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노새는 성체가 되어도 번식이 불가능하다. 이는 아마도 말과 당나귀의 염색체가 매우 닮아 협력하여 우수하고 완강한 노새의 몸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감수 분열에서 적절한 공동작업을 수행할 정도로는 닮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9장 암수의 전쟁] 중에서 -
새벽안개가 자욱한 고갯길을 묵묵히 오르는 짐승이 있다. 말의 길쭉한 귀와 당나귀의 단단한 발굽을 동시에 가진 존재, 노새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노새를 곁에 두었지만, 정작 그들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오직 그들이 짊어진 '짐의 무게'와 '견딤의 시간'에만 가격을 매겼을 뿐이다.
나는 여기서 기묘한 생물학적 모순을 발견한다. 수컷 당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는 번식할 수 없는 '불임'의 존재다. 자연의 섭리대로라면 도태되어야 마땅한 이 결함 있는 생명이, 역설적으로 그 어떤 순종보다 더 강인하게 생존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다. 반면, 그 반대의 조합인 버새(수컷 말과 암컷 당나귀의 자손)는 왜 우리 곁에서 그토록 희귀해졌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축산학적 호기심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21세기, 여성이 대지가 되고 남성이 그 위를 걷는 자아의 재편, 즉 '남성성과 여성성의 지각변동'을 비추는 가장 정교한 상징이 아닐까?
과학의 고전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과학 중에서도 생물학에서 꼽으라면 이 책을 비켜갈 수 없다. 그런데 그전부터 이 책을 읽으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다. 그런데 잘 읽히지 않는다.
"9장부터 읽어봐요!"
먼저 읽은 자의 조언을 따라봤다. 잘 읽힌다. 비문학은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챕터별로 관심이 가는 것부터 읽기를 추천한다. 문학은 선형이지만(물론 문학의 내용은 비선형일 수 있다), 비문학은 비선형으로 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9장, [이기적 유전자]의 하이라이트인 것 같다.(개인적으로)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를 순 있겠지만 남녀(젠더) 문제는 한국인의 주요 관심사 중에 하나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노새에 관한 생각이 나에게 한국 남녀 역할에 대한 시대적 담론에 물꼬를 열었다. 그 생각들을 놓치지 않으려 글을 쓴다.
노새의 형질 : 강한 모계(母界)가 허락한 안식
노새가 강한 이유는 '암말'이라는 거대한 모체에 있다. 암말의 넓은 자궁과 풍부한 영양 공급은 아비인 당나귀의 유전적 한계를 뛰어넘는 물리적 성장을 가능케 한다. 이를 현대 사회의 인간의 젠더 관점으로 치환해 보자. 오늘날 여성의 지위 상승과 경제적 자립은 과거 '보호받는 존재'였던 여성을 '세계를 지탱하는 대지'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남성들은 더 이상 사나운 야생마가 되어 벌판을 달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아니, 그럴 수 있는 벌판조차 사라졌다. 대신 그들은 '초식남(에겐남)'이 되기를 선택한다.
남성이 강하고 능력 있는 여성에게 매료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암말의 자궁'과 같은 사회적 안전망을 갈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당나귀 같은 평범함과 소심함을 받아줄 수 있는, 자신보다 더 큰 사회적 자본을 가진 여성. 그 결합에서 태어난 '현대판 노새'는 정복자가 아닌 '성실한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지향한다. 이것은 비겁한 도피가 아니라, 현대 산업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몰고 온 새로운 현상일 것이다. 힘(권력)은 없지만 인내를 가진 수컷 당나귀가 고갯길을 넘기 위해 선택한 가장 지능적인 진화다.
버새의 비극 : 낡은 권위라는 '사회적 난산'
반면 버새의 소멸은 우리 시대가 겪는 '젠더 갈등'의 통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수컷 말(강력한 가부장적 자아)과 암컷 당나귀(위축된 전통적 여성성)의 결합은 태생적으로 위태롭다. 전통적인 남성성을 고집하는 '말' 같은 남성들은 여전히 여성을 자신의 야망을 투영할 '당나귀'로 보려 한다. 암컷 당나귀의 작은 자궁은 거대한 수컷 말의 유전자를 감당하지 못해 난산을 겪는다.
하지만 21세기 현대 사회의 척박한 환경은 그 비대해진 권위주의를 품어줄 여유가 없다. 조직은 유연해지고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창의적이고 뛰어난 발상과 아이디어가 생겨나고 그것이 새로운 산업의 먹거리가 되는 시대이다.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사고에 지쳤고 이제 메마른 대지를 적셔줄 감성을 되찾고 싶어 한다.
오늘날 기존의 관습(에토스 : Ethos)을 얽매여 온라인 공간에서 비명을 지르거나,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립되는 남성성들이 바로 이 '버새'와 닮아 있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선택받지 못하며, 태어난다 해도 세상의 짐을 함께 들 만한 에너지를 갖추지 못한다. 그들은 인내 없이 허세로 날뛰는 존재이다. 버새의 부재는 곧 '군림하려 하지만 실질적 능력은 상실한 남성성'에 대한 시대의 거부권 행사인 셈이다.
예술가적 통찰 : 아픔이 빚어낸 결핍의 미학
노새와 버새의 비유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단순한 생존의 효율성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결핍의 고통'이다. 노새는 완벽하지 않다. 그들은 영원히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없는 존재론적 외로움을 타고난다. 하지만 그 불임의 고통이야말로 노새를 오직 '현재의 삶'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아파보지 않은 자는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가 간질의 고통 속에서 신을 발견하고, 헤르만 헤세가 자아의 붕괴 속에서 '데미안'을 만났듯, 현대의 남녀 또한 성 역할의 붕괴라는 거대한 질병을 앓으며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하고 있다. 남성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을 배우고, 여성은 자신의 '강함'을 증명함으로써 타자를 포용하는 대지의 예술가가 된다. 그렇게 시대의 변화가 남녀의 역할을 서서히 바꾸고 있다. (무력과 전쟁은 그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의 발악일까 아니면 기존의 질서(힘)를 잃지 않으려는 권력에의 의지일까?)
초식남과 에겐남
일본에서 건너온 '초식남'이나, 소극적이고 감성적인 남성을 뜻하는 '에겐남'이라는 용어는 흔히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이들은 '과잉된 남성성'이라는 거품을 걷어낸 진화적 선구자들일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먼저 다가선 자일 수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수컷 말'처럼 포효하며 영역을 다투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아닌 타자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 관계와 연결의 힘을 믿는다. 여성이 리드하는 관계 속에서 남성은 기꺼이 '서포터'의 역할을 자처하며, 그 속에서 정서적 풍요를 누린다. 이것은 굴종이 아니다. 버새처럼 낡은 영광에 집착하다 시대적 요구에 도태되는 대신, 노새처럼 현재의 짐을 나누어 들고 험로를 헤쳐 나가는 '현실주의적 연대'다. 그들은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강박에서 벗어나, 서로의 취향과 철학을 교류하는 정신적 잡종(Hybrid)으로 거듭나고 있다. 유전자를 남기기를 포기하면서까지.
멸종하는 '노새'라는 운명 공동체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저서 [행복의 정복]에서 대지와의 접촉이 인간을 치유한다고 말했다. 현대의 관계에서 '대지'는 곧 상대방이 가진 실존적인 힘이다. 우리는 이제 종족 번식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삶이라는 고립된 섬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만난다.
"성적 매력이 없는 칙칙한 색채의 수컷은 암컷만큼 오래 살 수는 있어도 자식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자기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9장 암수의 전쟁] 중에서 -
노새가 말처럼 멋있고 활력 있어 보이지 않고 새끼를 낳지 못해도 그 자체로 훌륭한 생명인 것처럼, 아이를 낳지 않거나 전통적인 결혼 제도를 거부하는 수많은 '노새형 커플(딩크족)'들 역시 그 자체로 완결된 삶의 작품을 써 내려가고 있다. 강한 여성을 동경하는 남성의 시선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향한 용기 있는 적응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성별이라는 껍데기를 넘어, 누가 더 이 척박한 삶을 함께 견뎌낼 '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인간은 종족 번식이라는 유전적 명령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결핍을 긍정하는 자들의 행진
짐을 잔뜩 짊어진 노새가 묵묵히 힘겹게 고갯길을 오르고 있다. 그 침묵 속에는 번식할 수 없는 자의 서글픔이 아니라, 주어진 삶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는 자의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버새의 시대는 가고 노새의 시대가 왔다. 지배를 포기하고 공존을 선택한 남성들, 수동을 거부하고 주체가 된 여성들. 이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새로운 문명의 화음(Chord)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 변화의 진통 속에 희생되는 존재들이 있다. 그건 개인이 아닌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낸 희생양일 것이다.
당신은 노새인가 아니면 버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