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남성 사이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 2nd -

by 글짓는 목수

● 에스트라공 : 목이나 매고 말까?

블라디미르 : 그러면 그게 일어서겠지.

에스트라공 : (호기심이 생겨) 그게 일어선다고?

○ 블라디미르 : 그래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거기서 떨어진 물에서 만드라고라 풀이 자라난다더라....

● 에스트라공 : 그렇다면 당장에 목을 매자.


-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중에서 -


무대 위, 잎사귀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 아래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절망을 견디기 위해 가벼운 농담처럼 '자살'을 제안한다. 목을 매면 발기가 된다는 블라디미르의 말에 그럼 당장 목을 매달자는 에스트라공의 말은 생명(유전자)을 남기지 못하는 수컷의 비애를 표현하는 것일까?


몸은 뇌가 말하지도 않았는데도 죽음에 반응한다.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몸은 반사적으로 생명의 씨앗을 남기려 몸부림친다. 사정은 쾌락이 아닌 고통 속에서도 일어난다.


몸은 뇌가 배우지 못한 무의식의 명령에 따른다. 의식이 사라지면...

Writing with a cup of coffee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속 이 기괴한 대화가 내게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 이건 단순한 블랙유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이면서도 가장 원초적인 '생명의 역설'을 관통하는 통찰이다. 차가운 밧줄이 기도를 조르고 척추를 부수는 찰나, 의식은 소멸의 심연으로 추락하지만 육체는 생애 가장 뜨거운 분출을 준비한다. 이것은 쾌락이 아니다. 그것은 수만 년 동안 남성의 몸속에 각인되어 온 거부할 수 없는 '종족 번식의 유령'이 부르는 마지막 비명이다.


찰나의 폭발, 눈먼 씨앗의 절규


그 광경을 섬세하게, 혹은 잔인할 정도로 리얼하게 들여다보자. 밧줄이 목의 피부를 파고들며 경동맥을 차단한다. 산소 공급이 끊긴 뇌는 비명을 지르며 불이 꺼지듯 점멸한다. 하지만 그 순간, 목뼈 뒤편의 척수는 강한 압박을 받으며 최후의 전기 신호를 하반신으로 내보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오직 생존과 번식만을 위해 설계된 천수(天授) 신경의 강제적인 명령이다.


중력은 멈춰버린 심장을 대신해 혈액을 아래로, 더 아래로 밀어 내린다. 갈 곳을 잃은 뜨거운 피는 남성의 가장 은밀한 곳, 해면체로 쏟아져 들어간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순간, 육체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절정기를 흉내 내며 꼿꼿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이내, 정낭을 둘러싼 근육이 경련하듯 수축하며 한 무더기의 씨앗을 허공에 쏟아낸다. 죽음은 다른 몸에 있는 모든 구멍을 감싸고 있는 근육을 이완시켜 오물이 쏟아내지만 생명의 씨앗은 근육이 경직되어야만 분출할 수 있다.


그 씨앗들은 받아낼 대지도, 잉태할 자궁도 없는 차가운 바닥 위로 의미 없이 흩어진다. 그것은 '사랑'의 결과물도, '희망'의 결실도 아니다. 오직 사라지지 않으려는 유전자의 처절한 발악이며, 주인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육체가 수행하는 기계적인 의식일 뿐이다. 이 장면은 남성이라는 존재가 지닌 생물학적 숙명의 가장 비극적인 축소판이다.


진화의 지체(Time-lag)와 현대 남성의 고독


오늘날의 남성은 이 거대한 '본능의 감옥' 안에서 표류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빛의 속도로 변해간다. 성역할의 경계는 허물어졌고, 남성성(Masculinity)은 때로 극복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나 '독성'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남성에게 부드러움과 절제, 섬세한 공감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들의 가죽 안쪽에 웅크린 육체는 여전히 수만 년 전 수렵과 채집, 그리고 거친 경쟁 속에서 씨앗을 퍼뜨려야만 했던 '야생의 시간'을 살고 있다. 시대적 요구와 그 시대에 부합하는 인간상은 변해도 수만 년 동안 축적된 유전 정보는 그리 쉽게 변할 수가 없다.


문명은 남성에게 슈트를 입히고 모니터 앞에 앉혔지만, 그들의 DNA는 여전히 사바나 초원의 바람 소리에 반응한다. 사회적 자아는 "변해야 한다"라고 외치지만,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종족 번식의 코드는 결코 업데이트되지 않는 구형 운영체제처럼 남성의 정신을 괴롭힌다.


여기서 남성의 실존적 고통이 발생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육체가 명령하는 본능 사이의 거대한 간극. 그 괴리감은 현대 남성들을 정서적 고립으로 몰아넣는다. 유전자는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고 씨앗을 남기라"라고 속삭이는데, 세상은 "너의 욕망을 거세하고 시대의 질서를 따르라!"라고 말한다. 이 내면의 전쟁터에서 남성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길을 잃게 된다.


여성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수컷의 비극'

같은 인간이지만 남녀가 서로에게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서로가 가진 다른 육체가 보내는 유전적 전기 신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남녀는 평생도록 갈등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여성은 절대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영역"과 "남성이 절대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은 서로 다른 육체의 메커니즘 때문이다.


여성의 번식 본능은 '보존'과 '양육', 그리고 '연결'에 기반한다. 여성의 몸은 생명을 품고 길러내는 내밀한 공간이며, 그 과정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성숙해 간다. 그러나 남성의 번식 본능은 투사적이고, 일방향적이며, 때로는 파괴적일 만큼 순간적이다.


교수형 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후 사정은 그 일방향성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상대와의 교감도,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이, 오직 소멸 직전의 육체가 내뱉는 단절된 외침. 이것은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종이 짊어진 '고독한 투쟁'이다.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순간에도 유전자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스스로가 유전자의 운반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이 비극적 의식은 남성만의 독단적인 슬픔이다. 여성이 생명의 '연속성'을 상징한다면, 밧줄 끝에 매달린 남성의 발기는 생명의 '단절'과 '강박'을 상징한다. 이것은 공감의 대상이라기보다, 목격되어야 할 비극에 가깝다.


밧줄 끝에서 쓴 마지막 유서


우리는 이 희곡 속에 밧줄에 매달리려 하는 남성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남성의 발기와 사정은 추잡한 성적 징후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라는 거대한 문명의 밧줄에 목이 졸린 채, 자신의 본질을 잃어가는 이 시대 모든 남성의 무의식적 자화상이다.


사회적 지위가 박탈되고,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무너지고, 남성이라는 정체성이 흔들리는 매 순간, 남성들은 보이지 않는 밧줄 위에서 본능의 발작을 일으킨다. 문명은 더 이상 남성의 거친 본능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육체는 여전히 그 본능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 '진화의 지체'가 주는 고통은 남성들을 우울과 분노, 혹은 정체불명의 허무로 이끈다. 결국, 사후(死後) 사정이라는 현상은 남성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남기는 가장 원초적인 유서와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여기 있었고, 나의 육체는 마지막까지 생명의 명령에 충실했다."


비록 그 씨앗이 바닥에 떨어져 말라 붙을지라도, 그 찰나의 분출은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얼마나 처절한 생물학적 존재인지를 대변한다. 수만 년의 세월을 견뎌온 유전자가 현대라는 낯선 땅에서 길을 잃고,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제 이름을 부르는 슬픈 외침. 그것이 바로 밧줄 끝에 맺힌, 이 시대 남성들의 안타까운 진실이다.


남자(男子)는 시대에 적응하고 사회에 부응해야 하지만

남성(男性)은 그 뒤에 숨어 죽음 앞에서 비로소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도를 기다리며... 독서 토론에서...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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