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관통하는 예술가

평범한 남자 EP 102 (추가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장… 장주임?!”

“희택오빠! 저 이제 장주임이 아니라 설예에요, 또 잊으셨어요?”

“어… 근데 네가 여기 어떻게… 그리고 왜 옷을… 그리고 여긴 어디야?”


장주임은 알몸으로 창가에 서서 브래지어를 고리를 잠그고 있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강한 빛을 막아선 그녀의 나체는 짙은 어둠의 실루엣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전혀 부끄러움이나 당황함 없이 태연한 모습으로 내 눈앞에서 속옷을 입고 있다. 순간 이불에 닿아 있는 나의 피부의 감촉이 느껴진다. 이불을 들어 내려다본다. 그제야 나도 알몸이라는 것을 알았다.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장면이 떠오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방 안을 스캔한 후 그제야 내가 호텔 방 안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어젯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기억 안 나세요?”

“어… 아무 기억이 안 나”

“오빠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자고 있는 걸 제가 데려온 거예요”

“헉! 진짜?”


난 전생에 공중전화였나 보다. 또 결국 공중전화박스를 찾았던 모양이다. 다행히 그녀가 구제해 준 덕분에 거기서 밤을 지새우진 않은 모양이다. 그녀가 아녔다면 또다시 아침에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들의 눈요기가 되었을 것이다.


“근데 네가 어떻게 그때 거기 있었던 거야?”

“희택 오빠! 그동안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아니, 묻는 말에 대답을 좀… 아앗! 머리야~”


말을 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녀는 나와 대화하는 동안 어느새 승무원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화장대에 앉아 얼굴을 화장한다. 그녀는 마치 오래된 연인이 침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다.


“오빠, 저도 여기에 살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저도 부산에 산다고요”

“헐! 그게 정말이야? 어떻게?”

“응, 원래 항공사에서 주는 외국인 승무원 기숙사가 있는데, 너무 답답해서 나왔어요, 작은 오피스텔 월세방 하나 구해서 나와서 살아요, 한국 올 때면 항상 거기에서 지내요”

“근데 왜 그때 싱가포르에서 만났을 땐 얘기 안 했어?”

“오빠가 연락하면 한국에서 만나 깜빡 놀라게 해 주려 했는데… 오빠한테 연락이 안 오더라고요, 제가 얼마나 서운했는 줄 아세요?”

“미… 미안”

“희택오빠! 다른 데로 이직한다면서요?”

“어?! 네가 그걸 어떻게?!”

“헉! 오빠! 나 늦겠다. 미안! 나 오늘 비행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나가봐야겠어요. 침대 옆에 연락처 다시 적어 놨어요. 연락해요 꼭!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나서 얘기해요.”

“아니, 잠깐만…”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어지럼증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떨군 채 잠시 멈춰있다 고개를 들었을 땐 장주임은 이미 승무원용 작은 캐리어를 끌고 호텔방을 나서고 있다.


“喜宅哥!再见!”(희택오빠! 짜이찌엔!)


호텔 방 문이 닫히는 틈 사이로 장주임은 한 손으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미소를 던진다. 이 모든 상황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전날 송별회식 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리고 장주임이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났으며 또 알몸을 한 채 누워있는 나의 모습과 장주임의 너무도 태연한 모습까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뭐지 이건 데자뷔인가?’


이상한 건 이 모든 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낯설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내가 양주에서 춘옌을 처음 만났던 그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이직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도 의문이다.




“후~하아 후~하아 후~ 하아”


숨이 차오르고 이마에선 땀이 흘러내린다. 벌써 3시간째 산을 오르고 있다. 완만하게 올라가는 한라산은 한반도에 있는 여타 다른 산들과는 사뭇 다른 풍경과 느낌을 가져다준다.


특히 한라산의 성판악 코스는 가파른 경사 없이 완만하게 계속 걸어 올라가야 한다. 한반도에 '악' 소리 나는 가파르고 굴곡 심한 산들이 삶의 역경과 고난의 경험을 안겨 준다면 한라산은 삶을 관조하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다주는 느낌이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산을 오르며 사색에 잠겨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본다.


DB중공업을 퇴사하고 나서 홀로 제주도 여행을 왔다. 그동안 나에게 일어난 감당하기 힘든 시련들을 떨쳐버린 시간이 필요했다. 힘든 삶을 이겨내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병들어감을 알지 못한다. 몸과 마음의 상처는 아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자신을 짓누르는 시공간을 떠나 치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빨리 가는 것보다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해요’


얼마 전 집 앞산을 오르다 만났던 한 아저씨의 말씀이 떠오른다[Ep 98 속도를 늦추는 법]나는 이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고 일과 사랑 사이에서 시련과 아픔을 겪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시련과 아픔이 다가올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의 나는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이다. 시련과 아픔은 성숙으로 가는 과정임이 분명하다. 이곳에 있는 돌과 나무들도 수많은 세월 속에서 풍파를 견뎌 왔기에 지금의 아름다움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한라산 진달래 대피소

“아, 여기가 진달래밭 대피소구나”


이제 정상까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들이켠다. 산 밑의 제주도의 드넓은 대지를 내려다본다. 바람이 불어오며 이마에 땀을 날려 보낸다.


눈앞에 멀지 않은 곳에 뒤로 길게 늘어뜨린 꽁지머리에 콧수염이 인상적인 남자 하나가 내 쪽을 향해 걸어온다. 그 모습이 마치 노숙자 같기도 하고 도인 같기도 한 모습이다. 그는 내가 앉은 기다란 벤치 한쪽 편에 앉아 나처럼 생수 병을 입으로 가져가 목을 축인다.


“오늘 날씨가 참 좋아서, 정상에 백록담이 잘 보이겠죠?”

“I’m sorry, I can't speak Korean”(미안해요, 전 한국말을 몰라요)

“Oh~ Sorry, Where are you from?”(오~ 미안해요, 어디서 오셨어요?)

“I’m from Taiwan”(대만이요)

“真的吗?认识你很高兴, 我叫全喜宅” (정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전희택이라고 합니다)

“噢!我叫张致中可你是中国人吗?” (오! 저는 장치중입니다. 근데 당신은 중국인이에요?)

“不是,我是韩国人”(아니요, 전 한국인이에요)

“那你怎么汉语说得这么流利?” (근데 당신은 중국어를 이렇게 유창하게 말합니까?)

“哪里哪里, 还差得远呢” (어디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哈哈哈”(하하하)

“하하하”


예상치도 않은 외국인과의 만남이 반갑다. 국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통하는 만남은 급속히 친밀해지는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중국어를 할 줄 알면 세계의 1/3의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하다.


“你是干什么的?”(뭐 하는 분이세요?)

“我搞艺术的”(전 예술을 해요)

“艺术?”(예술요?)


그는 예술가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개최된 국제 예술 세미나와 한국과 대만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미술 전시회 준비를 위해 한 달여간 제주도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며칠 전 전시회가 끝나고 귀국 전 남은 시간을 이용해 제주도를 여행 중이라고 한다.


비록 난 예술과는 거리가 멀지만 보기에 나이도 나랑 비슷한 또래이고 중국어가 가능한 나는 금방 그와 친해질 수 있었다. 나는 그와의 동행을 제안했고 그는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哇!终于到山顶了!好爽啊!”(와~ 드디어 정상에 도착이다. 너무 시원하다)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자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에 차오르던 열기를 날려 보낸다. 맑게 개인 날씨 덕분에 백록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나는 백록담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그 배경 속에 나를 넣어보려 가방에서 셀카봉을 꺼내 나와 백록담을 사진 속에 넣어본다. 정상에 올라온 수많은 등산객들도 다들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들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가 ep 102 (백록담).jpg 한라산 백록담

“哎! 小张! 你在干嘛?”(헤이, 친구! 너 뭐 해?)


대만 친구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갑자기 가방 속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유화용 캔버스와 물감을 꺼내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사진으로 추억을 담지 않고 그림으로 추억을 담으려는 모양이다.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백록담을 내려다보며 현란한 붓질을 시작한다. 그 모습을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고 그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고 사람들의 감탄 섞인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30분쯤 지났을까 그는 정말 빠르게 그림 한 폭을 뚝딱 만들어 내었다. 백록담을 사진에 담기 바쁘던 사람들은 이제 그의 그림을 사진에 담고 있다. 그는 다 그린 그림을 백록담을 배경으로 사진에 담는다. 그림 같은 배경 속에 그림이 있는 사진이다.


“你很厉害哟!”(너 정말 대단하다!)

“没什么”(별 것도 아닌데 뭘)

“致中! 我们一起拍一张照片吧!”(치중! 우리도 사진 한 장 같이 찍을까?)

“好啊!”(좋지!)


나는 셀카봉을 들어 그와 나를 백록담과 함께 사진에 담는다.


“저기 죄송한데,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그때였다. 어느 초췌한 모습의 남자 등산객이 대만 친구인 치중에게로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의 등에는 한눈에 봐도 어딘가 아파 보이는 아이가 등에 업혀있었고 앞으로 맨 커다란 배낭이 얼굴까지 올라와 있었다. 치중은 알아듣지 못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친구는 한국어를 못해요. 대만 사람이에요”

“아 그래요? 친구 분이신가요?”

“예! 뭐 그런 셈이죠. 하하 근데 무슨 일로?”

“죄송한데 이 분께 저희 부자(父子)의 그림 한 장을 좀 부탁해도 될까 해서요, 사례는 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척수성 근위축증(SMA)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어린 아들과 서울에서부터 이곳 제주도까지 도보여행을 왔다고 한다. 아들과 함께 제주도 한라산 등반을 끝으로 한 달간의 국토종단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와 아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서도 얼굴엔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뭔가 알 수 없는 둘의 애틋한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을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치중은 나와 그가 나누는 대화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그와 그의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뭔가 중요한 얘기가 오가고 있음을 눈치챈 듯 보였다. 나는 그에게 부자의 사연을 들려주었고 그는 흔쾌히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치중은 부자가 밝은 미소로 백록담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림 속에 담는다. 또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가 그리는 그림을 구경한다.


“와~”

“짝짝짝!”

“이야! 기가 막히는 구만!”

“허허! 보통 예술가가 아니구만!

“어머! 저것 봐! 너무 기발하다"

“짝짝짝”


시간이 흐르고 그가 그린 그림의 윤곽이 드러날 때쯤 주변에 모여서 그의 그림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백록담을 바라보며 서있던 부자는 무슨 사정인지 알 수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가 다 그린 그림을 보고 나서야 그 이유 깨닫고는 눈물을 흘린다.


그가 그린 캔버스에는 두 부자(父子)가 오른쪽과 왼쪽 양쪽에서 가운데 있는 백록담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왼쪽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고 오른쪽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업고 서 있는 모습이다. 그림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담고 있다. 그 미래는 부자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에게 사례를 하려 하지만 치중은 필요 없다며 한사코 그의 돈을 거부하며 나에게 아들이 치유되어 그림 속 오른쪽의 모습으로 이곳에 설 수 있길 기원한다는 말을 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致中! 你真棒! 真了不起哟!我真佩服你了”(치중! 너 정말 멋있다. 대단해, 내가 감탄을 금치 못하겠네)

“没什么了不起的呀”(뭐, 대단한 거라고 하하)

“那我们下山吧”(그럼 우리 이제 내려갈까?)

”好! let's go!" (좋아! 출발)


나는 치중을 바라보며 정말 진정한 예술가는 보는 것만을 그리는 것이 아닌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표현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사람,


그가 바로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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