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노을 사진을 계속 찍게 된 사연
“빛이 사라질 때에 비로소 가장 강렬하게 타오른다.”
붉은 석양을 바라본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은 강렬하다. 어둠에 삼켜질 시간이 다가옴에 몸무림 치는 것일까? 해가 질 때의 태양빛은 가장 연약한 빛이다. 파장이 길고 에너지가 사라지고 있는 빛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눈에는 강렬하다. 가장 연약한 빛이 왜 우리에게 가장 강렬한 것일까?
그건 우리 모두가 연약한 존재임을 무의식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한 존재로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 때문에 가장 연약한 빛을 보며 가장 강렬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가장 연약한 존재만이 가장 강렬하게 타오를 수 있다.
해가 기울어지는 시간, 오후 2~3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산을 오른다. 그럼 산 정상에 도달할 즈음, 석양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핸드폰에는 유난히도 떨어지는 노을 사진이 많이 저장되어 있다. 왜 그렇게 석양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게 되었을까?
중년을 지나가는 나이 때문일까? 붉은색이 좋아서일까? 그냥 사람들이 말하는 단순히 '예뻐서'일까? 누구나 이런 석양을 바라보면 잠시 시선을 멈추고 '와~' 감탄사를 내뿜으며 붉은 태양을 응시하게 마련이다. 이 이유를 언어로 이성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그 느낌이 석양에 시선을 잡아둔다.
일출 vs 일몰
젊은 시절 등산을 할 때는 이른 새벽에 산을 올라 일출을 보는 산행을 즐겼다. 과거 등산 모임에서 적잖은 시간 수많은 산을 누비고 다녔다. 등산 모임에서는 일출 산행을 많이 다녔다. 일출도 붉다. 하지만 밤에서 낮으로 가는 해와 낮에서 밤으로 가는 해는 그 느낌이 사뭇 다름을 느끼게 된다. 일출은 흥분되고 희망찬 기운을 품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새해의 일출을 보려 새해 첫날 첫해를 보려 곳곳의 일출 명소로 몰려든다. 하지만 일몰은 차분하고 담담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한 해의 마지막 일몰을 보려 일몰 명소를 찾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밝고 희망찬 청춘의 시기가 지나면 어둡지만 담담한 노년의 시기를 맞이해야 하기 때문일까…. 해가 시커먼 산의 형상 뒤로 넘어가려 할 때 노을은 가장 붉게 타오른다. 마치 꺼져가는 마지막 불꽃처럼 강렬하다. 마치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강렬한 붉은빛을 내뿜으며 사라진다. 해가 사라지고도 공기 중에 남아 산란하는 빛들이 황혼을 이룬다. 해가 뜰 때는 여명이 떠오를 해를 예고하듯이 해가 져도 그 여운은 남아있다.
왜 나는 이렇게도 석양과 친근하게 되었을까? 오랜 시간 나의 글을 읽어온 독자들은 알 꺼라 생각된다. 나는 [사이에서…]라는 산문 연작 시리즈를 오랜 시간 써내려 왔다. (벌써 5권째 시리즈를 쓰고 있다... 출판되지 않은...) 이 에세이의 주제는 다양하지만 그 형태와 구조는 비슷하다.
얼마 전에 쓴 글 [흉내 낼 수 없는 글]에서 나는 나의 글의 강점이 무엇일까에 대해 AI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AI가 나에게 알려준 것은 내 글은 세상에 모든 현상과 상황을 구조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었다. 감성을 싣고 이성을 장착하되 구조적으로 풀어낸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쓰는 글의 강점이고 또한 AI가 흉내내기 힘든 점이라 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내 글을 구조적으로 이해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처럼 자신이 글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자신도 몰랐다. 작가에게 독자가 필요한 이유이다. 작가는 글에 매몰되어 자신의 글을 글 밖에서 파악하지 못한다. 물론 그 때문에 글이 작가와 독자의 두 가지 관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작가의 글은 탈고가 끝나면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다.
작가의 의도와 출제자의 의도
나는 왜 한국의 문학(국어) 교육 과정에서 왜 작가와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문제 삼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작가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 문학의 목적인가? 문학은 작가의 글을 통해 자신의 의도(알지 못했던)와 기억(잊힌)을 끄집어내기 위한 도구이다. 문학은 독자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끄집어내는 마중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작가와 출제자의 의도와 목적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문학을 그렇게 접근해 왔다. 문학을 문제로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있다. 문제는 풀이를 해야 한다. 시험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와 독서 모임을 시작한 지 1년 반이 되었다. 독서 토론의 호스트가 되어 발제를 한다. 나의 발제문의 내용은 작가(너)의 글에서 시작해서 독자(나)에게로 귀결된다. 너(작가)를 통해 나(독자)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특히 문학 토론에서 나의 발제는 언제나 이 방향이다. 내가 문학 작품을 읽는 동안 떠올렸던 과거에 잊혔던 기억과 새롭게 떠오른 발상 혹은 상상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본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어떤 발상(상상)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것이 나의 발제이다. 내가 독서 토론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감은 멀리 있지 않다
독서 모임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나에게 영감과 글감을 던져주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만나서 토론하는 시간이 기대되는 것이다. 어떤 기억들과 상상들이 채워질까?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기억이 나에게 또 어떤 새로운 글들을 만들어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의 토론이 인상 깊었다면 나의 해마 속에 자리 잡고 언젠가 다시 튀어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시간을 잔뜩 먹어 진실도 사실도 아닌 나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허구가 될 것이다.
“저물지 않으면 해는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 오은 [뭐 어때] 145p -
지금 쓰고 있는 글 또한 아침에 책을 읽다가 멈춘 한 문장과 그 문장이 떠오르게 한 나의 핸드폰 속 수많은 노을 사진들과 그 노을 사진이 떠오르게 한 과거의 기억들이 오버랩되면서 한 편의 산문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이런 마중물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나처럼 독서 속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관계 속에서 혹은 여행이나 새로운 사건들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의 빈도를 올리려면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일상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건 특별한 이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습관이 만들어내는 태도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독서는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가장 손쉽지만 가장 쉽지 않은 습관이기도 하다.
“마흔이 넘어가면 그때부터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며칠 전 독서 모임의 지인들과 저녁을 함께하며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다. 얼굴과 표정에는 세월의 흔적이 담기게 된다. 그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독서 모임에 여성분들이 얼굴 미용에 관심이 많다. ‘보톡스’ 말고도 내가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시술과 마사지들이 있단다. 여자들은 누구나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외모를 관리하는 것에 여념이 없다. 책임지기 싫어서일까? 마흔이 넘어도 마흔이 넘은 것 같지 않은 젊은 외모를 가지고 싶은 것은 책임져야 할 얼굴을 가지고 싶지 않음 때문일까? 어린아이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동안(童顔)은 책임 없는 모습이다.
맞다. 젊은 청년은 뒤에 따를 책임이나 의무를 생각하지 않고 덤벼드는 패기와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젊음의 상징이다. 불혹을 넘어서도 그런 패기와 용기를 가지고 싶은 마음일까?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고 싶지만 늙은 몸이 그 마음을 자꾸 붙잡아 두려 하기게 몸을 바꾸려는 시도는 멈추지 않는다. 의술과 의학의 발전은 생명 연장의 목적과 연장된 생명에 외적인 생기 또한 불어넣는 마술을 부린다.
“늙어감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예전에 회사 생활을 하며 알던 고객사의 직원과 술잔을 나누며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형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는 서로 이해관계를 떠나 친구로 만나서 그런지 대화가 한결 편안해졌다. 편안함이 꺼내놓는 이야기는 서로의 공감을 얻는다. 옛날엔 서로의 이해와 설득을 구하는 대화였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는 우리 주변에 앉아 있는 젊은 청년들이 수다를 떨며 활기차게 술을 마시는 걸 보면서 말했다. 저 때는 몰랐다고 한다. 스스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어 친구와 여자와 술과 유흥을 찾아 불나방처럼 보냈던 시기를 지나고 나니 이제야 스스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대상을 통한 즐거움은 너무나 변화무쌍해서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계속 뒤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알고 나니 파도처럼 물결치던 감정들을 잔잔한 감성으로 바꿀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달리 보였다. 10년 전에 출장 때마다 고객사의 회의실에서 봤던 그런 에너지 넘치는 열정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때보다 더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모습이 마치 내가 항상 보는 그 석양의 노을을 떠올리게 했다. 뜨겁지 않은데 강렬한 기운, 그건 어둠의 시간이 다가올 때에야 비로소 강렬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내가 왜 산에 오를 때마다 석양을 그토록 찍어댔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전까진 이해할 수 없는 끌림과 공감으로 그것을 바라봤지만 뒤늦게 찾아든 이해가 언어가 되어 한 편의 산문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사실은 알 수 없는 공감과 끌림 뒤에 오는 이해가 진정한 이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도 나는 낮과 밤 사이의 석양을 바라보며 다가올 밤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