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시즌 2-17 (개정판)
“DG오토모티브 가족 여러분! 금일은 가정에 날입니다. 직원 여러분들께서는 일찍 업무를 마무리 하시고 퇴근하시어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수요일은 가정에 날이다. 집으로 가라는 방송에도 불구하고 영업본부 직원들은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다. 최고 수장인 영업본부장이 아직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그 밑으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옆에 타 관리 부서에서는 몇몇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퇴근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영업이나 품질 혹은 설계같이 고객 접점 부서는 가정에 날이 크게 의미가 없다.
[희택씨~ 협력사 역량강화 계획 수립 관련 자료 내일까지 인거 아시죠? 회장님 특별지시사항이라 계획 미제출 협력사에게는 어떤 패널티가 날아갈지 몰라요. 제가 보내드린 양식으로 작성해서 꼭 제출해주세요. 전 오늘 가정에 날이라 먼저 가봐야겠네요 요즘 회사에서 가정에 날 엄수하라는 인사팀 특별지시가 있어서 그럼 수고 좀 해줘요]
업무편의를 위해 개통된 고객사와 협력사간 직통 메신져를 통해 메시지가 들어온다. 직통 메신져는 협력사와 고객사간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명분으로 만들어졌지만 실상은 고객사의 업무편의와 지시명령하달 루트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건 마치 개목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고객사 담당자의 가정에 날을 위해 협력사 담당자의 가정의 날은 희생된다. 최근 고객사는 부품 협력사의 역량 강화를 위해 가격, 품질, 납기등의 전방위적인 개선을 위한 항목별 목표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서 제출하라는 권고 사항이 전달되었다. 말이 권고이지 그건 명령이나 다름 없었다. 고객사는 협력사에게 그들이 원하는 형태의 조사 양식을 배포하고 협력사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을 요구했다. 고객 접점에 있는 부서들은 다들 고객사의 요청자료를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고객 요청자료 중에는 대외비 자료들이 많아서 항상 부서별 최종 책임자의 승인이 없이는 유출될 수 없었다. 사전에 자료를 작성하고 책임자의 지시 아래 수정과 보완 혹은 삭제 등의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최종적으로 고객사에게 보내진다. 공공연하게 회사의 대외비 자료를 요청하는 고객사나 그 자료를 그대로 노출하지 않으려 수정삭제 및 편집등의 불필요한 페이퍼 워크를 해야하는 협력사나 양쪽 모두 불필요한 소모적인 작업에 적지 않은 맨아워(man-hour) 낭비하고 있었다. 고객 접점 부서는 부서 고유의 업무 못지 않게 고객사에서 요구하는 페이퍼 워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동차 산업이 제조업에서 보기 드물게 사무 관리직 인원 비중이 높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인 듯 보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하게 일어나는 영업맨이 한 명 있다.
"부장님~ 오늘 전대리랑 먼저 좀 퇴근해 보겠습니다"
"어? 그래 뭔 일 있나?"
"오늘 가정에 날 아닙니까?"
"닌 가정이 있으니 그렇다 치고 전대리는 와?"
"저희 중국 파트 단합 좀 하려고요"
"단합? 둘이서 무슨 단합을 하는데?"
"에이~ 부장님~ 뭐 그런 게 있습니다. "
"그… 그래 알았다 가봐라~"
구대리 아니 구과장은 5시 업무 종료 벨소리가 방송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최부장에게 가서 퇴근 허가를 받는다. 그런데 거기에 나도 포함시켰다. 그전에 나에겐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 며칠 전 진급인사가 이뤄졌고 구대리와 나는 이변 없이 과장과 대리로 진급했다. 그리고 팀 내 이노총 대리와 국내영업팀의 김준표대리 그리고 그의 부사수인 고정안 사원도 과장과 대리로 진급했다. 영업본부장인 이웅재 전무도 작년 사상 최고의 수주매출 달성의 성과를 인정받아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영업본부의 위상이 한 층 더 높아졌다. 그 때문인지 영업본부 내의 진급 대상자 중에 진급 누락자는 한 명도 없었다.
"어~이! 전대리! 출발!"
"예? 어디를?"
"오늘 자전거 한 바리 하러 가자고! 진급도 하고 했는데 팀웍도 함 다져야 할 거 아니가?"
"아니 구과장님! 맨날 전대리만 델꼬 어딜 그리 댕깁니까?"
“둘이 무슨 연애 함미꺼? 큭큭”
"그니까요? 가정을 돌보셔야지 무슨 실업 사이클 팀 만드시렵니까? 하하하"
“단합이 아니라 훈련 아입이까? 거~ 전대리 골병 들겠는데 하하하”
"아따~ 남이사~! 다들 신경들 끄시고 볼 일들 보십시요들"
해외영업팀원들은 다들 퇴근하려는 나와 구과장을 쳐다보며 한 마디씩 투척한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차장도 입을 뗀다.
“구과장! 적당히 좀 하고 일 좀 해라! 담주 중국 신차종 입찰 준비는 다 한거야?”
“아~ 차장님도! 걱정 붙들어 매십쇼! 제가 알아서 잘 하긋슴돠. 제가 뭐 언제 일 빵구 낸 적 있습니까? 그럼 저희는 이만!”
"어~이! 가자! 어서!"
“네…에"
주차장은 얇게 째진 눈으로 사무실을 나가는 나와 구과장을 못 마땅한 표정으로 흘겨본다. 나는 느닷없는 팀웍 단련 라이딩에 걱정부터 앞선다. 그런 나와 구과장을 바라보는 팀원들은 그 모습이 흥미진진해 보이는 모양이다. 그와 아침마다 자출(자전거 출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새벽부터 일어나 그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렸다 그가 나타나면 잽싸게 그의 뒤를 따라 질주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변문안 대리도 일주일에 2~3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2명 혹은 3명은 매일 경산의 시골 논두렁 옆의 아스팔트 길 위를 달리는 차들과 함께 아슬아슬한 질주를 이어갔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공장동 작업자들을 위해 마련된 락커룸 샤워장에서 땀과 매연으로 범벅이 된 몸과 얼굴을 씻고 사무실로 입장했다. 구과장은 아침마다 속도를 올리며 달리는 통에 그를 쫓느라 운동이 혹사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전에는 병든 닭처럼 피로에 졸음이 쏟아진다.
그런 나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두툼했던 볼살이 빠지고 몸에 붙은 불필요한 지방들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런 몸의 변화에 재미를 느꼈는지 라이딩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중독 성향을 드러냈다. 구과장은 평일에 아침 저녁도 모자라 주말에도 자전거 동호회를 찾아 자전거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결국 동호회에서 얻은 각종 정보로 해외 직구 사이트를 통해 완성차 기준 정가1500만 원짜리 해외 유명 브랜드의 로드 자전거 부품들을 해외 직구로 공수해 800만 원에 조립하는 최고 수준의 마니아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이! 왤케 느려! 빨리 좀 따라 붙어라! 닌 어째 갈수록 느려지노?”
그의 새 자전거는 깃털처럼 가벼웠고 그의 라이딩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자신이 빨라진 건 모르고 내가 느리다며 질책한다. 장비빨을 무시할 수 없다. 아침마다 그를 쫓는 것이 가혹한 고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퇴근 후 또 다시 단합을 빙자한 고문을 자행하려 한다. 이번엔 변대리도 꼬임에 넘어와 합류했다.
"헉~헉~ 구과장님아~ 천천히 좀 가라~"
"아놔~ 변 대리! 졸라 약해빠져가꼬"
"근데 과장님! 도대체 어딜 가시는 겁니까?"
"따라와 보면 알겠쥐 큭큭"
그는 대구방향이 아닌 시외곽 방향으로 하염없이 달려간다. 해는 떨어지고 가로등도 없이 어둠이 내리는 논두렁 사이 아스팔트 도로를 쉼 없이 내달린다. 시간이 갈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불빛이라곤 자전거의 전조등과 후미등 밖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은 논밭에서 숲 속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앞에 커다랗게 솟아 오른 산과 하늘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진다. 허벅지에 쫄깃해지기 시작하며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으로 오르막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오르막은 완만하게 시작해 갈수록 경사가 심해진다.
"헉~헉~헉~ 아~놔 죽겠네. 헉~헉~ 진짜 내가 왜. 헉~헉~ 괜히 따라와서 생고생인지.. 헉헉"
변 대리는 오르막 초입을 오르면서 빨라지는 날숨과 들숨 사이사이 푸념을 늘어놓는다. 허벅지와 종아리에 가중되는 통증이 최고조로 올라가고 있다. 클릭 페달에 고정된 슈즈 때문에 더 이상 속도가 떨어지면 넘어지게 된다. 기어비를 최대로 낮추고 토크를 최대로 올린다. 발은 계속 움직이는데 자전거는 엉금엉금 기어올라간다.
변대리는 엔진에 무리가 왔는지 결국 클릭 페달에서 슈즈를 떼어내고 끌바(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행위)를 하는 굴욕의 순간을 맞이한다. 구 과장의 자전거는 계속 멀어진다. 그의 후미등 불빛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뒤도 보지 않고 신들린 라이더처럼 치고 올라간다.
"전대리님! 전 도저히 안 되겠어요, 먼저 돌아갈게요 구 과장한테 말 좀 해줘요"
"헉~헉~헉 알겠~ 습니다"
변대리는 자전거의 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내려간다. 그가 쏜살같이 내리막을 내려가고 그의 후미등 불빛이 코너를 돌면서 사라진다. 앞뒤로 불빛이 모두 사라졌다. 마치 눈을 감은 듯한 암흑 속에 홀로 남겨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것들이 바로 옆에 있다고 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둡다. 봉사가 되면 이런 느낌일까? 전조등이 비추는 곳만이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바닥을 향한 전조등 불빛에 보이는 것이라곤 가끔씩 아스팔트 바닥을 기어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들 뿐이다. 전조등을 들어 전방을 확인하고 싶지만 알 수 없는 공포가 온몸을 휘감고 있어 엄두를 내질 못한다. 이럴 때는 꼭 과거에 봤던 공포영화 속의 모든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정체 모를 들짐승의 움직임이 수풀 속에서 느껴진다. 그 움직임은 내가 올라가는 속도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내가 만약 쓰러지면 금세라도 뛰쳐나와 나를 공격할 것만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
극도의 공포는 통증을 잊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인간은 위대하다. TV 다큐멘터리에서나 봄직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초인적인 힘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이제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몸은 살기 위해 어떻게든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전대리! 와이리 늦노? 오~ 그래도 2등이네 깡은 살아있네!, 변대리는?"
"헉~헉~헉~~ 돌..아 헉~ 갔습...헉~ 니다."
"아~놔! 그 자쉭! 정말 약꼴이라니까"
"털썩!"
"어~이! 이제 내려가자 조심해서 따라 온나"
나는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땅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한 순간에 긴장과 공포가 사라지고 온 몸의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처럼 아스팔트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그제야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빛을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 오로지 전조등 불빛만 내려다 보며 달려왔다.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사로 잡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땅에 깔린 암흑은 하늘에 별빛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고 수많은 방법이 존재하지만 볼 수 없다. 그건 현재의 울타리와 시야 속에 갇혀 그 밖의 다른 곳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울타리 밖은 위험과 공포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다. 울타리 밖은 기회와 환희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스스로 그 울타리를 뛰어넘지 않은 한 그 기회와 환희는 영영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이곳에도 별이 빛나고 있었구나'
유난히도 밝게 빛나는 별들 사이로 별똥별이 떨어진다.
소원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