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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r 20. 2020

같이 할 수 없는 이 시대의 남녀

[2019년 이상문학상 대상]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다시 또 문학을 집어 들었다. 문학청년? 아니 문학장년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또 다른 인내를 배우게 하는 과정인 것 같다. 서서히 진행되는 스토리의 전개와 작가 특유 언어로 표현되는 묘사와 비유 속에 묻어있는 의도와 생각들이 깨달아가는 순간 밀려오는 감동과 깨달음은 문학이 주는 커다란 재미이다. 비문학을 선호했던 나에게 이제는 문학이 한 차원 더 높은 글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논픽션보다 실용적이고 전문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지만 삶 속에서 묻어나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들을 스토리 속에 녹아내는 일이야 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창조적인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 실용, 전문, 논리는 인간보다 AI가 더 뛰어난 세상이 도래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지만 작가 아닌 작가 같은 그녀?


 "윤이형 작가" 생소한 이름의 그녀를 검색하고 나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작가 활동을 그만둔다는 기사였다. 2019년에 이상문학상을 대상을 마지막으로 작가 활동을 중단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사를 읽고 알아본 문학계에도 번져있는 불합리한 현실이 한국의 실력 있는 작가를 사장(死藏)시켜버리는구나 하는 안타까움에 탄식이 밀려온다.

윤이형 작가

 또 서론이 길었다.


두 고양이의 죽음과 두 남녀의 이별


  같이 살지만 융화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을 지키는 고양이, 치커리와 순무의 죽음을 통해 두 남녀의 결혼과 육아 그리고 이별(이혼)을 이야기한다. 암수의 막을 수 없는 끌림으로 맺어진 남녀의 사랑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결혼, 양육, 생계유지) 속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누구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사랑은 부담으로 변질되어 간다.


  자신의 삶이 바로 서지 않은 젊은 남녀에게 찾아든 결혼과 양육이 서로를 갈아먹는 현실에 좌절한다. 서로는 서로를 배려하고 인내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여드는 현실의 족쇄가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은 누구도 원치 않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제도와 시스템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남녀의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 그리고 그 결실(아이)을 지키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는 과정 속에 적응한다. "희은"과 "정민"이라는 자신 고유의 정체성을 버리고 초록(아이)의 엄마와 아빠, 학부모, 사위와 며느리로서의 역할만을 쫓다 결국 모두가 파멸의 길로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결국 서로를 놓아준다. 그 과정 속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는 "초록"은 사랑하지만 같이 할 수 없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빠와 엄마 모두 자신을 사랑하지만 정작 둘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자신이 놓여있다.  


   과거 부모들이 살아온 길을 답습하길 바라는 변하지 않는 사회 제도는 너무도 변해버린 그리고 더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청년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세상의 법과 제도를 만드는 일을 과거에 결혼하고 자식을 키운자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살아온 현실의 잣대를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도 똑같이 끼워맞추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고생을 모른다는 말로 너무 쉽게 치부해버리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 고귀한 것처럼 묘사되던 시대는 저물어 간다. "자식 때문에..."라는 말로 이어간 결혼 생활의 말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자신도 사랑도 사라진 삶은 결국 삶을 살아갈 목적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저성장 시대의 청년들의 안타까운 사랑


  경제적으로 직업적으로 바로 설 수 없는 청년들의 사랑은 위태롭다. 겪어보지 못한 현실의 벽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사실 부딪친 벽은 생각보다 높고 견고하다.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짐(가족)이 무거워서이고 서로의 철없는 사랑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미움이 싹트게 된다. 사실 그 미움은 벽을 만든 세상을 향했어야 하지만 어느 누구도 어디서도 알려주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다. 그냥 온전히 두 남녀가 감내해야 할 인생의 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혼하고 결혼하지 않는 청년들을 비난하기 전에 왜 그럴까를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잣대가 아닌 그들의 삶 속에서 들여다봐야 한다. 책임지지 않을 거면 비난하지도 말아야 한다. 청년들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 느껴야 하지만 결혼과 양육이 인간의 절대고귀한 사명이라는 미명 하에 저성장 속에 놓인 자본주의 경제의 냉혹함을 온몸으로 버텨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젠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치우지지 않은 남녀의 문제를 얘기하다


 사실 소설의 초반부를 읽어가며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의 야류작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또 한국 여성이 처한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한 현실을 묘사하려는 것일까? 혹시 그 화살을 방향을 남성에게로 향하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제 더 이상 식상하는 페미니즘 스토리를 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행히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녀의 사랑, 결혼, 육아, 자아실현(정체성) 등에 대해서 남녀의 서로 다른 입장을 잘 표현해내었다. 여자가 쓴 글이라 자칫 여성에게 치우칠 수 있는 적지 않은 요인에도 불구하고 중도를 지키고 남성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일까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닌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하고 있다. 여자 주인공인 "희은"과 남자 주인공인 "정민"의 행동과 심리를 각자의 관점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희은"의 분량이 조금 더 많다는 것은 작가가 여성의 삶을 더 많이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대의 평범한 남녀가 사랑으로 맺어져서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면서 맞이하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작가 특유의 언어감각과 인상적인 묘사로 표현해내고 있다. 주목할 점은 그 비난의 화살을 서로에게 겨누지 않고 사회와 국가에게로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가 만들어놓은 틀에 희생당하고 있는 이 시대의 남녀는 결국 사회와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며 사회 구성원 생산과 양육으로 국가 존속과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존재일 뿐이다.


사람이 먼저다?


 이제는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사회와 제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이 고통받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남녀는 단지 가까이 있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서 원인을 찾았을 뿐이다. 사실 그 원인은 그들이 아니라 사회와 제도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남녀가 서로 헤어지고 고통받는 것은 그들 탓이 아니다. 사회와 제도라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허구,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태초부터 주어진 남녀의 끌림을 악용한 것이다. 환경과 현실이 초심의 사랑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서로를 비난하게 만든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미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붙잡힌 제도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녀가 같이 할 수 없는 현실을 감각적인 묘사와 현실적인 서술로 잘 표현해 내었다. 윤이형 작가의 치우지치 않은 그리고 이 시대의 현실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각과 그것을 치밀하게 글 속에 녹아내는 스토링텔링에 감동받았다.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in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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