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 위에 건물주 그리고 기술주

평범한 남자 시즌 2-5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다들 각자 CR 자료 희택씨한테 보내줄 수 있도록! 희택씨는 경력에 기획실 출신이니 그런 거 잘 하겠지, 내가 취합 양식 파일 보내줄 테니까 거기에다 정리해서 보내줘, 국가별 차종별로 정리하는거 잊지말고~"

"예 알겠습니다"

"참! 중국 자료는 좀 있다 구대리 오면 받고"


입사 첫날부터 자료 취합 업무가 떨어졌다. 기획실에서 지겹도록 하던걸 여기서도 하게 된다. 그것도 첫날부터...취합 업무의 관건은 '쪼기(Push)'이다. 자료는 가만히 있다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자료를 쥐고 있는 자들의 성향을 잘 파악해서 그들이 내가 필요한 자료를 제때 작성해서 보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는 지금 난 팀원들의 성향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다는 것이다. 자료 취합을 정해진 시간 안에 해내는 능력은 원만한 대인관계를 의미한다. 사소하고 단순한 업무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직장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파악하게 된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료를 취합하는 일은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기에 정말 피곤하기 때문이다.


기획업무는 기본적으로 러우데이터(Raw data : 미가공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각 부서별, 파트별 데이터들을 모아서 분석을 통해 도식화 함으로써 의미있는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다. 그 결과물을 통해 앞으로 해야할 일과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일을 하고 싶어도 러우데이터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자료 취합이 모든 일의 기본이자 전부이다. 각자의 컴퓨터 속 잠자고 있는 미가공 데이터를 내 컴퓨터로 가져와야 한다. 이 과정 속에서 갑을 관계가 형성된다. 자료를 가진 자가 갑이고 그걸 요구하는 자가 을이 되는 것이다. 만약 을이 직급이 더 높다면 좀 수월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적지 않은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희택씨 난 보냈어"

"옙 감사합니다."


메일을 확인한다. 아직 명함도 나오지 않아 인사팀에 물어서 나의 회사 메일 주소과 회사 사내 메신저를 ID와 PW(패스워드)를 확인했다. 인사팀에서 발송한 입사 축하 메일을 제외하고 일본 담당인 우과장이 나의 첫 메일 발송자이다. 그가 첨부한 엑셀 양식에는 취합할 자료가 거의 없다. 메일에는 한 줄의 짧은 멘트가 적혀있다.


[일본파트 2011년 CR 차종 및 금액 없음]


정리할 자료가 없으니 회신이 가장 빠른 것이었다. 그는 일본 담당이지만 사실 일본에서 발생하는 매출은 극히 미비하다.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자체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다. 폐쇄적이며 독자적이다. 그들의 자동차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다. 자동차 부품을 한국에서 수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일본 자동차 램프 회사에서자국 내 부품 수급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이례적으로 한시적 부품 공급만 있을 뿐이다. 그럼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회사는 30년 전 처음 자동차 램프사업을 시작할 당시 램프에 대한 기술이 전무했다. 자전거의 램프를 생산해 본 경험은 있지만 자동차에 장착되는 램프는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회사는 일본의 램프 회사와 기술 제휴 협약을 맺고 초기에 그들의 램프를 복제 생산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로열티를 3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매년 꼬박꼬박 그들에게 상납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거의 독자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맺은 불합리한 계약에 족쇄가 채워져 회사의 매출이 증가할수록 그들에게 지급되는 로열티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조물주(造物主) 위에 건물주가 있는 것처럼 산업계에선 기술주(技術主)가 있다. 빨대를 꽂아놓고 주구장창 피를 빨아댄다.


역사적으로 산업의 태동이 빨랐던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 해마다 전 세계에서 로열티로 거둬 드리는 돈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한국의 조선업도 해마다 유럽의 선급(Classification, 船級)과 원천 기술을 가진 회사로 빠져나가는 돈이 수천억 아니 수조 원은 될 것이다. 그만큼 원천 기술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것이다. 수많은 인간들이 현장에서 열심히 피땀 흘려 만들어낸 부가가치의 상당 부분을 그들이 홀랑 먹어버린다. 기술의 선점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렇기에 해마다 선진국들은 과학기술 발전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자본을 끌어오고 자본은 다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선순환이 일어난다.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되는 것은 자본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철학, 인문, 예술 같은 학문들은 외면 받는다.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자본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사회와 기업은 의대와 공대만 인간 취급을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인간을 탐구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세포와 물질을 연구하고 개발하기에만 혈안 된 것 같다. 인간이 소외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희택씨~ 난 지금 미국 공장이랑 화상회의 들어가야 해서 오후에 보내 줄께요. 미안해요"

"예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윤대리는 화상회의를 위해 회의실로 향하면서 자료 제출의 책임을 인지한 멘트가 그나마 나를 안심시킨다. 이대리는 노트북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갈 기세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이대리님 혹시 CR자료 언제까지 가능하시겠습니까?"

"어?! 아~놔! 지금 좀 바쁘니까 나중에~"

"아~ 네..."


그는 귀찮은 듯한 말투로 받아치고는 화면 속에 복잡한 원가 계산서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의 시커먼 눈두덩이는 왜 생겼을까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명의 빈자리가 보인다.


'송중건 대리? 여기도 대리 천국이구만'


그의 자리 노트북 옆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과 아내의 사진이 놓여있다. 활짝 웃고 있는 그의 가족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힘이 샘솟게 만드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는 저 사진을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에너지를 느낄 것이 분명하다. 그게 바로 가족의 힘이다.


"주차장님~ 혹시 이 자리는?"

"아! 송대리? 걔 오늘 공장으로 바로 출근한다고 했는데... 전화 한 번 해봐"

"아~ 네 알겠습니다"

"띠리리링"

"안녕하세요 이번에 해외영업부로 입사한 전희택이라고 합니다."

"아~ 혹시 그 경력!?"

"예..."


그에게 전화로 첫 인사말을 건넸다.그도 다른이들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나의 이름보다 나의 경력이 더 중요해 보인다. 이름을 '전경력'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다행히 그는 CR자료를 이미 정리해 놓은 상태라며 자신의 컴퓨터를 켜서 가져가라며 자료의 저장위치를 설명해준다.

그 폴더의 위치를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가지에 가지에 가지를 친 울창한 폴더 숲에서 내가 원하는 자료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가 말해준 파일명으로 폴더 검색으로 통해 찾아내었다. 문제는 같은 이름의 파일도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행히 파일명 마다 끝에 작성일자를 표시해 어떤 것이 가장 최신의 것인지 알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그가 정리한 자료를 보면서 알게된 사실 하나는 그가 유럽담당이며 적어도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러데이터는 그냥 Ctrl+C(Copy) & Ctrl+V(Paste)의 두번의 클릭으로 오류없이 양식에 깔끔하게 입력된다.


"엇! 이게 누구야?"

"아~ 안녕하십니까! 전희택이라고 합니다"

"오~ 경력!"




*선급(Classification, 船級) :선급협회가 상선(商船)에 매기는 선박의 등급.

배가 외항(外航)할 수 있다는 보증이다. 주로 해상보험업자나 화주(貨主)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선박을 매매할 때나 대차(貸借)할 때의 평가기준이 된다. 선박은 한국선급의 검사에 의해서 등급이 매겨져 선급 원부(船級原簿)에 등록되고 선급증서가 교부된다. 선급이 매겨진 선박을 선급선(class boat)이라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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