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장은 핸드캐리

평범한 남자 시즌 2-9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헉~ 헉! 희택아~ 천천히 좀 가자"

"야! 왕년에 동구는 어디로 간겨?"

"야~ 나 이제 등산 접었다"

"왜? 그럼 여자도 접은 거가? 캬캬"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화창한 늦겨울의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꼬치친구 동구와 함께 산에 오르고 있다.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고향,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산이 너무 당겨서 친구를 꼬셨다. 결국 동구 녀석이 당첨되었다. 하산 후에 오리불고기에 동동주를 쏜다는 조건으로 나의 제안에 응낙했다.


“여자는 접을 수 없지 영원히~~ 큭큭큭”

“그럼 술 담배라도 좀 줄여라!”

“여자도 없는데, 술 담배라도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사냐?”

“그래… 산을 접는게 낫겠다. 하하하”


과거 등산 동호회를 같이 누비던 동구는 산을 끊고 한동안 술과 담배에 절어 지낸 것 같다.

산을 오르는 내내 고개를 땅에 처박고 가쁜 숨을 할딱거리며 힘들어한다.

과거 그는 나와는 달리 등산 동호회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그 속에서 너저분한 인간관계에 지친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성관계에서 몇 번의 쓴 맛을 보고 동호회에 발길을 끊었다.


♩♬ 눈물이 나기 전에 그대로 멈춰라

이별이 오기 전에 그대로 멈춰라

그대가 떠날 수 없게

날 버리고 갈 수 없게

지금 이 순간부터 시간아 멈춰라

잘가란 말 어떻게 잘하란 거니

어떻게 널 웃으며 보내란 거니♪♫


라디오에서 다비치의 [시간아 멈춰라]가 흘러나온다. 구슬픈 두 여자의 이별 노래에 동구와 나는 어느 새 노래 가사에 동화되어 따라 부르고 있다. 안타깝지만 고음처리가 되지 않아 돼지 멱따는 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진다. 다행히 숲 속엔 나와 녀석 둘 뿐이다. 동구는 어디서 구했는지 아저씨들이나 들고 다니는 휴대용 라디오를 하나 장만해서 등산가방에 덜렁덜렁 달고 있다.세상사의 절반의 고통의 이성관계에서 온다. 그래서 일까 인기 있는 대중가요 가사의 대부분은 그런 사랑의 이별와 상처를 노래하고 있었다. 가슴을 여미어 오는 듯한 노래가사는 왜 그렇게 다 내 얘기 같은지 모르겠다. 사랑 때문에 행복하고 즐겁다는 동화 속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온통 사랑 타령에 힘들어하는 내용 일색이다.


젊은 남녀가 많이 모이는 곳은 항상 염문(艶聞)이 파다하기 마련이다. 과거 동구와 내가 속해 있던 등산 동호회도 그러했다. 내가 좋아하는 이성(異性)을 다른 이도 좋아하고 그 이성은 자신을 쫓는 여러 명의 이성을 저울질한다. 그런 모습에 질려 새로운 다른 이성에게 옮겨가지만 새로운 이성도 들이대는 여러 이성 사이에서 고민하긴 매한가지이다. 그러다 차츰 이성(理性)을 잃어간다. 그렇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즉흥적인 이성 간의 쾌락을 쫓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충동적인 성적 욕구만으로는 바로 선 이성관계가 성립되긴 힘들어 보였다. 나 또한 그 속에서 공식적인 첫 연애를 경험 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고 동호회를 떠났고 동구는 그 이후에도 그곳에 남아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겪은 모양이다. 그도 결국 동호회를 탈퇴했고 그 후로 오랫동안 산을 찾지 않았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야~ 너 전화 온 거 아냐?"

"어? 누구지? 전화 올 데가 없는데..."

"여보세요?"

"어~이! 희택! 어디야?"

"누구세요?"

"와~ 섭섭하네, 내 목소리도 못 알아보고, 니 사수다!"

"앗! 예 구대리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어쩐 일은 별일이지~"

"예?!"

"어디야?"

"산인데요?"

"산?! 거기서 뭐해?"

"등산 중입니다"

"내려와! 빨리!"

"예?!"


느닷없는 사수의 전화, 그리고 느닷없이 산에서 내려오라는 그의 말에 더 당황스럽다. 그의 말로는 긴급 상황이 터졌다는 것이다. 그 상황은 이러했다. 중국 베이징 공장의 1050 ton급 대형 사출 성형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현지에서 문제가 되는 사출기의 노즐의 스패어 파트(Spare part)가 없어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해당 사출품의 재고도 없는 상황이라 자칫하면 차주 월요일 완성차 라인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완성차 조립 라인이 멈춘다는 것은 엄청한 손실금액 발생한다는 것이고 그 귀책이 우리 회사로 인한 것이라면 그 비용 또한 자사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막대한 비용은 일개 부품 협력사를 휘청거리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충격을 안겨줄 수 있다. 그것은 자동차 부품 협력사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일이 반복될 경우 부품 협력사 라인업에서 아웃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야! 니 사수 졸라 웃긴다! 그리 급하면 지가 가면 될 일이지 굳이 부산에 와있는 너보고 가라는 건 또 뭐냐?"

"휴~ 뭐 낸들 알겠냐? 까라면 까야지"

“야~ 오리불고기에 동동주는~~~~?”


나는 급히 산을 내려가야 했다. 동구은 나 때문에 산행이 유격훈련으로 바뀌어 버렸다. 빨라지는 나의 발걸음을 쫓다 치쳐서 결국 따라오기를 포기해버린다. 바위에 걸터앉아 멀어지는 나를 향해 오리불고기를 외쳐댄다.

구대리는 일요일 아침 대구발-베이징행 비행기 티켓을 예배했으니 새벽에 대구공장에서 스패어 파트를 픽업해서 출국하라는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부산 집에 도착했고 땀으로 젖은 몸을 씻고 어머니가 차려준 집밥을 허둥지둥 입에 넣는다.


“아이고~ 무신 놈의 회사가 주말도 없이 사람을 불러 재끼노?”


나 대신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가 내심 적잖은 위안이 된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다시 차를 몰고 밤길을 달려 기숙사로 향한다. 부산에서의 첫 주말 저녁은 그렇게 사라졌다.


"잠시 뒤 북경행 KE488 항공편의 탑승이 진행될 예정이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해외출장에 긴장한 탓인지 등산으로 몸은 피곤했지만 불을 끄고 매트리스에 누워도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며 잠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뜬 눈으로 새벽 늦게까지 뒤척이다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나왔다. 대구 공장에 들러 경비실에 맡겨놓은 사출기 노즐 스패어 파트와 각종 샘플제품들을 캐리어에 가득 담아 공항으로 왔다. 출국심사가 다 끝나고 탑승 대기 장소에 앉고 나서야 온몸의 긴장이 풀어진 듯 잠이 쏟아진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이륙과 동시에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기내식도 거르고 착륙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잠에 취해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입국심사를 거치고 수화물을 찾아 베이징 공항 입국장을 빠져 나온다. 입국장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입국장 팬스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다리는 누군가의 이름 팻말 혹은 단체의 명판을 들고 그 문구를 입으로 외쳐댄다. 그 속에서 낯익은 회사 점퍼를 입은 한 남자가 [DG 오토모티브]라고 적힌 A4 종이를 들고 초조한 모습으로 입국장 쪽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한 눈에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您是DG车灯公司派过来的吗?”(당신은 DG램프에서 보낸 사람인가요?)

“是是~ 您是全喜宅?”(예~ 당신이 전희택 씨인가요?)

“对” (맞아요)

“我是DG车灯公司司机,请跟我来吧” (전 DG램프에서 기사입니다, 절 따라오시죠)


그 사내는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앞장선다. 뭔가에 쫓기듯 잰걸음으로 공항을 빠져나가 주차장으로 향한다. 그는 나의 짐을 받아 트렁크에 싣고는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部长! 我接他了, 马上到, 知道了"(부장! 만났습니다, 금방 도착합니다. 알겠습니다)


기사는 전화 끊기가 무섭게 가속 페달을 힘껏 밟는다. 차는 굉음을 내며 앞의 차들을 추월하며 마치 레이싱하듯 질주한다.


"오~~ 这太快了吧?"(오~ 이거 넘 빠른 거 아녜요?)

“不好意思, 现在情况太紧急,请您谅解一下!”(죄송한테 상황이 급박해서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불안한 마음에 오른손을 들어 차문 위의 손잡이를 움켜잡는다. 10여분이 채 안되어 공단에 진입한다.

수많은 공장들이 끝없이 들어서 있다. 중국의 사이즈답게 공단의 도로는 끝없이 뻗어있다.


잠시 뒤 익숙한 회사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차는 정문에 닫기도 전에 경적을 울려댄다. 입구의 차량 진입 차단기가 올라가고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공장 입구 도로 양쪽으로 회사 점퍼를 입은 직원들이 마치 사열하듯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닌가? 본사의 새로운 영업담당 입사를 축하하는 퍼레이드 인가? 늘어선 중국 직원들의 사열을 받으며 공장 정문 입구에 멈춰 섰다. 차에 내리려고 하는 순간 험상궂게 생긴 깍두기 머리를 한 덩치가 차문을 뜯어낼 듯 열어젖힌다.


"노즐은?"

"예?! 예~ 캐리어에.."

"빨리 내놔!"

"예?! 예"


그의 불호령 같은 재촉에 자동반사적으로 트렁크를 열어 캐리어 속에 있던 스패어 파트를 건넨다.그는 스패어 파트를 받자마자 공장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를 따라 사열하던 전 직원들이 우르르 그를 따라서 공장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순식간에 벌어진 대이동 후 정신을 차려보니 공장 앞에 나 홀로 서있다.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공장 안으로 들어가려니 지문 체크기가 있어 진입이 불가하다. 공장 앞 커피 자판기가 있는 휴게장소에 멍하니 서있다. 중년의 한 아주머니가 커다란 쇠 집게를 들고 내 옆을 서성이며 쓰레기를 줍고 있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나는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베이징의 매서운 겨울 바람 맞으며 조금씩 몸이 얼어가고 있을 때쯤이었다.


"아~ 미안! 정신이 없네, 니가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해외영업팀 경력사원인가?"

"예 안녕하십니까 전희택입니다."

"어~ 난 북경공장 김고수부장이야, 생산총괄이지. 하마터면 라인 멈출뻔했네"


그는 그제야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그는 이제 한숨을 돌렸다는 듯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종이컵을 건넨다.커피의 온기가 얼어있던 손을 타고 몸으로 전도된다.


"그럼 구대리 부사수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 녀석 일 많다고 투덜대더니... 이제 좀 튀어나온 입이 들어가겠구먼"

"공장이 생각보다 정말 크네요"

"뭐 작지는 않지, 얼마 전에 증축했어, 기왕 왔으니 공장 구경하고 식당에서 밥 먹고 돌아가!"

"예?!... 예"


그는 오후 늦게 돌아가는 비행기 편이 있다며 그 편에 복귀하면 될 거라고 한다. 나의 첫 출장은 오로지 핸드캐리(Hand Carry)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앞으로 종종 이런 일들이 생길 거라고 일러둔다. 구대리가 그 일을 수없이 해왔고 이젠 그 일이 내 일이 될 거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자동차처럼 쉬지 않고 돌아가는 라인 생산체제에서 각 부품의 차질 없는 공급 조달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완성차 생산라인의 스톱을 막기 위한 긴급한 상황들이 수도 없이 발생한다. 그 상황들을 유도리 있게(때론 편법 와 불법을 써서라도) 잘 막아내는 것이 협력사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였다.


그런 협력사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완성차 라인은 오늘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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