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페르소나에 관하여...
“유년의 상처는 다양한 자아를 만든다.”
어린아이의 방어기제가 만들어낸 것이다. 날 때부터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순응하기 위해 가져야만 하는 다양한 태도(말과 표정 그리고 행동)가 만들어 낸 것이다. 안정되고 편안하고 쾌적한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는 곧게 자라난다. 하나의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고 하나의 일관된 삶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런 아이는 자신 안에 다른 자아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결핍과 상처는 내 안에 다른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것이다.
또다시 산을 올랐다.
오늘은 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삼나무 숲 속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평소 다니지 않던 길로 걷다가 이상한 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대부분의 삼나무는 하나의 줄기로 곧게 뻗어 올라간다. 그러나 이 나무는 하나의 줄기가 아니라 여러 개의 줄기로 갈라져 올라가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땐 마치 여러 그루의 나무가 서로 얽혀 자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나무였다.
겉모습만 보면 그 나무는 어딘가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같은 산을 오르며 숲을 오래 관찰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나는 호기심이 생기면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물어봐야 한다.
이런 나무는 대개 묘목 시절에 어떤 경험에 의한 현상일 수 있다. 강한 바람에 중심 줄기가 꺾였거나, 눈의 무게에 눌렸거나, 동물의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 묘목 때는 중심 줄기가 손상되어도 나무는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대신 상처를 기점으로 주변 가지 중 몇 개가 새로운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가지들은 다시 하늘을 향해 자라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나무는 하나의 줄기가 아니라 여러 줄기를 가진 나무가 된다.
한결같은 사람 (풍파 없는 나무)
나는 그 나무를 올려다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인간의 성장 과정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자아를 하나의 단단한 중심처럼 생각한다. 마치 하나의 줄기가 곧게 뻗어 올라가는 나무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비교적 일관된 자아를 형성한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비교적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삶의 방향 또한 비교적 선명하다.
며칠 전 어릴 적 친구를 만나 둘이 저녁을 함께 했다. 3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죽마고우다. 이 친구는 내가 아는 친구 중에 가장 변화가 적은 친구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 같이 곧고 우직한 모습에 경외감이 생길 정도이다. 마치 한 줄기로 일자로 곧게 뻗어 올라가는 삼나무 같다. 그 친구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라 상상과 감성의 영역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와 대화를 나누면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희미해져 가는 현실감각을 조금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초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래서 사회와 회사 생활에 가장 잘 적응한 친구이기도 하다. 메뚜기처럼 직장과 사는 곳을 이리저리 옮겨 다닌 나와는 달리 한 직장, 한 곳에서 자리 잡고 오래도록 뻗어 올라온 친구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친구처럼 하나로 곧게 뻗은 삼나무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산을 오르고 정상 주변으로 갈수록 이런 나무는 줄어든다. 상 정상으로 갈수록 주변 환경은 가혹해지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차라리 이리저리 굽은 소나무들이 많다. 그런데 산 중턱 삼나무 숲에도 시련과 가혹함은 있을 수 있다. 그렇듯 세상에 섞여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모든 인간이 그런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카멜레온 같은 사람 (풍파가 많은 나무)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갈래의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가정의 분위기가 불안정하거나, 사회적 관계가 복잡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의 마음은 단순히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여러 형태로 분화시키게 된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이 과정을 오래전부터 관찰해 왔던 모양이다.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은 인간에게 사회적 얼굴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다. 페르소나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 내는 일종의 가면이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집에서의 나와 일터에서의 나는 다르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 역시 다르다. 이러한 차이는 인간이 위선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양한 관계는 다양한 나를 필요로 한다. 관계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사람이다. 그건 필요일 수도 있고 충족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페르소나는 인간의 사회적 적응 장치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여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부모, 자녀, 친구, 동료, 시민. 인간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신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환경이 변화무쌍하거나 가혹할수록 이러한 페르소나는 더 많이 형성되기도 한다. 어떤 아이는 집에서는 조용한 사람이 되고, 학교에서는 공격적인 사람이 되며, 친한 친구들 앞에서는 유머러스한 사람이 된다. 그것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하나의 생존 방식이다. 인간의 마음은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자아를 만들어 낸다.
페르소나와 다중인격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구분해야 한다. 페르소나는 인간의 정상적인 심리 구조다. 반면 다중인격은 병리적 현상이다. 페르소나는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여러 얼굴이지만, 그 밑에는 하나의 중심 자아가 존재한다. 내가 봤던 삼나무 줄기가 하나의 뿌리와 줄기에서 시작한 것처럼. 반대로 다중인격은 자아가 서로 분리된 상태다. 이건 하나의 뿌리와 줄기가 아닌 기억과 경험이 공유되지 않고 분리된 서로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중심 자아를 유지한다. 그래서 직장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는 다르지만, 그 둘은 결국 같은 사람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고 말을 하지만 중심에 품고 있는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는 일관되다. 이걸 작가나 예술가로 치면 각자의 관념과 사상 그리고 추구하는 이상향의 뿌리와 줄기는 같고 그 표현하는 작품의 형태(가지의 형태)와 모습(꽃과 과실)은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과 같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다층적 자아 구조가 때때로 인간의 창조성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내가 다른 누구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내가 다른 누구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내가 나를 다른 누구로 생각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213장 -
내가 좋아하는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는 자신 안에 여러 명의 시인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필명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격과 철학을 가진 작가들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연의 감각을 노래한 알베르투 카에이루(Alberto Caeiro), 고전적 절제와 스토아적 태도를 보여준 리카르두 레이스(Ricardo Reis), 그리고 격정적인 현대성을 표현한 알바루 드 캄푸스(Álvaro de Campos)라는 대표적인 이명의 인물들을 창조해 냈다. 그들을 실제로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생년월일부터 직업 성격까지 모든 것을 설정하고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었다. 각기 다른 세계관과 언어를 가진 하나의 독립적인 자아였다. 페소아는 그들을 통해 자신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표현했다. 어쩌면 인간의 마음은 처음부터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 다층적인 구조일지도 모른다.
철학자의 페르소나
철학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인간의 자아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정신을 서로 다른 힘들이 충돌하는 장으로 이해했다. 인간의 의지, 욕망, 충동, 이성은 하나의 단일한 중심에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인간을 형성한다. 니체에게 인간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의 합창이자 여러 악기의 합주와 같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어린 시절의 상처나 변화는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내면을 더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의 경험만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나 다양한 경험을 겪은 사람은 여러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약자의 시선, 강자의 시선, 관찰자의 시선. 이러한 다양한 시선은 인간의 이해를 더 깊게 만드는 것이다. 결핍과 상실 없는 즉, 부족한 것이 없이 성장한 자는 그럴 필요를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한 자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녀를 결핍과 상실 없이 키우기를 희망한다. 모순이다. 사실 부모가 자녀를 그렇게 키우려 하는 태도 자체가 결핍이 가져온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다층적인 자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았다.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생각을 동시에 품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모순이 인간의 사유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 모순을 받아들이려 한다. 아직은 다소 거북하고 어색함에도.
숲 속의 나무도 마찬가지다.
어떤 나무는 하나의 줄기로 곧게 자란다.
어떤 나무는 여러 줄기로 갈라져 자란다.
처음에는 여러 줄기로 자라는 나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나무는 숲 속에서 가장 독특한 실루엣을 가진 나무가 된다. 그 나무는 여러 방향으로 하늘을 향해 자라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하나의 길을 따라 성장한다.
어떤 사람은 여러 갈래의 길을 따라 성장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줄기의 개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줄기들이 결국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이다. 오늘 숲 속에서 본 여러 줄기로 자라는 삼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나무는 어린 시절 한 번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부러짐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방향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그 나무는 지금도 여러 줄기로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다. 나도 이 삼나무와 같을까….
당신은 어떤가? 몇 개의 줄기로 세상을 바라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