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인 동행

평범한 남자 시즌 2-16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아놔~ 어~이! 너 아메바냐? 아님 짚신벌레가? 도대체 몇 번을 가르쳐 줘야 되노?

"죄... 죄송합니다"

"이제 좀 알아서 할 때 안됐나? 어째 확인할 때마다 틀리노? 이제 다음 달이면 대리 아이가? 신입사원인 봉래보다는 나아야지 않겠나, 도대체 와 그 카노? 나 엿 먹이려고 그카는 거가? 제발 몸값 좀 하자! 월급 받는 거 부끄럽지도 않나?"


항상 아침은 구대리의 질책으로 시작된다. 그는 출근과 동시에 전날 내가 했던 업무를 체크한다. 나는 항상 그가 지시한 업무를 전날 밤 이메일로 그에게 보내놓고 퇴근하곤 했다. 오늘 아침도 모욕적인 비난이 날아든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죄인 모드로 그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뿐이다.


고객사(완성차)의 중국 시장의 시장 판매량과 점유율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2011)하고 있었다. 이 기세를 몰아 고객사는 국내에는 없는 현지 맞춤형 차량까지 출시하며 공격적인 시장 대응에 나섰다. 신차종이 늘어가고 관련 업무량도 계속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국 파트의 업무부하가 가중되고 있었다. 구대리는 과중되는 업무부하를 나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아직 자동차 램프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자리잡지 않은 상황에서 신차종의 고객사 견적 작성의 업무가 떨어졌다. 그에게 몇 번 견적 작성에 관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가 말한 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듣는다고 모두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신입사원 OJT 발표회 때 영업본부장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구대리는 몇 시간에 걸쳐 쉬지도 않고 알려준 견적 작성 요령을 내가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도대체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것이 가르치는 자를 위한 것인지 가르침을 받는 자를 위한 것인지 헷갈린다.


“다들 이해했지! 이번 기말고사 범위가 10과 까지 다들 알고 있지? 시간이 없다. 자! 그럼 다음 과로 진도 나가자.”


학창시절 학교에서도 그랬다. 그 땐 그걸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학생이 선생과 학교에 맞춰가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학교에서 뭘 배우고 이해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매일 밤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낮에 이해되지 않았던 수업 내용을 억지로 외우다가 집에 오곤 했다. 그 기억이 다행히 시험 때까지 남아 있어 시험문제를 몇 개 더 맞추면 다행이었다. 사실 시험문제를 더 맞춰서 기쁘기 보다는 성적이 떨어지지 않아 선생에게 매질을 당하지 않아 더 기뻤던 것 같다.


나는 거의 매일 회사에 남아 그가 지시한 견적 작성을 위한 야근이 이어지고 있었다. 야간 자율 학습에서 야간 자율 근무로 이름만 바뀌었지 학창시절과 별 다른 게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돈을 받고 한다는 것이다. 매질이 무서워 하던 야자는 돈이 궁해서 하는 야근으로 그 동기만 바뀌었을 뿐이다.


구대리는 내심 걱정이 되었는지 매일 나의 견적작성 진척상황을 수시로 체크했고 그가 확인할 때마다 어김없이 모욕적인 질책이 이어졌다.그의 목소리는 직급에 맞지 않게 1층 사무동에서 제일 컸고 그가 나에게 쏟아 붓는 말들을 사무실 전 직원이 듣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사내에 가쉽(gossip)거리가 되는 듯했고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민망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의 언행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씩 옆에 총무팀 여직원들이 지나가며 나에게 동정인지 멸시인지 모를 시선을 흘리고 지나갈 때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구대리는 그런 공개 사살(射殺)을 즐기는 듯했다. 뭐 일종의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식 같아 보였다.


하루에 한 번은 기본이다. 공개 사살이 없는 날은 행운이었지만 그런 날은 그가 출장이거나 외근일 때가 아니면 맞이하기 힘들었다. 그의 그런 질책이 나에게 별로 효과가 없어 보인다. 그는 나의 업무 개선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모욕적인 질책이 계속 될수록 나는 오히려 과도한 긴장과 불안감이 정신을 지배해 갔고 그 결과 업무에 집중 하기 보다는 의미 없는 집착만 생겨났다. 일의 큰 흐름과 전체를 보면서 디테일을 완성해 가야 하지만 나는 사소한 디테일에만 집착한 나머지 전체적인 일을 그르치고 있었다. 그럼 또 다시 질책과 비난이 날아들고 그럴수록 스스로가 더욱 위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의 질책의 횟수와 강도가 강해질수록 더욱 차갑게 변해가는 듯 보였다. 그는 도망갈 쥐구멍 하나 남겨놓지 않고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칼로 나를 조각하듯 깎아내리는 그의 언행은 나의 자존감도 한 없이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는 그게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행위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르지만 그건 나의 생살을 썰어내는 듯한 고통과 상처만 안겨주고 있었다. 반면 신입사원 봉래씨는 무관심한 노총대리와 다정한 중건 대리 사이에 앉아 필요에 따라 이쪽 저쪽 붙어가며 필요한 업무를 배워갔다.


봉래씨도 과중한 업무에 투덜대긴 했지만 입가에 자주 웃음과 미소가 보였고 이따금씩 상사들의 장난 섞인 갈굼이 날아들면 농담이나 위트로 받아 치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었다.


"희택형~ 너무 마음에 담아 주지 마세요, 구대리님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래 그렇죠, 뭐 악의가 있다면 벌써 한 대 맞았겠죠 하하하, 차라리 악의가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예?!"


차라리 구대리의 악의가 폭력으로 분출 되었더라면 나는 패배자가 아닌 피해자로 입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피해자는 관대하지만 패배자에겐 비정하다.


"아무것도 아녜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내가 살게요!"

"그럼 오늘 컨테이너 함 가시죠 캬캬!"

"OK! 고고"


봉래씨는 팀 내 유일한 후임이지만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은 마치 나의 선임 같아 보였다. 서로 다른 상황이 서로의 역할까지 바꿔놓는 듯 보였다. 그는 구대리의 공격이 좀 심하다 싶은 날은 나를 밖으로 조용히 불러내서 회사 내 정원을 같이 거닐거나, 야근 전 저녁시간에 맞춰 같이 회사 밖으로 밥을 먹고 오곤 했다. 그 또한 대구 토막이라 대구와 그 주변의 맛집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추천해준 맛집 중에 '컨테이너'가 있었다. 식당이름이 아니다. 그 이름은 둘만 아는 은어였다.


이유인 즉 **대학교 캠퍼스 안에 위치한 식당은 마치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해서 만든 듯한 식당 구조가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봉래씨와 내가 가끔씩 밀행을 다녀오는 둘 만의 아지트가 되어가고 있었다.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저녁식사 시간을 이용해 가끔씩 이용하곤 했다. 각종 퓨전 파스타와 피자, 치킨 등 여러 가지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로 메뉴가 구성되어 있다.


저녁시간 아직 귀가하지 않은 적지 않은 대학생들이 '컨테이너' 안에 삼삼오오 모여 수다와 음식을 나누고 있다. 그 속에 어울리지 않는 회사 점퍼를 입고 주문을 하는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사실 그 시선이 나쁘진 않다. 당시 회사는 대구경북(TK)에서는 나름 인지도가 높은 향토기업이었고 지방 사립대 학생들에게는 어쩌면 선망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감 가는 기업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당당히 회사 점퍼를 입고 대학교 음식점에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다.


"전대리님~ 잘 먹겠습니다!"

"대리는 무슨 아직 진급도 못했는데..."

"뭐 이제 며칠 뒤면 진급하실 건데요"

"진급해도 되는 건가 모르겠네요"

"당연히 해야죠, 연봉이 달라지는데..."

"맨날 욕만 먹는데... 대리까지 달고 욕먹으면 휴~"

"욕은 욕이고 돈은 돈이죠 하하하"

"..."

"구대리님이랑 좀 친해져 보시는 건 어떠세요?"

"무슨 말이예요?"

"자전거를 타보시면 어떨런지…"


구대리는 얼마 전부터 자전거 삼매경에 빠졌다. 살 빼기 운동에 돌입한다며 자출(자전거 출퇴근)을 시작했다. 300만 원에 가까운 거금을 들여 로드 사이클을 장만했다.주변 액세서리며 자전거 용품들까지 합치면 400만 원은 훌쩍 넘어 보인다. 그는 업무시간 틈틈이 해외 온라인 직구 사이트를 들여다보며 자전거 아이템 구매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가끔씩 국내영업팀의 변문안 대리가 그의 자리로 와서 자전거 관련 정보를 주고받으며 수다를 떠는 모습이 자전거가 둘의 사이를 돈독하게 해주는 매개체 같아 보였다.


그는 구대리와 같이 매일 아침 자출을 하는 라이딩 멤버이다. 몸과 얼굴이 모두 호리하다. 검고 굵은 뿔테 안경이 연약한 몸을 감추려는 듯 강인한 인상을 주려하지만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풍기는 부드럽고 여성스런 어조의 말투는 구대리와는 대조적이다.


"어~이! 같이 자전거 탈래?"

"아니 괜찮습니다."

"싫음 말구!"


사실 얼마 전 구대리가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자신의 취미생활에 동참할 의사를 물어왔지만 회사 밖에서까지 그와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기에 한치에 망설임 없이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구대리님!"

"왜?"

"저기 자전거 좀 싼 건 얼마쯤 하나요?"

"오~~ 사게?"

"저도 운동 좀 해볼까 해서요"

"그래 좋은 생각이야! 진작에 그랬어야지 얼마 있는데?"

"첨 타니까 그냥 싸고 무난한 걸로..."

"그래 있어봐 봐~ 어디 보자"


그는 갑자기 신이 난 듯 자전거 구매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한다. 1시간가량 웹 서핑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장님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뭐?!"

"오늘 와이프 몸이 안 좋아서요"

"그... 그래? 아직도? MDc는 견적은?"

"우리 전대리님께서 하고 있습죠"

"야! 니가 봐줘야지"

"전 갑니다 낼 뵙겠습니다. 전대리! 메일 보내봤으니 확인하고 낼 봐!"

"예~"

"아놔~ 저 자쉭!"


그는 화장실로 향하더니 어느새 자전거 라이더 복장으로 갈아입고 클릿 슈즈를 또각 거리며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난 그가 보낸 메일을 열어본다.


[초보 라이더 추천 자전거 3종]라는 메일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3가지 종류의 추천 자전거 관련 자료가 보인다. 그의 철저한 성격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3가지의 로드(Road) 자전거는 가격과 성능 별로 한눈에 구분될 수 있게 일목요연하게 정리 되어 있다. 일 잘하는 사람은 이런데서도 티가 나는 모양이다. 이제 그와의 의도적인 동행이 시작하려 한다. 의도한 바가 이뤄질진 알 수 없지만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다가가는 것이 빠르다.


아쉬운 자가 먼저 다가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