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아니 에르노
"왜 우리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끊임없이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걸까요?"
한 여자의 자서전이 여러 사람의 입방아에 올랐다. 어쩔 수 없다. 작가의 삶은 언제나 독자에 의해 평가되고 분석되는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숙명이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 중에는 작가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공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정죄하기도 한다.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독자에 의해 재해석과 재평가를 거치며 기억된다. 나는 그녀의 책을 읽을 때는 그녀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다가 독서 토론을 하며 그녀를 정죄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홀로 읽을 때는 이해와 공감이었지만 다수가 함께 있을 때는 누군가의 말에 동조되어 이성을 되찾고 현실적인 태도를 취한다.
예기치 않게 읽게 된 책이었다. 독서 모임 사람들과 함께 새로 생긴 도서관을 방문해서 책 읽는 시간을 가졌다. 책은 혼자 읽어야 맞다. 다만 책을 읽고 난 후 허기와 허전함을 함께할 동료가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독서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만 있다면...
"책이 아주 얇아요. 한 번 읽어보세요."
정말 얇았다. 결국 읽으려고 가져간 책은 가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독서 모임의 지인이 건넨 책을 읽기 시작했다.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아니 에르노)의 자서전이란다. 감각적이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감각. 정말 요즘 문학의 대세인 듯하다. 감각적인 문체와 묘사, 감각은 사람을 자극한다. 그래서 몰입도가 높다. 다만 감각이 강할수록 사유가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다. 내가 그 지인이 건넨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결국 그날 오후에 있는 독서 토론 모임까지 끌려갔다. 세상일이 계획대로 되는 게 없다. 그날의 일도 알 수 없다.
"나는 (비스킷) 봉지를 들고 화장실로 간다. 안에 돌멩이가 들어 있는 것 같다. 변기 위에서 봉지를 뒤집는다. 변기 물을 내린다." - 아니 에르노 [사건] 중에서 -
그녀(아니 에르노)의 글을 읽으면 그 장면이 리얼하게 상상된다. 마치 사진을 보듯이 디테일이 살아있다. 이건 마치 영상을 볼 때처럼 몰입도가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 현대인들은 글도 이미지처럼 읽히길 바란다. 어쩌면 이미지와 영상이 보편화된 사회의 독자들이 감각적인 글에 더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그녀의 글은 한강(2024년 노벨문학상) 작가와도 닮아있는 듯하다.
1960년대 프랑스 여성이 ‘임신 중절’이라는 사건에서 겪는 상황을 처절하게 묘사한다. 현대 여성들은 공감하기 힘든 내용일 수 있다. 지금의 시대상과는 괴리가 크다. 다만 우리는 당시의 그 사건을 겪은 여성의 행동과 심리를 읽으며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리고 끄집어내어야 한다. 이 책은 그녀의 자서전이다. 후에 회고를 통해 작성된 것이겠지만 소설과는 달리 개인이 경험한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다. 물론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변형으로 그 내용이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같은 사실도 경험한 당사자들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 이야기는 순전히 작가의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생각과 느낌을 글로 옮긴 것이다.
“이 여자는 꽤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자로 보여요. 블루컬러에 대한 경시, 신분 상승을 향한 비도덕적 욕망, 임신 중에도 다른 남자에게서 느끼는 성적욕구, 생명경시에 대한 죄의식 등등”
토론에서 주인공(작가)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작가는 독자들에 의해 세워진 법정에 세워진 피고인처럼 정죄되고 있었다.
“예술 그 자체에서 도덕을 찾을 수는 없다. 예술은 아름다움만을 그 목적으로 한다. 예술이 도덕적이고자 하는 이유는 도덕(그 자체)에 있으며, 이는 미학의 외부에 있는 인간 본성에 근거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이명의 탄생] 143p –
서두의 문장은 한 여성에 대한 아픔을 공감하려던 한 독자(나)가 토론의 장에서 공감이 줄어들고 현실 감각을 되찾는 과정 속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사실 이것이 토론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문학을 읽을 때는 충분히 작가의 감정에 심취하고 몰입하는 경험도 중요하다. 주인공 혹은 이야기 속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고 빠져들 때 현실의 자신을 잊고 다른 세계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읽는 내내 이성과 현실 감각이 개입하는 독자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문학에 빠져들어 시공간을 잊고 이야기 속에서 작가의 세계에 빠져들기가 쉽지 않다. 물론 비판적으로 읽기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문학은 비판적이기 전에 공감적인 태도가 우선되는 것이 낫지 않나?
소설(小說)은 말 그대로 작은 이야기, 개인의 이야기이다. 모두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다. 다만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이런저런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흔해 빠진 행복 충만 해피엔딩 스토리를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개인적이고 소외되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을 발견하기 위해 읽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도덕과 윤리에 억압된 혹은 가려져 있던 자신의 내면을 찾을 수 있다. 항상 누군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자신이 알고 보니 자신이 비난받지 않고 손가락질받지 않기 위해 선제공격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학의 내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외부의 인간 본성에서 맴도는 존재들의 특징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욕망을 욕망으로 아픔을 아픔으로 욕정을 욕정으로 인정하고 보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 의해 만들어진 본성이 지속적으로 개입되어 예술과 문학을 그 자체로 읽는 시간마저 빼앗겨 버렸다.
이것이 현대인이 겪는 일종의 비극이 아닐까? 아파도 아프다고 슬퍼도 울지 못하고 화가 나도 화낼 수 없는 우리의 사회적 모습이 문학 작품을 읽을 때까지 따라온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느낀 점보다는 이 책을 읽고 토론에 임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 많은 것을 느낀 시간이었다.
독서와 토론 사이
물론 토론이 없었다면 부도덕하고 타락한 여자를 가련한 피해 여성으로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독서는 나를 잠시 야매(불법) 수술대에 누워서 임신중절 수술을 받는 여성의 심정을 이해하는 시간이었고 토론은 지금 현대 여성의 모습과 당시의 여성의 모습을 비교 분석하며 여성권리의 신장과 여성도 남성 못지않은 성적 욕정에 휩쓸리는 똑같은 동물적 존재임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다른 작품을 읽지 못해서 그것들이 이 자서전과 비슷한 성향일지 확신할 수 없지만 완전히 다를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소외받은 여성의 삶이 지금 이 시대에 재조명을 받는 것은 많은 기성세대 여성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서로 다른 육체적 메커니즘으로 인해 남성과 여성은 이해는 할 수 있어도 완전한 공감을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결코 육체에서 벗어나서 생각하고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육체의 호르몬과 몸속에서 벌어지는 서로 다른 신경화학적인 작용이 남녀의 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성은 여성의 삶을 읽어야 하고 여성은 남성의 삶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여성은 여성의 삶만 읽으며 공감하고 남성은 남성의 삶만 읽으며 공감하는 것은 결국 서로가 만날 수 있는 접점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자서전 속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들은 마치 가해자처럼 보인다. 1인칭 주인공 시점과 자서전이라는 구조가 지닌 한계이다. 나는 한 남성으로서 이 책을 읽으며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토론의 시작과 함께 남성 참여자들이 고개를 숙인 채 죄인처럼 여성 발언자들의 말을 듣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 과정은 나쁘지 않다. 남성은 간접적으로나마 여성의 아픔을 이해하는 시간이었고 여성은 남성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시간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학 토론의 이점이자 목적이 아닐까…. 누군가 나와 다른 이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시간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드니까….
당신은 어떻게 공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