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시즌 2-20 (개정판)
"전대리님 10시가 넘었어요. 퇴근 안 하세요?"
"어? 어. 먼저가 난 아직... 내일까지 고객사에 제출할 자료 작성이 남아서..."
"요즘 구과장님은 일찍 일찍 퇴근하시더만요. 대리님만 맨날 남아서 고생이 많네요"
"뭐 내가 머리가 나빠서 몸으로 때우는 거지 뭐"
"저 먼저 들어갈게요, 빨리 하고 가세요"
"어 그래 낼 봐~"
봉래씨를 마지막으로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대리로 진급하고 나서부터는 거의 매일 야근이다. 나의 눈도 조금씩 룸메이트 민혁의 판다눈을 닮아가고 있다.사내 메신저에 들어가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메신저 상태 창에는 방해금지를 표시해 놓고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야~ 집에 안 가냐?]
[어~ 아직]
[가자! 오늘만 살고 죽을 거냐?]
답이 없다. 나는 그가 아마 3D 도면을 띄워놓고 정신 없이 뭘 수정하거나 아니면 고객 제출용 설계오류 대책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으아아아함~”
나는 크게 하품을 하며 허리를 펴고 깍지낀 손을 천장을 향해 쭉 뻗는다. 턱을 들어 올려 옆에 있는 국내영업팀 쪽을 훑어본다. 나랑 동갑내기인 고정안 대리가 홀로 앉아 또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나는 정수기로 가서 믹스커피에 뜨거운 물을 붓고 그에게로 다가간다.
“고대리님! 커피 한잔 하세요”
“어?! 고마워요”
"집에 안 가세요?"
"어~ 아직... 낼 서울 고객사 출장인데, 고객 자료가 아직이라서..."
그는 나와 같이 진급을 했지만 나보다 한 해 일찍 들어온 선배라서 인지 쉽게 말을 놓지 못한다. 그는 그런 나에게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어중간한 말로 대답한다. 그는 월말마다 고객사의 본사를 방문한다. 그때마다 전 양산 차종의 가격결정을 새로 한다. 이유 인즉은 제품가에 소요되는 원소재의 가격 변동에 따라 매달 고객사에서 변동된 단가에 따른 재료비를 조정하여 납품단가를 조정하는 것이다. 자동차 업계의 룰을 모르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그 수많은 원소재의 가격 변동추이를 분석해서 가격을 조정하는데 들이는 시간적, 인적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명분은 소재 가격 변동(폭등시)으로 인한 협력사의 손실을 방지하겠다는 취지이지만, 사실 그로 인한 고객사의 이익이 협력사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더 큰 목적일 것이다. 물론 글로벌 가격 추이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겠지만 원소재 적용 가격을 결정하는 것도 고객사이니 협력사에게 유리할리 만무하다.
그 때문인지 플라스틱 원소재를 생산하는 석유화학기업들은 협력사와 완성차 대기업에 제시하는 소재 단가가상이했다. 그들은 실제 소요량(구매량) 많고 대금결제를 해주는 협력사가 어떻게 보면 실질적인 고객이다.
그렇다고 최상위 포식자인 대기업 완성차의 눈치도 살피지 않을 수 없다.그래서 원소재 실 거래단가는 완성차와 협력사간 상이하고 그 단가는 철저히 대외비(기밀)로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협력사들도 그 사용량의 규모에 따라 단가가 다르다.원소재 기업 입장에서는 박리다매(薄利多賣)로 대량 구매 고객을 통한 안정적인 매출물량을 확보하는 게 더 중요하다.
"매달 이 짓거리를 해야 해요?"
"내 말이... 참 거지같죠! 이 많은 양산차종 가격을 매달 수정해야 하니 머리가 터질 거 같아요"
그가 보고 있는 엑셀 시트는 보고 있기만 해도 눈이 어지럽다.그 많은 제품 가격을 일일이 수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엑셀에 수많은 수식들을 입력하고 해당 소재 가격을 수정하면 계산이 바뀔 수 있도록 연동시켜야 한다. 물론 이렇게 세팅해 놓으면 일은 빨라지지만 나중에 데이터가 방대해지면 방대해질수록 오류가 생길 위험이 크다. 오류가 터지면 사흘 밤낮을 새어야 할지도 모른다.그래서 기존 자료들을 주기적으로 백업을 시켜놓아야 한다.
"와~ 이런 건 ERP로 전산화시켜야 하는 거 아녜요, 이걸 다 사람이 엑셀로 하다니"
"내 말이... 눈 빠지겠네, 이놈의 엑셀(Excel)을 누가 쳐 만들어가 사람 골병들게 만드는지..."
마이크로 소프트(Microsoft) 창업자 빌 게이츠가 들으면 참 섭섭해할 일이다. 만인의 편의를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 결국 만인에게 스트레스 원천이 되어가고 있다. 그는 투덜거리는 입과는 달리 키보드 위에 손가락과 마우스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 동안 수없이 푸념과 불평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래 봐야 퇴근시간만 더 늦어질 뿐이다.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치고 클릭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보인다.
"다음 달에 결혼하신담서요? 축하해요"
"아~ 참! 희택 대리한테 청첩장 안 드렸네요 잠깐만요"
그는 의자 뒤에 매달린 백팩 가방 속을 뒤적거리더니 하얀 청첩장 카드를 건넨다. 그제야 나와 눈이 마주친다.
청첩장을 줄 때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면 결혼식에 안 올지도 모른다는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이 앞선 모양이다.
"부럽네요 결혼도 하시고"
"전대리도 빨리 해야죠~이왕 대구 왔는데 대구 여자 한 번 만나봐요 하하"
"대구 여자요? 뭐 다른가요?"
"음... 글쎄요 나도 대구 여자밖에 안 만나봐서 하하"
그는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모니터를 응시한다.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의 속도가 빨라진다. 더 이상 방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청첩장을 들고 나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는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교재 하던 이성이 있었다고 한다. 전 직장이 타지에 있어서 주말 커플로 인연을 이어왔다.
연애전선에 적지 않은 고초가 있었다. 이직에 성공해 컴백한 고향, 하지만 허구언 날 반복되는 야근으로 연애전선에 호전(好轉)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그도 여기 상황을 파악했을 때 연애를 지속할 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여자에게 시간과 노력을 덜 들이고 붙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결혼이다. 사랑공동체에서 경제공동체로의 전환은 이제 감성에 휘둘리던 시간을 이성과 현실을 위해 더 많이 써도 서로 용인(容認) 해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도 결혼할 수 있을까?'
사랑공동체를 만들 여유가 없다. 그것을 건너뛰고 경제공동체로 나아갈 순 없을까?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처럼 주변에는 감성이 배제된 이성(理性)만을 쫓는 만남이 늘어가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