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101 (개정판)
미애가 움직임이 없이 환하게 웃고 있다.
“으흐흐흐, 미애야~! “
나는 그녀 앞에 엎드려 몸을 떨며 흐느껴 울고 있다. 이제 나에게도 행복이 시작되려는 것인 줄 알았다. 그 행복은 나를 잠시 스쳐 지나갈 뿐 내 곁에 머물지 않는다. 행복 뒤에 찾아온 불행은 행복했던 것 이상의 고통을 가져온다. 차라리 그 행복이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서로에게 이런 감당하기 힘든 불행 또한 없었을 것이다.
“으흐흐… 왜?! 도대체 왜 그녀를 저에게서 떼어놓으신 겁니까?”
원망할 곳이 필요하다. 나지막한 소리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해 분노를 쏟아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에는 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그녀의 영혼을 같이 슬퍼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장례식장 한 구석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 곳에 앉아 홀로 소주를 마시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때 나도 같이 그녀와 소주를 마셨어야 했다. 그랬으면 아마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탁자 아래 내 손 안에는 작은 상자에는 쥐어져 있다.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반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에게 주려 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우승할 거라 믿고 있었다. 그녀가 우승하는 날 멋있게 프러포즈하며 주려고 했던 선물이었다. 주인을 잃어버린 선물은 떨어지는 눈물을 맞으며 젖어간다.
[그제 밤, 부산의 **동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검은 우비로 온몸을 가린 범인이 여성을 뒤에서 칼로 무참하게 살해하는 끔찍한 영상이 CCTV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경찰은 아파트 주변 CCTV를 탐색하며 범인을 행적을 뒤쫓고 있지만 당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우비를 덮어쓴 범인의 신원과 목격자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뉴스에서는 전국에 미애의 부고를 알리는 뉴스가 나오고 모자이크로 처리된 CCTV 속 범행 장면이 장례식장 안에 상영되고 있다. 잦아지던 곡 소리는 다시 커져가고 분노에 찬 조문객들의 욕설들이 터져 나온다.
범인은 검은 우비를 입은 자였다. 나는 범인을 봤다. 그는 아파트 입구에서 나와 빗 속에서 잠시 멈춰 섰다. 나는 차 안에서 그를 지켜봤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이었지만 그가 내 쪽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와 미애를 몰래 지켜봐 왔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범행을 나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이내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건물 입구를 빠져나와 빗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경찰에게 진술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시커먼 우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시종일관 고개를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모습은 우비 안에 그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확실한 범행 장면을 확보하고도 범인을 잡을 길이 없다. 철저하게 계획된 범행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게 뭐냐?"
"사직서입니다."
"하아 놔~ 어이가 없네"
미애는 법적으로 나에게 아무런 사람이 아니기에 휴가를 신청할 수가 없다고 한다. 법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법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신경 쓰지 않는다. 3일간의 사유에 맞지 않는 병가를 내고 회사로 돌아와서 다시 사직서를 내밀었다.
"도 팀장님~ 후임을 정해주시면 2주 정도 인수인계는 하고 나가겠습니다."
"뭔데? 왜 나가려는 건데?"
도과장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일까? 사람들은 항상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 보고 얘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입장이 우선이다. 그는 현재 나의 사직서로 인해 벌어질 업무 과부하와 부하직원 관리 소홀에 대한 회사의 질책이 두려울 것이다.
물론 내가 없다고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다만 약간 혹은 적지 않은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남겨진 자들은 그것 조차도 싫은 것이다. 타인이 그동안 받은 고통과 스트레스 총합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불편조차도 불평이다.
세상의 에너지는 돌고 도는 것이다. 내가 받은 나쁜 에너지는 돌고 돌아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가게 되어있다. 에너지는 이동되고 전환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개개인의 나쁜 에너지가 세상에 가득해질수록 세상은 각박해진다.
좋은 에너지 많아질수록 세상은 밝아지는 것이다. 이제 내가 받은 나쁜 에너지를 돌려주어야 할 때이다. 안타깝지만 이 에너지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내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지금 당장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희택 씨! 얘긴 들었네, 혹시 여자친구 일 때문인가? 그것 때문이라면 며칠 더 쉬었다 와도 괜찮으니 다시 생각해보지 않겠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미 마음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디 갈 곳은 정한 건가?"
"아.. 아니요 그냥 좀 쉬고 생각하려고요"
관리본부장인 박상무의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최근 가장 바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임원 중 하나이다. 그는 해외사업본부장에 관리본부장까지 겸직하며 해외사업과 재무상황의 악화로 정신이 없다.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인사 절차상 형식적인 짧은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는 크게 마음에도 없는 회유의 말을 던져본다.
사실 이런 힘든 경영상황에서 제 발로 나가 주는 직원이 더 고마울지도 모른다. 물론 더 많은 돈을 가져가는 부장이나 차장들이 나갔으면 하겠지만 사원이라도 뭐 지금은 가릴 때가 아니다. 때마침 본사에서 구조조정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희택 씨 안 나가면 안 돼요?"
"안됩니다"
결국 현지 씨가 나의 업무를 떠맡게 됐다. 그녀의 얼굴은 말 그대로 똥 씹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도 팀장의 업무 인수인계를 받으라는 지시에 온종일 짜증이 가득한 모습이다. 나는 그녀를 옆에 앉혀놓고 나의 기존 업무들을 하나씩 설명하며 관련 자료(파일)들을 전달한다.
"헐! 이렇게 많아요?"
"아직 더 있는데요"
"헐! 더 있어요? 이걸 어떻게 다 혼자서 해요?"
"그러게 말 이에요"
"예?!"'
"아... 아녜요, 도 팀장한테 얘기해서 빨리 인원 충원해 달라고 해요"
그녀는 머리가 복잡한 모양이다. 태평한 회사생활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제 칼 퇴근은 힘들 것이다. 아니 뭐 그래도 할지 모른다. 자신이 못해내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여러 번 경험한 그녀였다. 이제는 내 알 바가 아니다. 이곳과 그녀는 이제 내 삶의 영역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희택이 떠나면 우리 기획실 분위기는 누가 살리노?"
"박대리님~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많지~ 네가 기획실 똥 다 치우잖아~ 이구아나 똥도 치우고"
"하하하 대리님 많이 취하셨네요"
"도 팀장! 내 말이 틀렸어요?"
나의 송별회식 자리가 마련되었다. 회사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 비공식적인 회식 자리로 마련되었다. 그 말은 회사에서 회식비가 지원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기획실 IT 총괄인 박 대리는 평소 무뚝뚝하지만 술만 먹으면 감정적으로 돌변한다. 그것이 그의 사회생활에 발목을 잡은 것인지도 모른다.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는 회식자리에서 그 선을 자주 넘곤 했다. IT 파트장이지만 알게 모르게 나의 조력자 역할을 많이 해준 선임이다.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의 적용 때문에 그와 업무적으로 교류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나의 퇴사 소식에 가장 격분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 화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도 팀장을 향한 듯 보였다. 도 팀장은 그의 발언에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얼굴을 붉히며 술잔을 비운다.
"희택아! 오늘 1차 회식 비용은 니가 내라! 퇴직금도 두둑이 나올 텐데, 2차는 각자 각출해서 갈 사람만 가고"
품을 떠날 새끼에게서 정을 떼려는 것일까? 그나마 남아있던 정이 배신감으로 변한 것일까? 도팀장의 그 한마디에 기획실 멤버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옙~ 1차는 제가 쏩니다! 맘껏 들 드십시오!"
나의 우렁찬 한마디에 다들 조용하다. 도 팀장은 남은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사라진다. 그 뒤를 상한 대리가 쫓아나간다.
"희택아! 넌 애살이 많아서 어디 가서도 잘할 거야"
박대리는 나의 어깨를 다독이며 술잔을 채워준다. 나는 술을 들이켠다. 술자리에 남아있는 전략기획실 식구들을 기억하려 한 명 한 명씩 술잔을 건네며 술을 주고받는다. 도팀장의 눈치만 보고 있던 기획실 멤버들은 그가 사라지자 돌아가면서 나에게 마음속에 담아 뒀던 작별의 인사말을 꺼낸다.
"희택 씨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다른 데 가서는 야근 좀 그만하고 여자도 만나고 그래리"
방대리는 옆자리로 와서 어깨에 손을 얹히며 항상 그랬듯이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어조로 마지막 인사말을 건넨다.
"그래요 희택 씨 참 멋있는 남잔데... 어서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해요 그때 꼭 연락하는 거 잊지 말아요! 알겠죵?"
미화 씨도 나의 송별회를 위해 육아휴직 중임에도 회식장소를 찾았다. 그녀 또한 항상 그랬듯이 한결같은 미소와 함께 작별의 인사를 전한다.
"희택 씨~ 동갑인데... 선배 대접한다고 불편했죠? 이젠 편한 친구로 봅시다 그리고 참 결혼은 되도록 늦게 하는 게 좋아요~ 결혼은 미친 짓인 거 알죠? 하하하"
동갑인 보현 씨와는 정이 많이 들었다. ERP 전산화 업무로 항상 티격태격 대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일찍이 애 아빠가 되어 자유를 상실한 것이 후회되는지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결혼을 결사 반대하며 솔로의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가라는 조언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을 건넨다. 옆에서 듣던 미화 씨가 그러지 말라며 보현 씨의 팔을 꼬집는 시늉을 한다.
"희택아! 니가 꼬였지 참! 3년이 넘도록 막내 생활에... 기획팀 시다바리 한다고 개고생 했지, 이제 다른 데 가면 좀 잘 풀리길 바란다. 근데 이제 이구아나 똥은 누가 치우노? 허허 "
팀 최고 연장자 장대리는 도 팀장이 사라지자 거침없는 말을 내뱉으며 나를 위로하는 건지 자신의 기분풀이를 하는 건지 헷갈리는 작별인사를 건넨다.
"희택씨... 그동안 미안했어요, 항상 짐만 되었던 것 같아서... 흑흑..."
현지씨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손톱을 만지작 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한다. 스스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울먹이는 모습을 보인다.
"아녜요! 현지씨 내가 잘못했죠, 별것도 아닌 일에 화내고 열 올리고, 참 입사 전 회사 밖에선 사이좋은 오빠 동생 사이였는데... 참... 직장이 뭔지... 사람이 바뀌네요. 잊어줘요 그리고 미안해요"
팀원들의 작별인사에 진심이 느껴져서인지 아니면 술기운에 취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한다.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린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또다시 그 감정을 억누른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술이 차오르고 슬픔도 같이 차오른다. 술이 달다.
눈앞이 희미해진다.
“喜宅!你还好吗?” (희택! 잘 지내지?)
“艳艳!”(옌옌!)
춘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내가 손을 뻗어 춘옌의 이름을 외치자 그녀는 등을 돌리고 뒤돌아서 사라진다.
“Dawson! How have you been?”(도슨! 잘 지냈어요?)
“Jessica!”(제시카!)
춘옌의 모습은 사라지고 제시카가 내 앞에 나타난다. 나는 제시카의 이름을 외친다. 그녀도 미소만 띤 채 등을 돌려 사라져 간다.
“오빠!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미애야!”
제시카의 모습이 사라지고 또다시 미애가 눈앞에 나타난다. 나는 손을 뻗어 미애의 이름을 울부짖듯 외친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등을 돌린다.
그녀들은 모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눈은 촉촉하게 젖어있다.
“안돼~~~ 가지 마!”
“喜宅哥哥!(희택오빠!) Wake up! 정신이 좀 들어요?”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어지럼이 밀려온다. 희미하던 눈앞에 초점이 서서히 맞춰지며 눈 안에 한 나체의 여자가 들어온다.
“오빠! 그 동안 왜 연락을 안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