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보다 인맥이다

평범한 남자 시즌 2-13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다들 실습을 잘 끝냈나?"

"옙!"

"그럼 이제 시험을 쳐야지, 자 니들 앞에 몇 가지 램프 서브 앗세이(Sub Assembly : 반제품)들이 놓여 있다. 각자 하나씩 가지고 이번주까지 제품 원가계산을 해서 고객 제출 견적서를 작성하도록 월요일 날 2주간 교육한 OJT일지랑 같이 검사할 테니까 준비하도록! 그리고 다음 주 금요일에는 너희들이2주간 교육했던 내용을 PPT 보고서로 작성해서 발표할 예정이니까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그 날 전무님이 직접 발표회에 참관할 예정이니까 특별히 신경 쓰도록!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반짝이 장부장은 금요일 아침부터 '발리'(회의실명)에 모인 우리 우리 네 명에게 묵직한 과제를 던져주고 사라진다. 그가 회의실을 나가고 우리는 테이블에 놓인 램프 앗세이에 조립되는 플라스틱 서브 앗세이 4개를 멍하니 쳐다본다.


여중고사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피가 가장 작아 보이는 앗세이를 집어 든다. 이에 뒤질세라 봉래씨가 그 다음으로 작아 보이는 앗세이를 얼른 집어 든다. 다들 제품에 대한 원가 지식이 부족해 작은 제품이 쉽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형님! 먼저 고르세요!"


고헌씨는 나를 보며 손을 앞으로 내어 보인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큰 앗세이를 집어 들었다.


"역시 형님 통이 크시네요 하하하"

"교육받을 때가 편했는데…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이 없구먼요"

"하필 또 금요일 날 과제를 던져줄게 뭐람? 이번 주말은 쉬기는 글렀네요 쩝"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제품원가 계산 교육 때 잘 들어놓을걸…”


다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이다. 제품은 받아 들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지난주 이론 교육 중에 원가 표준에 대한 교육이 있었다. 국내 영업팀의 원가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김준표대리라는 점잖게 생긴 자의 무려 5시간에 걸친 교육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국내영업팀 김준표 대리입니다"


그의 첫인상은 무표정과 무뚝뚝 그리고 무관심 이 세 가지로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가진 수많은 표정과 감정 중에서 단 한 가지만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같아 보였다. 그는 국내영업팀과 해외영업팀을 비롯해서 새시영업팀, 타 OE영업팀, 영업지원팀, 내부원가팀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제품 원가 관련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박식하다. 그런 그에게 다들 '원가 로봇'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자사의 주 고객사인 '한국 자동차'에서는 비공식적으로 협력사에게 배포하는 그들만의 제품 원가 산정 표준이 존재한다.

그 원가 표준은 원가 총론(기본)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제조 공정과 관련된 제품 원가 산출 기준들이 존재한다. 수년간에 걸쳐 확장되고 업데이트되어 그 분량이 방대하다. 책으로 만들면 아마 백과사전 수준이 아닐까 싶다.


원가 표준은 해마다 업데이트를 진행하고 그 기준에 따라 모든 협력사의 제품 가격을 산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 그것이 제정되는 과정과 그 원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고객사 내부 원가 표준팀과 고객사의 고위 임원들 몇몇 뿐이다. 협력사는 그저 그 원가 표준을 준수해서 제품 가격을 산출해서 견적을 제출하고 고객사의 구매담당자는 표준에 맞게 제출되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필요에 따라 원가 표준에 적용하기 힘든 새로운 상황(새로운 제조공정이나 제품 생산)이나 특수한 경우(협력사의 경영상황이나 고객사와의 관계 등등)를 제외하고는 모든 제품은 표준에 준거하여 제품 가격이 책정된다. 그것에 따르지 않는 협력사는 고객사와의 갑을관계를 이어가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사실 그 원가 표준은 대외비(對外祕) 문서의 일종이며 고객사의 구매 담당 혹은 설계원가담당들이 협력사의 제품 가격의 적정성을 검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담당자들의 업무편의를 위해 비공식적으로 협력사에 배포되어 협력사 영업 담당자들이 사전에 그 표준에 맞춰 제품가를 제출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이 검토 분석해야 할 시간과 노력을 단축하기 위함이다. 영업 담당자는 고객사의 담당자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해야 함을 알기에 그들이 원하는 계산 양식과 방식에 따라 견적서를 작성해서 기한 내에 제출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생각했다.


"자~ 기본적으로 제품 가격은 재료비, 노무비, 기계경비 이 세 가지로 구분되고 거기에 각종 관리비, 이윤 등을 붙여서 최종 제품 가격을..."


지금 자사에서 그 표준을 가장 빠삭하게 알고 있는 자가 우리 앞에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름을 준표가 아니라 표준이라고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초중고를 거쳐서 대학 강의실에서 받은 교육 과정을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회사에 와서도 그런 교육방식에는 변함이 없다. 그도 그렇게 교육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수능 때 시험지 제일 앞쪽 집합 관련 2~3문제를 제외하고는 나의 동물적인 직감에 의존해서 답을 골랐을 정도로 고등학교 이후 수포자(수학포기자)로 살아온 나에게 그가 설명하는 원가 내용은 수학 시간에 수학선생님이 수업하는 내용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선생 치고는 나랑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고 내가 졸거나 딴짓을 해도 분필이나 몽둥이가 날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자장가로 들릴 뿐이었다. 몽둥이가 없는 그는 나의 졸음을 막을 길이 없다.


"아~ 씨발! 좆됐네"

"그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김준표 대리 교육시간에 잘 들어놓을걸 그랬어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필기도 제대로 못했는데…"

"음... 잠깐만요 내가 보니까 선배들이 쓰는 원가 계산서가 있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 나도 본거 같아"


여중고는 맨 땅에 헤딩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선배들이 쓰는 원가계산서를 얻어볼 요량으로 회의실을 박차고 나간다. 모든 일에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구하려 하지 않을 뿐이다. 회사 생활에서 모든 필요한 자료와 해답은 모두 회사 안에 있다. 수많은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자료와 지식과 경험 중에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어딘가에 꼭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사흘 밤낮을 고생해서 만들어야 할 자료도 누군가가 맞춤형으로 과거에 만들어 놓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에 컨택할 수만 있다면 회사 생활은 한결 수월해진다. 그렇기에 회사 내의 인적 네트워크(인맥) 형성이 때론 실력보다 중요하다. 뭐 그것도 일종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 양산라인 :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의 생산라인, 즉 신제품 생산 라인

* A/S라인 : 단산된 제품의 생산라인으로 제품의 생산량이 양산라인보단 현저히 떨어지고 수리보수용 부품으로 공급되기에 품질이나 납기가 양산 제품보다 까다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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