이는 현실의 삶을 견뎌낼 수 없다. 삶을 살고 생명을 가진 작가가 계속 쓰려면 이 돈과 타협하며 그 적절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
이제 세상에 돈은 너무도 불어나서 그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가난하다. 그 불어난 천문학적인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세계의 부를 가진 자들의 부는 더 빠르게 증식하지만 나의 돈은 고갈만 될 좀처럼 불어나질 않는다. 그렇다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왜냐? 세상에 돈이 넘쳐나도 사람들이 계속 평생토록 노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만드는 이유는 그래야만 가진 자들의 부가 계속 증식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대부분의 무지한 자들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을 갈아 넣으며 노동의 시간에 집중하며 살아간다.‘선택과 집중’이라는 어떤 자기 계발서 작가가 그런 경제학 용어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 아닌 시간을 줄여가는 삶을 살게 만들어 버렸다.
물질문명은 끊임없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다. 세상이 화려해지고 발전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시간을 거둬간 결과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돈과 보이는 건물들을 남기고 죽지만 그 돈과 건물은 또다시 다른 인간의 소유가 되어 또 다른 건물과 돈을 남길뿐이다. 그 누구도 돈의 숫자와 건물을 보면서 나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물론 많은 돈을 가졌던 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건물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 트럼프처럼. 그러면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 동안은 사람들이 기억할지 모른다. 나는 그런 건물을 땀 흘리며 공구를 직접 손에 들고 만들고 올렸음에도 아무도 그 건물을 보며 나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내가 그 건물을 지어 올리면서 제공한 나의 시간과 노동에 대한 대가를 돈으로 지급받았기 때문이다. 그 벌어들인 돈으로 또다시 그들이 만든 식품과 그들이 제공하는 건물에 살기 위해 그 돈을 되돌려 줘야 한다. 그렇게 돈이 돌고 돌면 한쪽으로 몰리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팔면서 자신의 삶을 줄여나간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교육받고 훈련되어 왔다. 그렇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돈과 물질을 얻었다.
“네가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 때문이야”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
사람들이 그토록 그 돈과 물질을 좋아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그것에 쏟아부은 시간과 노동 때문이 아니던가…. 슬프다. 헛된 것에 삶의 대부분을 쏟아붓고 그 헛된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더 고귀한 것을 지키려는 자들을 폄하하고 없애려고 하는 그 자들이 무섭고 또한 불쌍하다.
나 또한 다시 돌아온 이곳의 현실 속에서 다시 그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기에 다시 집중을 시작했다. 괴롭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몰입의 시간 속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 수 있음에도 그럴 수가 없다. 왜냐 세상이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애처롭고 불쌍하게 쳐다보지만 나는 그들이 애처롭고 불쌍하게 보인다. 문제는 그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내가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50년 전, 프리드리히 니체가 마차를 끄는 말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다가 미쳐버린 건 그런 불쌍한 세상 속에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일까?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슬픔만이 남게 된다는 역사 속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분노하고 괴로워하며 세상과 맞서다가 슬픔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불교에선 인생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말한다. 인생의 이야기를 담은 고전도 비극이다. 인간은 눈물로만 치유되고 정화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울지도 않으며 울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그들처럼 울지 않고 울 시간 없이 무언가에 집중하며 살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이 너무도 슬프다. 삶은 결국 울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