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시즌 2-14 (개정판)
"역시 중고형님! 대단해"
"중고형 정말 땡큐 합니다"
"고마워요. 중고씨 아녔으면 진짜 어쩔 뻔했어"
“뭘 이정도 가지고들 큭큭큭”
토요일 오전 회사 회의실 ‘발리’에 4명의 신참들이 앉아있다. 여중고씨가 구해온 원가계산서 엑셀(Excel) 시트 파일이 담긴 USB를 돌려가며 파일을 복사했다. 그 엑셀파일에는 이미 비슷한 종류의 앗세이 제품 원가계산서 시트(Sheet)가 여러 개 들어가 있다. 처음 보는 원가 계산 시트에 눈이 어지럽다. 시트 위에 수많은 셀들 속에는 알 수 없는 숫자들이 가득하고 그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수식이 들어있는 값들이다. 다들 계산서를 들여다 보며 어떻게 제품 단가가 산출되었는지 자체 분석 중이다.그 수식 속의 여러 가지 인수(因數:Factor)들은 여러 다른 시트와 연결되어 있다. 한 가지 인수를 잘못 건드리면 계산서의 여러 가지 값들에 오류가 생긴다. 단순한 계산 시트가 아닌 듯 보인다.
“여기 보시는 원가계산서는 완성차의 원가 표준 공식을 엑셀시트에 한 눈에 볼 수 있게 구현한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각 공정마다 다른 원가계산서 시트가 존재합니다. 각각의 단품 원가계산서, 예를 들면 사출제품 혹은 프레스제품, 다이캐스팅(주조)제품 등의 계산서들이 값들이 앗세이(조립품) 계산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각 공정별 원가 계산표준을 모두 이해하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전 이틀에 걸쳐 우선 가장 기본적인 제조 원가총론부터 사출 성형품 원가 표준까지 여러분들께 알려 드릴 예정입니다.”
원가 표준 교육시간에 김준표대리가 했던 설명이 떠오른다. 엑셀 계산서는 결국 완성차의 원가 표준의 수많은 공식들을 엑셀 시트 안에 도식화 시켜놓은 것이다. 원가계산의 편의와 시간의 단축을 위해 제품의 각종 인자(사이즈, 중량, 재질, 면적, 비중등)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계산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완성차에서는 해마다 한 두번씩 각 공정별 원가 표준을 개정해서 협력사에게 비공식적으로 배포하고 있었다. 물론 계산서 양식의 수식은 원가 표준이 업데이트되거나 바뀔 때마다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파일 하나에 여러 개의 시트들이 들어가 있고 거기에 각종 러데이터(Raw Data: 미가공 데이터)들이 첨부되어 있다. 그것들은 원가계산서에 입력된 수식에 의해 분류(Sorting)되어 인자 입력칸으로 찾아 들어 간다.익숙하지 않은 원가계산서의 수식들과 로직을 분석하는데만 적지않은 시간이 걸였다.
최종 램프 앗세이(조립품)계산서는 너무 많은 엑셀시트들과 계산식이 연동되어 파일 크기가 적게는 몇 MB(메가바이트)에서 크게는 몇 십 메가바이트까지 차지했다. 무거운 파일은 실행하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 정도였다.
“휴~ 수식이 정말 장난이 아닌데요”
"너무 복잡하네, 그래도 이것대로만 따라 하면 계산하는데 크게 어려울 건 없겠는데요"
"중고씨! 근데 이 자료는 누구한테 얻었어요?"
"고정안 선배님한테서요"
고정안 사원은 나와 같은 사원 말년 차이고 김준표 대리의 부사수이다. 그는 나랑 동갑이며 그도 경력사원으로 나보다 1년 먼저 입사했다. 그도 동종업계(자동차)가 아닌 타업종인 전자업계에서 넘어온 케이스였다. 그도 이전 직장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 적잖이 고생을 한 모양이다. 그는 항상 원가 계산서를 들여다보며 쥐어뜯은 머리털이 책상 위 곳곳에 너저분하게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항상 출근 때의 단정했던 머리는 밤 깊은 퇴근시간이 되면 산발이 된 몰골로 변신한다.
그는 갓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같은 머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1년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담배로 풀었는지 그의 혈색은 다 핀 담배의 필터처럼 누렇다 못해 거뭇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원가 로봇’ 사수인 김준표대리를 만나 원가계산은 곧잘 하는 인재로 성장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지만 스트레스 없는 성장도 있을 수 없다. 과도하지 않은 적당한 스트레스는 병이 없는 성장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비록 성장이 더딜지언정 오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중고씨는 입사 후 영업부 내에서 여러 상사들과 선배들 사이에서 위트 있는 말과 서글서글한 행동으로 적잖은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가 입사 전 따놓은 레크리에이션 강사 자격증이 꽤나 도움이 된 모양이다. 그 자격증 때문인지 그는 신입사원 연수기간 전체 동기들을 위한 진행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영업부에 배치되고 난 후에도 부서내 회식이나 공식행사에서 심심잖게 사회자 역할을 하며 상사들의 점수를 톡톡히 따내고 있었다.
“여동상! 담배 한대 빨러 가자!”
“옙! 여부가 있겠사옵미까! 정안형님!”
그는 바로 위 선배인 고정안사원과 쉬는 시간마다 그의 담뱃불을 붙여주며 과도한 의전(儀典)을 보이며 비공식 자리에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까지 발전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사수인 구대리와 눈도 마주치기 힘든 서먹한 관계가 한 달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었고 그 관계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그런 여중고씨의 인적 네트워크 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일요일도 회사에 나와서 반제품을 들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 계산서도 손에 넣었고 뭐 이제 크게 걱정할 것도 없는데 술 한잔 빨러 갑시다!"
"그래요~ OJT교육도 끝났는데 다 같이 한잔 해야죠"
"그럴까요?"
"전 술 안 마시는데..."
"아! 또~ 분위기 깨네 넌 꺼져! 고고 빼고 GOGO!"
중고씨의 술자리 단합 제안에 찬물을 끼얹는 자가 있다. 고고헌씨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다. 회사에는 꼭 이런 사람이 한두 명씩 있게 마련이다. 회사에서 빠질 수 없는 회식 문화에 빠지지 않는 부류이다. 이런 자들은 과거 예수가 받은 핍박을 회사에서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그런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많은 사담과 정보가 오고 가는 술자리에 끼지 못하는 이유로 무리 속에 융화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직속 상사나 인사권자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회사 생활이 순탄치 못할 것이다.남들보다 빠른 진급이나 특별 대우는 기대하기 힘들다.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만약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 상사라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난 여태껏 직장생활에서 잘 나가는 상사 중 그런 자를 본적이 없다. 세속의 성공을 쫓는 자들은 신앙의 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듯 했다. 지금 그가 속해 있는 환경은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워 보인다. 앞길이 순탄치 않아 보인다.
"음... 그럼 전 사이다 마실게요 하하하"
"그래요 같이 하는 게 중요한 거죠. 같이 가요!"
"역시! 희택 형님밖에 없네요"
"자! 그럼 마무리하고 어서 나갑시다"
토요일 늦은 오후, 아직1층 사무실에는 적지 않은 인원이 남아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각자 팀 내 상사들에게 퇴근 확인을 받고 회사를 빠져 나왔다.
"근데 어디 가죠?"
"희택 형님! 혹시 가고 싶은데 없으세요? 부산에서 오셔가 대구는 잘 모르잖아요"
"음… 글쎄요. 참! 대구는 동성로가 유명하다면서요?"
“동성로까지? 너무 먼데…”
"그럼 우리 희택 형님 대구 시내 나들이 한 번 시켜드리죠 뭐 하하하"
토요일 저녁 동성로는 젊음으로 활기가 넘쳐난다.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부산의 서면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같은 경상도지만 확연히 구분되는 사투리와 억양이 그들과 나를 구분 지어준다. 몸은 비록 대구의 인파 속에 섞여있지만 마음까지 섞이지는 않는다. 마치 하얀 쌀밥에 섞인 현미나 흑미처럼 서로 조화는 이루지만 그렇다고 현미가 백미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고유의 성질과 모습은 변하지 않은 채 구분되어 섞여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랄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집단에 섞여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살아가길 바란다. 그들과 다른 모습은 자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철저하게 자신 고유의 모습과 형질을 숨긴 채 다수와 빨리 융화되는 것이 그 속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마치 소금이나 설탕처럼 다른 것에 섞여 형체는 숨기고 성질만 드러내듯이... 다만 쌀밥에 섞인 현미나 흑미와는 다르게 다량의 물에 섞인 소금과 설탕은 형체도 성질도 알 수 없다. 존재감이 없다.
"대백(DEBEC)?! 저건 뭐예요?"
"예?! 대백도 몰라요?"
"태백은 알아도 대백은 모르겠는데..."
"푸하하"
"대구백화점이잖아요!"
동성로의 금싸라기 땅에 떡하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건물은 백화점이었다. 은행잎 모양을 한 엠블럼(Emblem)에 혹시 지역 은행 인가 하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을 했다.
대구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구의 대표 백화점이다. 부산 백화점도 IMF의 물결 속에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나 또한 대구백화점을 보고 나서야 어린 시절 부산의 동래 고속터미널에 있었던 그 모습은 잘 떠오르진 않지만 부산 백화점의 존재를 상기시킬 수 있었다. 금융위기 시절 지방의 백화점과 유통업체들은 줄도산을 면치 못했다. 대백은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위기 속에서 뭉치는 이곳 사람들의 특유의 기질이 있는 것일까?
대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조건으로 역사적으로 독자적인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온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과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수도를 서라벌(옛 경주)에서 달구벌(옛 대구)로 옮길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대구의 위상은 드높았다. 그 프라이드는 수십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이어오는 듯 하다.
반면 부산은 바다를 끼고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역사적으로 왜구의 침략과 전란을 피해 몰려 내려온 사람들과 뒤섞여 부산 특유의 짬뽕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일까 부산은 이것저것 섞어 넣고 우려내는 음식 맛은 끝내 준다. 전국 어딜 가도 부산에서 먹는 국밥의 맛을 흉내 내는 곳은 없었다. 뭐 가난과 시련이 만들어낸 서글픈 맛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도 맛을 찾아내는 조상들의 지혜가 대단하다. 경상도라고 다 같은 경상도가 아니다.
나는 지금 대구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주말의 동성로 한복판에 서서 아직은 알 수 없는 그 강력한 달구벌(達句伐: 대구의 과거 삼국시대 명칭)의 기운을 느끼고 있다. 명확하고 단일화된 문화 속에 정체불명의 뒤섞인 문화가 스며들려 하고 있다.
나도 이곳에 섞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