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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24. 2019

유익하진 않지만 무해한 사람

잉여인간의 시대

나는 과연 세상에서 유익한 사람일까 아니면 무해한 사람일까?


"커서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어린 시절 집에 부모님 친구들이 놀러 오시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 손에 쥐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주 하시던 말이다.  그때는 어른들의 그런 말보다 손에 쥐어진 만 원짜리 지폐로 사 먹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종류의 과자와 아이스크림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바빴고 그 말은 그냥 무의식적으로 '예'라고 대답하면 되는 그런 의례적인 질문일 뿐이었다.


  나는 그때 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 아저씨의 나이가 되었다. 나는 아직까지 아이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왜 일까? 내가 그다지 쓸모 있는 인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이 그때 내가 느낀 것처럼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임을 알기 때문일까? 뭐 결국 그 큰 돈(80년대)엄마의 지갑으로 들어갔고 돌아오는 건 선택의 폭이 좁아진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차라리 천 원짜리 한 장이었으면 어머니가 그렇게 매몰차게 빼앗아가진 않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인간이 정해놓은 유익한 사람과 유해한 사람의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따라 사람들의 칭송을 받거나 처벌을 받기도 한다.


   유익한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돈과 명성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모이는 곳에 돈을 투하한다. 대중의 인기(좋댓구알: 좋아요, 댓글, 구독, 알람)가 부의 원천이 되는 시대이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 유익하고 쓸모 있는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다.  물론 권력과 돈의 유혹을 배제한 유익성만 추구하는 성인이 될수도 있지만 쉽지 않다.

한경직 목사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 故 한경직 목사 -


   과거 종교계의 큰 별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며 남긴 말이다. 돈과 권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신앙의 세계도 결국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던 것일까? 동일한 예수를 믿는 신앙인의 빈부격차가 그걸 증명하듯 오지에서 피죽을 끊여먹으며 선교를 하는 목사가 있고 거대한 성전 같은 예배당에서 수많은 군중 속의 찬사를 받으며 설교하는 목사도 있다. 그 수많은 군중이 쥐어준 권력과 돈에 취해가는 종교인에게 일침을 날리는 이 한 마디가 가슴 깊이 스며드는 건 나 또한 그런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 아닐까?


  유익함의 시작은 타인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을 향했던 유익함이 가져온 예상치 못했던 명성과 부는 다시 그들에게로 향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이 자신의 유익함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받아들이는 오만 속에 물질의 노예가 되어간다. 물질로 삶을 채워가지만 알 수 없는 공허함도 커져간다. 그럴수록 채워 넣으려 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우니라"

                                                                                                  - [마태복음 19:24] -


   유해한 인간들은 왜 생겨났을까? 처음부터 유해한 인간은 없다. 누군가가 아님 환경이 그들을 유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이해가 되는 사람은 죄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유해한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시작은 유익했지만 나중은 오만했던 자들의 욕심이 그들을 유해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워본다. 부가 부를 만든다는 기초적인 자본주의 논리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게 될 것이요,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누가복음 19:26] -


  부가 부를 만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큰 부는 가만히 놔둬도 은행이자만으로도 적지 않은 부가 창출된다. 하지만 가진 자들은 은행이자로 만족하지 않는다. 돈을 이용해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는데 절치부심(切齒腐心)한다. 경쟁력 있고 매력 있는 제품과 서비스 등을 생산하고 대중들의 부를 흡수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는 구조이며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우리는 24시간 쥐어진 스마트 폰 속에서 그런 상품과 서비스의 유혹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와 기업가들은 어떻게 하면 대중의 지갑을 열 수 있을까를 고심한다. 대기업들은 작게는 몇천억 많게는 몇십조 원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고도 끊임없이 이익을 창출하기에 여념 없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 믿을 것이라고는 현금 밖에 없어서일까? 과거에는 벌어들인 이익으로 사회에 재투자하여 고용을 창출하고 산업생태계를 확장시켜 대중들의 지갑을 다시 채워주는 선순환 구조를 보였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일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어선 고지식한 대중들의 눈높이를 맞추면서 기업의 희생(이익 감소)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기업은 해외(동남아, 인도 등)로 공장을 이전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국내 기업들도 자동화와 인공지능화로 공정 전환에 박차를 가한다. 아울러 4차 산업으로의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은 인간 노동력의 가치를 더욱 폄하시켜간다. 실질적인 부가가치 창출은 해외에서 발생하고 국내는 온라인 속 콘텐츠와 정보만 쌓여간다. 아마 미래에는 GDP(가계, 기업, 정부 등 경제주체가 일정기간 동안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의 부가가치)의 개념이 축소되거나 사라지지 않을까?  무형의 콘텐츠의 질과 양이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무지한 나의 단순한 생각일지도...)


  못 가진 자는 줄어든 수입으로 가진 것을 지키려들고 가진 자는 그것 마저도 가져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현재의 물가상승률과 금리가 바닥도 모자라 마이너스로 치닫고 있는 것은 소비심리와 투자심리가 모두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만들어진 공장과 설비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공급이 넘쳐난다. 이제 가지지 못한 자들의 버티기가 시작된건 아닐까? 버티다가 더 힘들어지면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 너무 벌어진 부의 격차은 상대적 박탈감을 낳고 소외된 인간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FIRE MOVEMENT

"공유경제, 미니멀 라이프,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운동"


  세상의 인식 변화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저성장 시대의 가치관은 벌고-쓰고-낭비-축적의 시대에서 안 벌고-안 쓰고-절약(공유)-버림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24시간 중에 겨우 1~2시간의 출퇴근을 위해 차를 보유할 필요성(세금, 보험, 유류비등)을 느끼지 못하고, 일인 가구의 증가와 여가활동 증대로 집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시점에 굳이 집을 소유해서 디지털 노마드(유목민) 삶의 걸림돌을 만들고 싶지도 않다. 강요와 압박에 의한 일은 딱 40까지만 하고 은퇴하기 위해 열심히 저축하고 안 쓰는 운동이 유행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 - 유익하진 않지만 무해한 인간들의 시대


  '성장(Growth)'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이다. 전 세계 국가를 GDP로 평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외형 성장과 돈의 팽창은 자본주의가 가져가야 할 숙명이다. 돈의 팽창은 물질(재화와 서비스)의 팽창과 어느 정도 상응하게 가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돈의 팽창과 물질의 팽창의 갭(거품)이 커지면 문제가 생긴다. 위기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국가와 정부는 벌지 않고 쓰지도 않는 인간을 제일 싫어한다. 그런 류의 인간은 자본주의 국가의 구성원으로서는 존재 가치가 없다. GDP와 물가상승, 수요와 공급 그 어디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인간, 통계와 수치에 잡히지 않는 비정량적인 인간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치부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취업을 독려하고 소비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 속에는 국가의 이익(세금:소득세, 소비세)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급여같이 녹아있다.


  부가가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콘텐츠만 생산하고 소비하는 그렇다고 타인에게 피해도 도움도 주지 않는 그런 유익하진 않지만 무해한 인간이 늘어난다.  혹자는 미래에 그런 인간을 '잉여인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당신은 잉여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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