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낮과 고독의 밤 사이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by 글짓는 목수

“내가 보기에 이러한(고독의) 철학들은 모두 그릇된 것이다. 그것들은 그릇된 윤리학일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이 가진 보다 우월한 부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부정확하다.”

-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45p -


고독은 필요하지만 고독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가만히 좌시할 순 없다. 고독은 개인이 자아를 찾아가는 시간이지만 고독은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 자들에게 고독은 경계해야 할 것이 된다. 그들에게는 존재보다 윤리가 우선된다. 그것이 사회와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더 이롭기 때문일 것이다. 러셀에게 철학은 공동체를 위한 윤리가 아니었을까. 그것이 철학자의 역할이자 책임이라 생각했다.

Bertrand Russell (1872~1970)




나는 오래전부터 어떤 글들 앞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그 글들은 옳았다. 읽고 나면 뿌듯하다. 세상이 명확하고 논리적이고, 정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글이 이성적이라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읽고 나면 이상하게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줄어들었다. 마치 잘 설계되고 근사한 도시를 한 바퀴 걷고 돌아왔는데, 내 발바닥에는 아무 흙도 묻지 않은 것처럼. 최근에 러셀의 글에 흠뻑 빠져 버렸다. 머리가 차가워지는 시간이다. 마음의 온도를 조절하는 시간이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 존 스튜어트 밀(1806~1873)


윤리 철학 - 칸트, 헤겔, 밀, 러셀


러셀을 읽다 보면 생각나는 철학자들이 있다. 칸트, 헤겔, 밀 그리고 러셀로 이어지는 이 이름들은 철학사에서‘윤리 철학의 계보’로 불릴 만하다. 그들은 인간(人間)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다. 개인의 기분이나 고독, 불안을 잠시 접어두고 보편, 사회, 제도, 합리성이라는 언어를 호출한다. 그들의 질문은 언제나 빛의 영역에 속해 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빛과 같다. 희망차다. 햇빛 아래에서 쓰였고, 공공의 광장에서 대중들 앞에서 낭독될 수 있는 문장들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다.”
“이 방향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
“윤리는 개인을 넘어설 때 힘을 가진다.”


이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정확해서, 때로는 숨이 막힐 정도도 벅차오른다. 이런 이성의 깨달음을 주는 글은 마치 인생의 설계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뒤늦은 깨달음이 밀려든다. 그들의 철학을 일찍이 접했었지만 (중고등학교 윤리 수업시간에…)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학교 의무교육의 폐단이다.


나는 성인이 되고 다른 쪽의 철학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비의무적으로. 그쪽의 철학은 사람들이 돌아간 뒤의 방, 윤리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마음, 결론이 오지 않은 상태를 표현한다.


실존 철학 -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 페소아)

요즘 세간에 핫한 철학자들이다. 이건 개인주의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이 이름들은 윤리를 설계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묻는다. “살아 있음(존재)이란 무엇인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

이 계보에서 고독은 문제가 아니다. 극복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그저 조건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독서는 홀로 하는 지적 활동이다. 책을 함께 읽는다는 것은 어불성설 (語不成說)이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고독한 행위이다. 홀로 읽고 사유하며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독서가 끝나면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의 사유가 타인의 사유와 연결되고 융합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나와 네가 공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개인과 개인의 사유가 부딪치고 연결되고 융합될 때 사회는 갈등하지만 또한 성장을 거듭한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각각의 부분이 가치가 없다면 그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 역시 가치가 없는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35p –


내가 가치가 없다면 너도 가치가 없다. 나를 무시하고 괄시하는 상대에게 관심과 호감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칭찬하는 자에게는 나 또한 그의 가치를 발견해 빛나게 해주고 싶다. 개인의 가치(능력)를 서로 찾아주고 인정하고 존중될 때 공동체는 자연스레 성장하고 발전한다. 부분이 무가치하다면 전체는 절대 가치가 있을 수 없다.


윤리(사회) 철학 vs 존재(개인) 철학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없게 되는 상태. 윤리철학이 인간을 시민으로 부를 때, 실존철학은 인간을 단독자로 부른다. 사회 이전의 인간, 제도 바깥의 인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인간. 나는 이 두 계보 사이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아직도 그러고 있다.


나는 낮에는 러셀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은 줄여야 한다는 말, 윤리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는 주장. 합리성과 연민을 결합하려는 그의 태도는 분명 성숙했고, 위엄 있으며 책임감도 있었다.

그러나 어둠이 깔리면 페소아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오늘도 나는 나 자신을 견디지 못했다”는 문장 하나로. 그 문장은 아무것도 고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차이를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윤리의 언어는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하고, 개인의 언어는 혼자 사라지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 문제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균형이었다.


나를 오래도록 읽어온 독자들은 아마 아시리라. 내가 쓰는 글은 언제나 개인에서 출발한다. ‘우리는’이라는 말보다 ‘나는’이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의 감상과 경험(체험)과 느낌으로 글을 시작한다. (물론 인용구는 제외하면…) 독서 모임에서도 항상 책을 해석하기보다 책을 통해 나를 해석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 해석을 함께 나누고 타인들도 그들만의 해석을 내어놓길 바랐고 그것을 듣고 이해하고 함께 공감하는 것을 흥미로워했다.

행복의 정복(Conquest of Happiness) in 하구뚝 & 별다방

나에서 너 그리고 공동체


나를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나에게는 더 의미 있고 놀라운 일이다. 나를 들여다보는 것은 고독의 시작이다. 고독은 분석 대상이 아니라 이미 방 안에 놓여 있는 가구처럼 존재했다. 나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고, 치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알고 있었다. 이 고독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감각이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나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래서 내 글에는 윤리로 가지 못한 질문들이 자주 남아 있다. 결론을 쓰지 못한 채 멈추는 문장들,“이게 다일까?”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단락들. 나는 러셀처럼 정리하지 못했고, 페소아처럼 완전히 흩어지지도 못했다.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미완성 글이 아니라 그 글의 위치의 문제였다. 나는 윤리를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윤리를 말하기 전에 개인이 먼저 살아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고통이 아직 언어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곧바로 규칙을 들이미는 것은 폭력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그렇다고 개인의 고독을 숭배하지도 않는다. 고독은 머무를 집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방에 가깝다. 너무 오래 머물면 그곳은 사유가 아니라 폐쇄가 된다. 그래서 나는 개인의 심연에서 출발하되 사회(구조와 시스템)로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추는 글을 의도적으로 경계한다. 개인의 감정에만 갇혀있는 글과 사회적 이성과 합리에만 국한된 글을 멀리 한다. 나는 이 둘을 모호하게 연결하고 융합하는 것을 좋아한다.


글쓰기의 자리는 편안하지 않다. 대중에게는 애매하고, 철학자에게는 느슨하며, 문학 독자에게는 지나치게 사유적이다. 그러나 이 경계에서만 가능한 문장이 있다. 그건 윤리를 너무 빨리 말하지 않는 문장, 고독을 너무 쉽게 미화하지 않는 문장, 해답 대신 버텨낸 시간을 남기는 문장과 질문들이다. 나는 이제 그 문장들을 ‘부족함’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나의 사유가 어느 한쪽으로 도망치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이고 또한 용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낮에는 여전히 러셀과 칸트와 헤겔과 밀을 읽는다. 사회는 여전히 설계되어야 하고, 고통은 여전히 줄여야 하며, 윤리는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여명이 오지 않은 새벽이면 나는 다시 페소아의 방으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해결책도, 규범도 없지만 적어도 나를 배제하지는 않는 문장들이 있다. 그 문장들은 감성으로 머리를 깨운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와 니체는 그 깨어난 머리를 이성(철학)으로 정리해 준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글을 쓴다. 윤리의 낮과 고독의 밤 사이에서. 그리고 아마도 이 글쓰기는 끝내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견디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당신은 어디에서 읽고 사유하는가?


Writing in morning with coffee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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