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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Feb 19. 2020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미래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가는 거야!"


   30대까지 철석같이 믿어왔던 나의 신념이다. 그 굳건하던 신념도 세상 속에서 깎이고 닳아가며 무너져 갔다. 세상엔 나의 의지보다 강력한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중력 같은 우주의 섭리라고나 할까?


사랑,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나의 삼십 대는 일과 돈 그리고 짝을 찾는 행위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은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다. 정신없이 시간에 쫓겨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엇하나 인생에서 큰 의미 있는 무언가를 이뤄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인생은 결코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은 인생의 중반부에 접어들면서까지 나의 삶의 동반자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30대의 전반전이 끝나고 난 후부터 스스로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려 노력했다. 지인을 통한 소개팅부터 온라인 만남 그리고 결혼정보회사까지 적지 않은 이성(異性)을 만났다.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쏟아부으며 나의 반쪽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과 인간관계 속에서 받은 고통을 결혼을 통한 행복으로 보상받고 싶은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동안 주말마다 경조사를 챙기며 친구와 지인들에게 뿌린 경조사 비용 또한 한꺼번에 거둬들여야 할 적지 않은 수확이었고, 직장에서 남들이 다 누리는 경조사(결혼)의 유급 휴가와 보너스 또한 내가 챙겨 먹어야 할 몫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은 꼭 해내야만 하는 미션처럼 느껴졌다.


- 섣부른 기대 -

그 어떤 일이라도 섣부른 기대는 독이 된다.

특히 사람과 사랑에 관한 일이라면

더더욱

                                          - [모든 순간이 너였다] 중에서 -


   내가 흘린 땀과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땀 흘려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 건강을 얻고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땀과 노력만으로 해결되는 그런 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이성 문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성과의 만남은 흥분과 설렘으로 시작해서 갈등과 분쟁으로 이어졌고 그 갈등과 분쟁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처음 시작 때의 사랑의 약속은 배신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그 일련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 속에서 깨달은 것도 적지 않다. 일(돈)과 공부(지식)는 배신하지 않지만 사람은 배신한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사람에 대한 섣부른 기대와 설렘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특히 이성이라면 더욱더...


왜 일까?

 

   사랑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나면서 무엇 때문일까를 곰곰이 고민했다. 나이가 들고 사회에 물들면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나의 생각과 관념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인정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니겠지 했지만 나 또한 속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사회에서 물들어간 많은 이들이 그러하지 않을까? 결국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해진 세상에 결혼과 사랑도 결국 이기주와 개인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혼

나를 위한 사랑 그리고 결혼


    짝을 찾는 행위의 모든 기준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연애를 할 때도 이성을 찾을 때도 나에게 필요한 사람을 찾았다. 결혼 또한 나를 위한 결혼을 준비하는 것이다. 내가 그러할진대 상대방도 그렇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내가 속된 사람인데 선한 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 사실 그런 사람은 없다. 내가 속된 만큼 속된 사람을 만나는 법이다. 계산기로 서로를 계산한다. 각자는 자신을 위한 사랑과 결혼만 찾아 헤맨다. 자본주의 세상 속에 놓인 인간들은 결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경중이 있을 뿐이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아가페(Agapē)적인 예수의 사랑을 실현할 수 없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열정은 바뀐다.


  20대 때까지 순수했던 사랑에 대한 열정은 세속의 성공과 돈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TV와 미디어 속에서 보여주는 세상은 성공과 돈을 가진 남자가 사랑도 가져가는 것처럼 묘사했다. 남자의 성공 공식은 돈과 명예 그 뒤에 따라오는 사랑이었다. 여자들도 그런 성공한 남자의 품에 안기는 사랑을 꿈꾸는 듯 보였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 경제 논리는 남녀 간의 사랑 속에서도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시장경제 속에서 인간이기 이전에 하나의 상품이다. 서로는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부와 명예 그리고 외모와 능력이라는 상품 가치를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내면이 피폐해짐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걸 증명하듯 세계에서 외모와 개인적 능력(스펙)이 이렇게 뛰어난 나라가 없다. 한국 화장품과 성형술이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고 각종 수많은 자격증(스펙) 학원들이 판을 친다.


   자본주의 시장 속 미디어와 광고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뇌는 더욱더 그런 경제적 논리에 입각한 상품을 찾게 되고 나 또한 더 좋은 상품이 되려 발버둥 친다. 명품으로 자신을 도배하는 것은 내면이 초라한 자신을 감추기 위한 것이고 그 명품에 자신을 투영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일 뿐이다.


  두 대륙이 부딪친다


   본능적으로 시각에 취약한 수컷들은 그런 여자들의 공략에 쉽게 무너진다. 여자들의 겉에 드러난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넘어간다. 여자들도 남자의 재력과 능력에 눈이 멀어 자신과 맞지 않는 신발을 신는다. 결국 결혼이라는 삶 속에서 융화되기 힘들다. 같은 공간 속에서 오랜 시간 살아가는 것은 그런 외형적인 것들로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의 공간을 내어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공간을 지키는데 익숙해져 있다.

화산, 지진, 쓰나미

  두 대륙판이 충돌하면서 지진과 화산, 해일(쓰나미)이 일어나는 것처럼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던 두 인간의 만남 또한 충격이 없을 수 없다. 자신의 세계가 견고해질수록(나이가 들수록) 그 충격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세계가 연약하기에 쉽게 친해지고 융화되지만 성인은 다시 아이의 정신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라고 하는 것인지도...)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이제 서로를 고치려 든다. 같이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의 허물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갈등이 깊어가고 서로의 내면은 상처 받는다. 미련 없이 갈라지거나 어쩔 수 없이 살거나 둘 중 하나이다.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세상의 분위기에 맞게 이혼율도 급증한다. 졸혼이나 황혼이혼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또한 자식과 주변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탱하던 지겨운 결혼 생활을 끝내고 싶어 하는 심리일 것이다. 결국 서로를 고쳐보려 하지만 서로를 고치기를 포기하고 각자의 길을 간다.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남녀 관계는 항상 육체적인 욕망 추구와 정신적인의 욕망 고수(固守)가 충돌한다. 상대를 통해 성적 욕구는 충족시키고 싶지만 나의 생각과 행동은 통제당하고 싶지 않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모두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인간의 욕망은 다른 방법을 통해 실현하려 할 것이다.


사랑은 케미(Chemi) 일뿐이다.


   "케미" 화학반응(Chemistry)의 줄임말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이다. 이성간 잘 맞는 사람을 두고 케미가 맞는다고 한다. 휴머니즘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인지 호르몬 분비를 통해 그 기분을 느끼고 싶은 것인지 헷갈린다.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분비를 통한 화학작용일 뿐이다.   


  처음 사랑을 느끼는 단계에서 도파민의 분비가 우리에게 기대와 설렘의 가져오고 사랑이 깊어지면 페닐에틸아민이 분비되어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상대에 대한 집중도를 올리지만 집착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 육체적 사랑을 통해 옥시토신엔도르핀이 분비되어 극도의 성적 쾌감(오르가슴)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쾌감을 주기적으로 느끼고 싶어 지게 된다. 그것이 남과 여 그리고 암컷과 수컷이 같이 있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는 다른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말과 행동, 가치관, 생활패턴 등 가지고 살아간다. 살아온 환경과 배워온 지식과 경험이 너무도 다양하다. 다른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만들어낸 나는 다른 개체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류의 나를 만들어 간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인간 세상에 수많은 문화, 민족, 종교, 사상이 존재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 세계가 일치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힘들다. 특히 세상이 더욱 다변화되고 가속화를 거듭할수록 서로의 지식 습득 방법(Ex : 저마다 보는 유튜브 채널의 다양성)과 행동양식 변화가 갈수록 다양해질 것이다. 과거 같은 동네에서 똑같은 교과서와 같은 신문, 라디오, TV 채널을 보며 살던 시대에는 대부분의 생각과 가치관이 거기서 거기였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인간은 더욱 다변화될 것이다.


육체와 정신의 분리


  인간은 과학의 발전을 통해 끊임없이 욕망을 충족해 나간다. 석유가 데이터로 대체되듯이 세상은 소프트웨어(데이터)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세상이다. 우리 인간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지 모른다. 인륜, 도덕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막을 순 없다. 과학은 우리의 감정(희로애락 - 喜怒哀樂)을 호르몬 분비(화학 - 약물) 혹은 외부 자극(과학 - VR, AI 로봇 등)을 통해 통제할 날이 올 것이다.

The future of love

  남녀는 서로의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서로는 필요했기 때문에 같이 했지만 필요가 없어지면 같이할 이유가 없어진다. 육체의 끌림은 과학의 힘으로 해결하면 된다. 이성이 없어도 이성이 있는 것 같은 가상세계가 존재한다면 같이 살아갈 이유가 사라진다. 만약 결혼과 출산 그리고 양육이 가져다줄 행복감(감정)을 따라오는 경제적 부담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 없이 단지 얼마 되지 않는 비용의 약물과 VR장비의 도움으로 주기적으로 얻을 수 있다면 아마 많은 이들은 아마존과 알리바바 앱의 구매창을 거침없이 클릭할 것이다. 그 약물과 장비는 치약이나 비누처럼 구매하는 일상용품이 될지도 모른다.


  과학은 남녀를 멀어지게 한다.


   사랑도 과학을 통해 화학반응으로 정의되는 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한 과학의 발전은 인간이 서로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누구도 예견하기 힘든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매일 미래에 대한 계획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만 10년 전 자신이 지금의 현재를 예상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 변화의 속도와 다양성은 빨라지고 광범위해질 것이다.  


  과연 우리는 다시 옛날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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