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할 수 있다?!
평범한 남자 시즌 2-18 (개정판)
"왔나? 빨리 온나! 고기 다 익었다"
"민혁이는요?"
"어! 눈치 보고 빠져나온단다"
"근데 니 참 대단하다. 이 밤에 자전거 타고 댕기면 안 위험하나?"
"차라리 늦은 밤이 더 안전해요 차도 없고"
"참 그 쫄바지 섹쉬하네 케케"
그의 말에 라이딩 점퍼를 벗어 허리에 묶어 올챙이 배 아래로 솟아오른 소중이 언덕을 가린다. 금요일 저녁 모처럼 기숙사 멤버끼리 소주잔을 기울이기로 했다. 이미 9시가 넘은 늦은 시간 기숙사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허름한 고깃집에 앉았다. 이번 진급인사 때 세명의 멤버들이 다 누락 없이 대리 진급에 성공하여 나름 자축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원래 은택형은 금요일 저녁이면 새색시가 기다리는 신혼집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야지만 형수에게 일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내일 내려가기로 미리 바리케이드를 쳤다. 형은 새색시보다 술이 더 좋은 모양이다.
"요즘 많이 늦더라!"
"요즘 신차종 견적 때문에 머리가 아프네요 행님!"
"그래? 고생이 많네 한잔해라! 자!"
"나도 요즘 신제품 개발 때문에 골치가 아프네 것 때 매 다음 달에 미국 갈 거 같아"
"미국이요?"
"북미 도로 주행 테스트 때문에 한 일주일 있다 오지 싶네"
"와~ 부럽네요 난 미국 언제 함 가보나"
"넌 중국 가자나"
"우욱! 중국은 이제 토 나올거 같아요"
"오~ 왔어?"
민혁이 등장했다. 예상대로 살빠진 판다의 눈을 한채 고깃집의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자리에 앉더니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털더니 젓가락을 집어 다 익은 삼겹살을 한 점 집어 입에 넣고 말없이 씹는다. 은택형은 그런 그의 앞에 놓인 소주잔을 채워준다. 그는 소주를 입안에 털어넣더니 씹던 고기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긴다. 그 일련의 행동과정 속에서 한 마디의 말도 없다.
"야~ 말 좀 하고 먹어라~ 뭐 시체 같노?"
"민혁이 요즘 양산 차종 두 개나 맡았데요"
"와~ 팀에 사람이 없나? 와 니한테 다 주노"
"요즘 양산설계팀 죽어나잖아요, 일하는 선임들은 도망가고 사람은 뽑아주는데 맨 신입만 뽑아주니 일을 덜기는커녕 짐만 안 주면 다행이라니깐요, 나도 몇일전에 중국 신차종 BOM(Bill of Material : 자재명세서)을 신입한테 받았는데 뭣도 모르고 그걸로 견적 만들다가 사수한테 개욕 먹었잖아요. BOM을 완전 개판으로 만들어가, 램프에 벌브(Bulb)가 없어. 나 원 참... 뭐 난 개판 인지도 몰랐지만...하하"
"형! 오늘 부산 안 가요?"
"내 오늘 와이프한테 선방 쳤다! 찐하게 마셔보자!"
양산 설계팀은 위기를 맞이한 듯 보였다. 밀려드는 양산 차종은 늘어나는데, 일을 쳐낼 수 있는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과도한 업무에 비해 보상이 적으면 사람은 떠나기 마련이다. 양산설계의 과장급 이상의 고급인력들이 더 나은 조건의 대기업이나 동종업계로 빠져나갔고, 그 자리는 새파란 신입들로 채워 넣고 있었다. OJT부터 시작해야 하는 병아리들에게 당장 양산 차종의 일을 맡기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기존 과장, 대리들은 자신들의 업무를 쳐내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신입들까지 챙겨야 하는 이중고에 직면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런 신입들이 양산 설계를 시작하면서 터져 나오는 수많은 문제들로 각 다른 현업 부서들의 원성이 커져가고 있었다. 모든 제품은 설계로부터 시작한다. 설계에서 생긴 오류가 걸러지지 않고 하위 현업부서로 넘어가면서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설계에서 뿌려진 제품 설계도면은 전 부서로 배포되어 제품 개발과 양산에 필요한 모든 작업이 착수된다. 설계는 제조업에서 가장 기본이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만 다시 끼우면 되지만 설계를 잘못하면 전부서가 휘청거린다.
민혁은 최근 그런 신입들이 터뜨려 놓은 문제들로 다른 현업부서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사태 해결에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다. 멍한 시선으로 불판만 바라보며 이미 다 익은 삼겹살을 이리저리 뒤집는다. 난 그런 분위기를 쇄신하려 두 사람의 빈 잔을 모으고 폭탄주를 제조한다.
"자! 그래도 우리 다 진급도 했는데 한잔 하시죠"
"그래! 야 역시 희택이 맘에 들어! 부산 싸나이!"
"자! 아프니까 청춘아입미까 건배!"
"아프면 환자지..."
그는 정말 환자같아 보이긴 하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홀로 내가 말아준 폭탄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은택형과 나도 뒤이어 원샷으로 목구멍으로 부어 넣는다. 은택형은 그런 그의 모습을 오랫동안 보아와서인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어넘긴다. 나는 내심 나도 시간이 지나면 저렇게 변해버릴까? 하는 불안과 걱정이 밀려온다.
"와~~ 다들 이미 한잔들 하셨네요!"
"오 왔어! 이리온나 앉아라, 여기는 새로 입주한 우리 룸메 전희택~"
"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시작팀 주근재라고 해요, 우리랑 동갑이라던데.. 이제야 보네요 우리도 여기 분지 아파트 멤버예요"
"전 시험팀 장온수예요"
"어디 있다 오노?"
"우리 영대(영남대)에서 한잔 하고 오는 길입니다"
톰과 제리를 연상하는 두 남정네가 들어온다. 땅딸한 모습의 꼬마와 푸근한 모습의 덩치가 불판이 있는 원탁 사이사이에 비집고 자리를 잡는다. 테이블이 꽉 차 보인다.
"시작팀? 뭐하는 데예요?"
"하하하 아~ 아직 잘 모르시구나, 시제품 만드는 팀이에요"
그는 양산 제품을 만들기 전에 시제품을 만들어 디자인이나 성능 등을 사전에 테스트하고 문제를 미연(未然) 발견하여 해결함으로써 양산 제품 개발 시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공정이다. 또 다른 덩치가 근무하는 시험팀은 램프 회사의 특성상 제품의 배광(配光) 성능을 테스트하는 부서가 별도로 존재한다. 자동차 램프가 국가마다 서로 다른 배광 법규가 존재하고 그 법규에 만족하는 제품만이 유통 가능하기 때문에 양산 제품의 판매 승인 전 배광 테스트 결과가 필히 첨부되어야 한다. 일종의 KS마크 인증 같은 거라고 하면 될 듯하다.
그는 원래 양산설계팀이었는데, 몇 년간의 보직변경 신청 끝에 양산설계를 탈출해 시험실로 발령이 났다. 그는 시험실에서 나름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듯 보인다. 과거 양산설계팀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과도했던 것 때문인지 지금은 혈색이 돌아왔다며 주변에서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시험실 들어가더만 햇빛을 못 봐서 글나 피부가 하얘짓네"
"형님이 보기에도 그래요?"
"그래 니 넘 하얗다. 가끔 좀 볕도 쬐고 해라, 배광실에 처박혀 잠만 자지 말고"
"안 잔다. 그냥 가끔씩 명상하는 거지"
"지랄~ 명상하면서 코도 고냐?"
"하하하"
"야~ 민혁이 요즘 죽어나제? 내 그 맘 알지, 나도 탈출 못했음 아마 퇴사했겠지"
그는 민혁과 같은 부서에 근무를 해서 그 상황을 더 잘 이해하는 듯 보인다. 그는 입사 후 3년 동안 보직 변경 신청서를 해마다 인사팀에 보냈다고 한다. 팀장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는 이미 눈밖에 난 상황이었고 그도 양산설계팀에 미련이 없었다. 여기서 스트레스받아 죽느니 차라리 회사를 나가는 게 낫겠다는 일념으로 3년째에 보직 변경 신청을 마지막으로 안되면 퇴사를 결심한 상황에서 보직 변경 승인이 떨어졌다. 그는 유유히 설계팀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동기들의 진급을 바라만 봐야 했다.
"자 분지 아파트 멤버들 다 모였는데 자! 전국주 한잔 하자고!"
다들 일주일간 묵은 스트레스를 술로 풀고 있다. 고깃집에는 우리 다섯 명 멤버와 주방에서 하품을 하며 졸고 있는 주인 아주머니 여섯 명이 전부이다. 주말이 다가오면 기숙사 직원이 대부분인 사람들은 자신의 본연의 삶터로 돌아가기 때문에 금요일 밤이 되면 조용하다.
"2차 가야지~!"
"가야죠 고고!"
"근데 이 시간에 어딜 가요?"
"분지 노래방으로~"
은택형은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면 노래방으로 향했다. 노래보다는 또 다른 유흥을 즐기는 것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노래방 도우미 누님들의 살 냄새가 좋은지 그녀들의 가슴골에 얼굴을 파묻고 노는 걸 좋아했다. 점잖고 준수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굶주린 수컷 승냥이 마냥 킁킁거리며 암캐들을 살 냄새를 맡는다. 그녀들도 그의 그런 행동이 싫진 않은 모양이다. 미남이 진상을 부리면 모성애가 발동하나 보다.
"띠리 리리 띠리 리리"
"앗~~ 다들 쉿! 조용!"
"어~ 우리 아기~ 아직 안 잤나? 응 아직 일하지 요즘 일이 부쩍 많아져가... 나도 보고 싶지~ 그래 걱정 말고 어서 자! 내일 일찍 내려가께! 응~ 그래 나도 사랑해 잘 자~~"
"우욱!"
"행님 연기 짱이네요 어째 얼굴색까지 변하면서 전화를 받아요 아카데미 남우주연 깜인데요!"
"야~ 인생은 연기야~ 니들도 결혼해봐라~ 내 맘 안다!"
은택형은 준수한 외모 때문인지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결혼 전에 소개팅이나 맞선으로 여러 여자를 만났다고 한다. 만나는 여자마다 그의 호감형 외모와 여자 앞에서 자동 전환되는 로맨틱 버전의 말투가 여자들로 하여금 그를 붙잡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낚싯줄을 던지는 족족 걸려들었고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들은 그가 만들어 놓은 어항 속으로 들어가길 원했지만 그는 쉽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고 생선의 가치를 철저히 검토했다. 까다로운 품질 검사를 통과한 물고기는 잘 나가는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여성이었다. 처가는 부산에서 알만한 사람은 아는 유통업계의 오너였다. 그는 그녀를 어항에 넣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영웅담처럼 얘기하곤 했다.
"야~ 돈 없으면 비굴해지는 거야, 내가 못 벌면 잘 버는 사람을 꼬셔야지 뭐 안 그렇냐?"
"뭐 맞는 말씀입니다 형님, 그것도 능력이죠"
"내가 왜 여기 대구까지 와서 일하고 있겠냐? 뭐가 아쉬워서"
"형님은 조상들께서 덕을 많이 쌓았나봐요 하하하"
당시 "삼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부부가 매일 붙어있으면 있던 정(情)도 사라진다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결혼한 기혼자들에게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도 아마 처가와 능력 있는 아내를 매일 받들어 모시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보다. 돈은 좋지만 자유는 누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 아니겠는가? 그는 그런 경제적 여유와 신체적 자유를 둘 다 누리는 듯 보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칙칙하게 변해가는 우리 네 명의 얼굴과는 달리 피부에서 항상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결혼은 구속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