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은 같이 온다

평범한 남자 EP 100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오빠! 그게 아니지!"

"어? 좀 쉬었다 하면 안돼?"

"벌써? 얼마 했다고 쉬어?"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다. 예상은 했지만 미애는 역시 스파르타 방식으로 나를 훈련시킨다. 훈련소에 다시 입소한 느낌이다. 연습 중에는 그 어떤 자비도 없다. 배드민턴 동호회 가입과 동시에 그녀와 나는 공식적인 연인이 되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그녀와 함께 체육관에서 땀을 흘린다. 동호회에서 들어오고 살이 5kg이나 빠졌다.


“10분만! 아니 5분만이라도 제발! 플리즈~”


그녀는 나를 빨리 선수로 키우고 싶은 모양이다. 나를 남녀 복식 파트너로 만들려는 것일까? 소문에 그녀는 이미 여러 번의 아마추어 배드민턴 대회에서 여자 단식과 여자 복식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제 남녀 복식만 우승하면 전 종목 석권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다. 그 영광의 순간을 나와 함께 하고 싶은 모양이다.


반복되는 강도 높은 연습에 대회는 커녕 훈련 중에 사망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나도 체력이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만약 그녀가 배드민턴을 일찍 시작했다면 아마 올림픽 꿈나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랬다면 나와 만날 수도 없었겠지만.


"희택씨~ 힘내요! 화이팅! 큭큭큭"


동호회의 다른 회원들은 나를 보며 터져나오는 웃음과 함께 한 마디씩 응원의 메시시를 보낸다. 그들도 남녀복식 챔피언의 탄생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배드민턴은 테크닉과 스테미너 모두가 필요한 운동이다. 나는 지구력은 강한 편이지만 테크닉이나 기교가 많은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녀는 나의 자세와 테크닉을 교정시키려 반복 훈련을 시킨다.

배드민턴 동호회

"오빠~ 수고했어! 오늘 고생했으니까 내가 맛난 저녁 살게"

"저녁? 뭐 사줄껀데?"

"오빠! 먹고 싶은거?"

"진짜? 오케이! 음…뭐 먹을까?"

“닭갈비 어때?”

“어?... 어 그래…”


그녀는 기다릴 줄 아는 자세가 부족하다.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결국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먹는다. 결정 장애와 배드민턴 테크닉 부족의 단점을 보완해 주는 참 고마운 트레이너이다.


연습이 끝나고 나서야 둘 만의 데이트가 시작된다. 하지만 나의 체력은 이미 방전된 지 오래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른다. 도대체 저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도 체력이 약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녀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진다.


"오빠! 나 오늘 연습경기 어땠어? 오늘따라 영 스매싱이 맘에 들지가 않네"

"어?! 괜찮았어"

"답변이 영 성의가 없는데... 나 아무래도 라켓 바꿀까 봐"

"새 것 같던데... 벌써 바꾸려고?"


그녀는 밥을 먹는 동안에도 온통 배드민턴 얘기다. 배드민턴이 없었다면 그녀는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닭갈비

“치이 이익~"


양배추와 갖가지 야채가 빨간 양념의 닭갈비와 함께 철판 위에서 뒤섞이며 익어간다. 맛있는 향이 콧속으로 스며들며 입안에 침이 고인다. 고된 시간으로 허기가 밀려온다. 훈련소 시절 사라졌던 입맛이 돌아온 건 분명 고된 훈련 덕택이었던 것이 다시 한 번 증명되고 있다.


식당 종업원이 주걱으로 닭갈비와 야채들을 이리저리 뒤섞으며 요리한다. 야채의 숨이 죽고 닭갈비가 익어 갈 때쯤 철판 가운데 자리를 비워 라면사리와 양념을 넣고 비빈다. 나의 시선은 철판 위로 향해 있다.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녀는 나에게 배드민턴의 자세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듯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닭갈비로 향해있다.


"리시브할 때 팔 동작이... 오빠! 내 말 듣고 있어?"

"응?! 어... 우리 소주도 하나 시킬까?"

"오빠!"

“미…미안 뭐라고 했어?”

“휴~ 이럴래? 내 얘기 듣고 있어? 글고 오빠 차가져 왔잖아”

“아… 맞네… 쩝…”


나는 입맛을 다시고 미애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째려본다. 코치가 된 후 그녀의 사랑스럽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나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어찌 보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과 노력을 들인 만큼 애착과 성취감이 늘어간다.


[너는 네 장미에게 받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장미가 그토록 소중해진 거야]

- <어린 왕자> 중에서 -


과거 읽었던 어린 왕자 속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별 의미 없이 함께 했던 수 많은 시간들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그 우정이 좀처럼 변치 않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의미 없이 보이던 시간도 쌓이고 쌓이면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 그녀와 나는 힘들지만 땀 흘리며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의미 있고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문제는 연인이 아닌 마치 코치가 선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더 가깝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미애야! 우리 다음 주말엔 같이 등산 갈까?"

"등산?"

"응~ 바람도 좀 쐬고 맑은 공기도 마시고"

"오빠~ 나 다음 달 대회 있는 거 알면서… "

"아… 맞다. 그래…"


남자라면 당연히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이 정도의 헌신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도 서운한 감정을 감출 수 없다. 연인관계는 사제(師弟)관계로 발전하고 있는 듯 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사제관계에서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는 봤어도 거꾸로 가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럼 발전이 아니라 퇴보인가. 엄격한 사제관계 속에서는 사랑의 감정을 언제 어떻게 싹 틔워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녀도 언젠간 나의 이런 헌신을 알아주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당시 여러 가지 일과 역할을 병행하는 소위 멀티태스킹(Muti-tasking) 능력을 겸비한 사람들이 세상의 인정을 받는 듯 보였다. 사제와 연인의 두 가지 역할을 넘나드는 멀티태스킹 능력을 갖추는 것은 나에게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 가지를 잘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두 가지를 동시에 하리오. 세상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걸 원하는 듯 보인다.


"띠링띠링"


[축하드립니다. 경력직 공채에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이메일을 통해 입사 관련 공지를 확인 바랍니다. - DG 오토모티브 -]


“얏호! 미애야! 오빠 드디어 합격했다!”

“진짜?! 대박! 완전 축하해! 오빠~”


최종 합격 메시지가 들어왔다. 순간 기쁜 마음에 미애와 부둥켜 안고 뛰는 모습에 식당 안 주변 사람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이직에 성공했다.


“오빠! 오빠! 소주시켜! 이런 날은 나라도 마시고 축하해 줘야지!”

“합격은 내가 했는데 술은 왜 니가 마시는데?”

“오빠 내가 면허가 없잖아 미안!”

“대리 운전하면 되지”

“안돼 안돼! 비싸! 우리 집에서 오빠 집까지 왔다 갔다 거리가 얼만데”


그녀는 모든 상황을 자신의 유리한 쪽으로 몰아가는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 그녀의 그런 모습이 얄밉지만 귀엽게 느껴진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능력까지 덤으로 주시는가 보다.


“오빠! 이제 나만 대회 우승하면…”

“하면?”

“그 땐 오빠랑 나랑!”

“응?!”

“뭐할까?”

“치! 휴우~”

“큭큭큭, 오빠 뭘 기대한 거야?”


뭔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들을 수 있겠다는 기대에 찬 눈망울로 그녀를 쳐다보다 결국 한숨으로 끝나버린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나를 놀리는 걸 좋아한다. 그녀는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능력까지 겸비했다. 나를 손바닥에 얹혀 놓고 가지고 노는 형국이다.


두 번 다시 넘어가지 않겠다 다짐하지만 그 다짐은 다짐일 뿐 항상 새로운 레파토리와 기발한 아이디어로 나를 골탕먹이는 신박함을 선사한다. 그녀는 나의 합격에 나보다 더 기분이 좋아보인다. 기쁨은 함께 하면 두 배가 된다고 했던가. 그 말이 실감난다. 그녀는 혼자서 나를 약 올리듯 소주를 들이키며 즐거워 한다.


“자~ 다 왔어 미애야”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본 그녀는 잠에 빠져있다.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시더니 결국 취해 잠들어 버렸다. 말없이 조용히 잠든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계속 잠만 잤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나는 조용히 그녀 몰래 다가가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 돌아가려 하는데 그녀가 팔을 들어 나의 목을 휘감고 끌어당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깨우는 유일한 방법은 왕자의 키스였다는 것이 또 다시 증명된다. 서로의 입술이 다시 포개어진다.


“오빠! 미안해!”

“뭐가?”

“요즘 나 때문에 힘들지? 대회만 끝나면 오빠가 하고 싶은 거 다 같이 해줄께”

“난 괜찮아 너랑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고마워, 항상 곁에 있어줘서”


그녀는 다시 나의 입술에 키스한다. 입술 사이로 연한 속살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뒤섞인다. 서로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탁!”

“오빠! 뭐야?”

“뭐가?”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미애는 뭔가 작고 딱딱한 돌맹이 같은 것이 차창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창 밖을 쳐다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주변을 돌아본다. 12시가 넘은 늦은 밤 아파트 안 골목은 조용한 적막만이 감돌 뿐 어디서도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다. 멀리 아파트 입구에 있는 경비실에는 나이가 지긋한 경비 아저씨가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모습만 보일 뿐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미애는 차 안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엇! 비네!”


하늘에서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잠시 뒤 하늘이 화가 난 듯 우르렁 거리더니 비는 금새 장대비로 변하며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왠 비가 이렇게 쏟아지냐? 밖에는 아무도 없는데? 너 잘못 들은 거 아냐?”

“아냐! 분명 들었어 뭔가 탁하고 부딪치는 소리, 오빠 못 들었어?”

“니가 요즘 대회 준비한다고 많이 예민해서 그런가 보다 어서 들어가서 쉬어”

“응 그래, 알았어. 오빠 조심해서 가!”

“자! 우산 쓰고 가 비 많이 온다”

“고마워!”


미애는 나의 볼에 뽀뽀를 하고는 우산을 펼쳐 쓰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 속을 잰걸음으로 아파트 건물 입구까지 걸어간다.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모습을 감춘다. 나는 차에 앉아 그녀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우비를 입은 사람이 아파트 입구에서 나와 건물 뒤로 사라진다.


한참이 지나도 10층의 그녀 방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감돈다. 나는 차에서 나와 아파트 입구로 뛰어간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잠시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는 피가 낭자한 채 쓰러져 있는 미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미애야! 으아아아악! 안돼~!”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오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