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데라와 흐라발 사이

관계와 고독 사이에서 쓰는 작가

by 글짓는 목수

“쿤데라의 문장은 태양 아래 관계 속에서 피어났고 흐라발의 문장은 지하의 고독 속에서 살아 숨쉰다.”


체코의 두 문인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다른 시선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봤다. 쿤데라는 복잡한 관계 속에 얽혀서 세상을 이해하려 했고 보후밀은 홀로 남겨진 고독 속에서 세상 바라봤다. 전자는 사랑과 배신, 오해와 욕망, 시선과 권력 같은 것들을 통해 인간을 보여주었고, 후자는 고독과 생활, 우연과 침묵, 사소한 사물들의 리듬 속에서 인간을 길어 올렸다.


한 시대를 바라보는 두 작가의 시선이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바라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반쯤 읽다가 문득 다른 한 인물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읽었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보후밀 흐라발이었다. 그가 떠오른 이유는 분명하다. 쿤데라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작가가 바로 흐라발이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아주 얇은 책이지만 너무 깊은 책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쿤데라의 참존가는 두껍고 넓고 복잡하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Read half in Library


관계(구조)와 고독(해체) 사이


둘은 같은 체코 문학권에 속한 작가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은 놀라울 만큼 다르다. 쿤데라는 인간을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해부하는 작가에 가깝다. 반면 흐라발은 인간을 외로운 고독의 지하실에서 천천히 떠오르게 하는 작가에 가깝다. 한 사람은 타인과 얽힐 때 인간이 얼마나 복잡해지는지를 보여주고, 다른 한 사람은 홀로 남겨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섬세해지는지를 보여준다. 이 차이는 단순히 문체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어디에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쿤데라의 짓기


쿤데라의 소설 속 인간은 대개 혼자 있지 않다. 그는 언제나 누군가와 얽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배신한 사람과, 욕망하는 사람과, 자신을 오해하는 사람과 그리고 시대와 역사와 이념과 얽혀 있다. 그의 인물들은 누군가의 시선과 접촉 속에서 계속 흔들리는 존재들이다.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쿤데라에게 관계는 따뜻한 연대의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관계는 인간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들통나는 현장이다.


사랑이 특히 그렇다. 우리는 사랑이 서로를 이해하게 해준다고 믿지만, 쿤데라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장면이 더 자주 펼쳐진다. 사랑은 우리를 더 깊이 연결하기보다,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다르게 해석하는 존재인지를 드러내곤 한다. 우리는 같은 말을 듣고도 다르게 상처받고, 같은 침묵을 두고도 전혀 다른 의미를 읽어낸다. 육체는 가까워져도 존재는 쉽게 가까워지지 않는다.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서로를 공감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쿤데라는 사랑을 낭만으로 쓰기보다 구조의 뼈대(프레임)로 쓴다. 그의 문장은 뜨거운 감정을 그대로 방출하기보다, 그 감정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차갑게 비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연애소설처럼 읽히다가도 어느 순간 철학 에세이처럼 느껴진다. 인물들은 살아 움직이는 사람인 동시에, 어떤 질문을 떠맡은 실험 대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사랑 속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자유인가? 소유인가? 친밀감인가? 자기확인인가? 관계는 우리를 구원하는가? 아니면 더 깊은 고독으로 밀어 넣는가? 쿤데라는 이런 질문들을 관계의 표면 아래에 숨겨 놓는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독서토론 in 좋아서하는 카페 260110 (책삶)

흐라발의 해체


반면 흐라발 쪽으로 가면 공기의 결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의 문학에는 거대한 관계의 긴장보다, 사소한 일상과 주변부 인간의 체온이 먼저 스며든다. 술집, 기차역, 골목, 지하 작업장, 폐지 더미, 허풍스러운 수다,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조금은 쓸쓸한 인간들. 흐라발의 인물들은 대개 역사의 중심이나 사회의 중심에 서 있지 않다. 그들은 늘 약간 비껴난 곳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바로 그 비껴남 덕분에, 오히려 인간의 본 모습을 더 잘 관찰하는 것이기도 하다.


흐라발의 문학에서 고독은 단순히 외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더 미세하게 감지하게 만드는 감수성의 상태에 가깝다. 혼자 있는 사람은 때로 더 많이 느낀다. 사람들의 말보다 말 사이의 간격을, 사건보다 사건 뒤에 남는 잔향을, 거대한 의미보다 사소한 몸짓의 떨림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흐라발의 인물들은 대단한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이상하리만큼 진한 감정을 남긴다. 웃기지만 슬프고, 초라하지만 아름답고, 하찮아 보이지만 오래 기억된다.

흐라발은 인생을 장엄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인생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허술하고 쉽게 무너지는지 잘 안다. 그런데 바로 그 허술함 속에서 인간은 이상한 품위를 드러낸다. 잘난 척하지 못하고,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삶의 중심에 오르지 못한 채로도 인간은 계속 살아간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오래된 책 한 권을 붙들고, 누군가의 뱉은 말을 계속 곱씹으며, 가끔 사람들과 허풍도 떨면서 또 어떤 날은 조용히 홀로 자기 하루를 견딘다. 흐라발은 바로 그 사소한 지속성에 귀를 기울인다.

Milan Kundera (1929~2023) & Bohumil Hrabal (1914~1997)


쿤데라와 흐라발 사이


그래서 나는 ‘쿤데라가 인간을 관계 속에서 구조를 해부한다면, 흐라발은 인간을 고독 속에서 해체된 구조를 관조한다.’고 말하고 싶다. 쿤데라의 문학은 인간이 타인과 얽힐 때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가 되는지를 보여주고, 흐라발의 문학은 인간이 홀로 남겨졌을 때조차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또한 애틋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 둘을 너무 쉽게 “관계의 작가”, “고독의 작가”로만 나누면 오히려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왜냐? 둘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쿤데라의 관계는 결국 고독으로 흘러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늘 건너지 못하는 간극이 있고, 사랑은 그 간극을 지우기보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반대로 흐라발의 고독은 완전한 단절이 아니다. 그의 고독 속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체취와 말소리와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홀로 있는 인간을 쓰지만, 그 인간은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고독은 관계의 부정이 아니라, 관계의 잔향을 끌어안는 상태다.


어쩌면 인간은 원래 이 두 가지를 모두 품고 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혼자만의 공간을 잃으면 질식한다. 사랑 받고 싶지만 너무 많이 얽히면 자신을 잃는다고 느끼고, 홀로 있고 싶지만 너무 오래 혼자 있으면 세상에서 밀려난 듯한 감각에 잠긴다. 인간은 관계 없이는 자신을 확인하기 어렵고, 고독 없이는 자신을 보존하기 어렵다. 그러니 관계의 문학과 고독의 문학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한 존재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비추는 두 개의 조명에 가깝다.

Star_[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vs [너무 시끄러운 고독]_Mega


쿤데라는 질문한다.

인간은 왜 사랑하면서도 서로를 망가뜨리는가?
왜 관계는 위로가 되기보다 시험이 되는가?
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 앞에서조차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가?


흐라발은 고민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가?
왜 이렇게 사소하고 초라한 삶이 때때로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가?
왜 세계의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의 작은 몸짓이 그토록 오래 마음에 남는가?


이 둘은 방향은 다르지만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연결을 갈망하면서도 끝내 완전히 연결될 수는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 관계 속에서 상처 입는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자신을 회복하지만, 그 고독 속에서 쓸쓸해진다. 문학은 바로 그 사이에서 태어난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지만 끝내 완전히 닿을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결국 홀로 문장을 붙들게 된다는 사실. 문학은 어쩌면 관계를 향한 손짓이자, 고독을 견디는 기술인지도 모른다.


문학은 언제나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완전한 균형은 없다. 다만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고 또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 두 작가를 읽고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인간은 누구와 얽힐 때 가장 자기답고 또한 자기답지 못한가. 그리고 홀로 남겨졌을 때 무엇으로 인해 끝내 무너지지 않는가.


첫 번째 질문은 쿤데라의 문장 속에서 찾을 수 있고, 두 번째 질문은 흐라발의 문장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질문을 모두 통과할 때 비로소 인간을 조금 더 넓게 이해하게 된다. 관계만으로 인간을 설명하면 인간은 지나치게 사회적인 존재가 되고, 고독만으로 인간을 설명하면 인간은 지나치게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된다. 인간은 그 둘 사이를 왕복하는 존재다.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혼자 문장을 정리하는 존재. 사랑 속에서 흔들리고, 고독 속에서 그것을 언어로 굳히는 존재. 관계와 고독, 그 두 개의 방을 번갈아 통과하며 끝내 자기 문장을 찾아가는 존재. 문학은 아마 그 긴 왕복의 기록일 것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처럼.


결국, 문학은 늘 하나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왜 누군가와 얽히며 무너지고, 왜 홀로 남아 문장이 되는가?”


당신은 관계와 고독 사이에서 무엇을 남기는가?


Writing about two writers in library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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