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시즌 2-23 (개정판)
"야~ 희택이 대구 가드만 얼굴 보기 힘드네"
"이제 다들 먹고 살기 바빠가 친구들 얼굴 보기도 쉽지 않네 그려"
"글네"
"근데 재득이는 왜 아직이야?
"금마~ 오늘도 일한다 아이가? 이제 마치고 오고 있단다"
"와 징하네 추석날도 일하나?"
또 어김없이 명절은 찾아온다. 추석 전날 꼬치친구들과 시내의 한우 고깃집에 모였다. 이제 다들 삼겹살은 지겨운지 좋은 것 좀 먹어보자는 의견이 과반수를 넘어 나름 유명한 맛 집을 찾았다. 투뿔 한우만 취급하는 곳이다. 맛이 보장된 만큼 지불해야 할 비용도 만만치 않다.다들 이제 직장생활 좀 했다고 호주머니가 두둑해진 모양이다. 결혼 안 한 미혼의 직장 남성의 호주머니는 여유가 있어 보인다. 한 녀석만 빼고...
"희택아~ 나도 추석 끝나고 대구 올라가지 싶다."
"엥?! 넌 왜 대구 가는데?"
"그게 뭐 좀 복잡하게 됐다"
"뭔데"
춘곤은 오랜 임용고시에 지쳤는지 아니면 집에서의 압박이 있었는지, 계약직 수학교사로 대구에서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교회의 권사로 오랜 세월을 보내셨고 교회에 아는 사학재단 쪽의 지인을 통해 녀석의 직장을 알선한 것으로 보인다. 대구의 한 사립 대안학교에 녀석의 자리를 확답 받은 모양이다. 물론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진 자리는 아닐 것이란 건 나도 다른 친구들도 의심치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녀석이 해마다 마시는 고배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도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일단 일을 하면서 틈틈이 임용 준비를 하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없이 자란 녀석은 집에서 장남으로 아버지의 역할까지 소화내야 했지만 그에게 아버지라는 단어는 다른 꼬치친구들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원양어선의 선원으로 먼 바다를 누비고 다니신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씩 선물 보따리를 가득 안고 나타나는 산타크로스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아버지가 뭍으로 돌아왔을 땐 두발이 아닌 네 바퀴가 달린 간이병상 위에 누운채였다. 그것도 잠시 그는 상복을 입고 얼떨떨한 모습으로 어느 한 썰렁한 장례식장의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역할을 보고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려서부터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항상 엄격한 태도로 일관했다. 친구들은 그의 어머니를 무서워했고 그녀가 있을 때는 녀석의 집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항상 녀석을 집 밖으로 불러낼 때면 빌라 앞 3층 위 그의 방 창문으로 작은 돌멩이를 던져서 녀석을 불러내었다.
“춘곤이는 공부해야니까 불러내지 말고 너희들끼리 놀아라 알겠지? 자꾸 불러내면 아줌마한테 혼
난다”
춘곤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까지 소화하려고 한 것 같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드러냈다.
그의 억압되었던 스트레스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일탈로 분출되었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
“야~ 희택아~ 난 사람 죽이는 거 빼곤 다 해보고 싶어!”
“그건 또 뭔 소리고?”
“야~ 한 번 남자로 태어났으면 세상에 못 해 볼 거 없이 다 해보고 죽어야지 않겠나?”
고등학생 시절 녀석의 애마인 빨간색 125cc 엑시브 오타바이 뒤에 타고 어두움 밤 도로를 내달릴 때 그가 했던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땐 그런 녀석이 영화 ‘비트’ 속의 정우성같이 멋있어 보였다. 그런 녀석이 지금은 사회에 때가 잔뜩 묻은 친구들 사이에서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런 녀석도 이제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딛으려 한다.
"오~ 드뎌 니도 사회 물을 좀 먹는거가?"
"그래 잘됐다. 춘곤아 축하한다."
"그래 니도 이제 돈 좀 벌어야지"
"난 잘된 일인지 잘 모르겠네..."
"그럼 나랑 자주 볼 수 있겠네"
다들 그의 취업을 축하하는 건지, 비아냥대는 건지 헷갈린다. 어쨌든 나에겐 외롭고 괴로운 타지 생활에 벗이 생겼다. 타지의 사회생활은 군대나 유학시절의 그것과는 달랐다.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존재했다. 그 공허함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삶의 변화나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녀석이 그런 변수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난 아마 내년 봄 쯤에는 결혼하지 싶다"
"헐! 진짜? 누구누구?"
"와~ 또 소리 소문 없이 만나고 댕기드만 이젠 제대로 물었나 보네"
“여기 귀덕이가 첫 테잎을 끊는구만!”
귀덕의 느닷없는 결혼 발표에 다들 놀란 기색이다. 사실 귀덕이가 가장 먼저 결혼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진 않았다. 정석(定石)의 코스만 밟고 온 그는 이제 공통 수학에서 수학 I을 거쳐 수학II로 넘어가야 할 단계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는 끝났다. 문제는 이제 독학은 좀 힘들다는 것이다. 난이도가 어려워진 만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도움을 줄 동반자를 만나야 다음 단계를 무난하게 갈 수 있다. 그는 나머지 꼬치친구들과는 다르게 마음에 드는 동반자만 찾으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는 하이패스를 이미 장착하고 있었다. 귀덕은 그런 동반자를 만났나 보다.
"회사 동료야"
"오~ 씨씨!(Company Couple)!"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더니 결국 찾은 데가 회사 안이었어?"
"그래 원래 짝은 가까이에 있다고 하자나"
“몇 살인데?”
“스물일곱”
“와~ 그 궁합도 안 본다는 4살 차이?”
“딱이네”
그가 결혼을 결심한 여자는 같은 은행의 다른 지점에서 근무하는 출납 계원이었다. 사내 밴드 동호회에서 만난 그녀는 인물도 조건도 빠지지 않는 평범하지도 그렇다고 또 아주 특별하지도 않은 여자였다.
같은 기독교 집안에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연하 그리고 집안에서 사랑 받고 자란 건강한 멘털을 장착한 막내딸처럼 보였다. 사회 초년생 때 불나방처럼 놀던 녀석도 결혼은 정석대로 한다. 회사에서 연차가 올라가고 진급도 하면서 업무가 많아지고 여유가 없어진 그는 결국 사내에서 남몰래 비밀연애를 해온 모양이다.
같은 환경이라 서로를 이해하기가 쉬었을 것이다. 그만큼 자유가 제한된다는 단점도 있지만 어차피 결혼은 구속 아니던가? 귀덕은 결혼할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그는 둘이 합쳐 연봉 1억 초과 달성 커플라는 영예의 전당에 발을 디디며 화려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듯 보였다. 당시 사회 초년생들의 결혼시장은 잘나가는 대기업의 남자와 안정적인 여자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조합이 아니면 둘 다 대기업 혹은 금융업계의 돈 잘 버는 남녀의 조합이 대세처럼 보였다.
"야~ 오늘 술은 니가 사야겠구만!"
"왜?~ 내가 미쳤나? 왜~ 술을 사야는데?"
"니가 오늘 축하할 일을 꺼냈으니 축하를 받으려면 쏴야지 캬캬캬"
"그래 한 턱 쏴! 오늘 귀덕이 덕에 먹고 죽어 보자! 큭큭”
그 동안 허겁지겁 먹어 치운 한우 등심과 갈빗살이 담겨있던 빈 팩 껍데기가 수북이 쌓여있는 것을 본 귀덕은 기겁을 하며 얼굴색이 바꾼다.
"어~ 돼지야~ 왔나?"
"다 묵은 거 아이제?"
"니꺼 많이 남겨 놨다 걱정마라"
"오늘 귀덕이가 쏜단다!"
"오 진짜?"
"미칫나? 개소리하지 마라!"
재득은 미닫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불판 위의 고기에 집중한다. 귀덕은 결사항전 태세에 돌입했다.
녀석의 지갑은 열리기 힘들 듯 보인다. 사실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냥 녀석의 당황한 모습을 즐길 뿐이다.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 투 뿔 한우는 1/N로 나눠지는 비용을 감안했을 때 되도록 많이 먹어두는 것이 이득이다. 이럴 때는 위가 큰 놈이 장땡이다. 재득은 가장 먹성이 좋은 녀석이기에 모임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섭취량을 자랑한다. 하지만 녀석은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으면 가끔씩 2차를 쏘기도 하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은 그의 먹성에 크게 터치를 하지 않는다. 오늘은 메뉴가 메뉴이니 만큼 약간은 신경이 쓰인다.
"야~ 무슨 일을 추선 전날까지 하냐?
"우물우물 쩝쩝... 씨X~ 낼도 일 나가야 할 판이다!"
"헐~"
"니가 돈독이 단단히 올랐구나"
"나라고 뭐 이런 날 일하고 싶겠냐? 이때 아니면 돈을 못 버니까 그렇지"
그는 얼마 전 다니던 공장을 나와 개업했다. 은행의 대출을 끼고 중고 CNC 기계 사들여 아는 지인의 공장에 지입(持入 : 개인이 차량, 기계 따위의 소유물을 가지고 업체에 소속함)되어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의 사장이 되었다. 회사 이름도 녀석의 이니셜을 따서 ‘JD Tech’이다. 우리들 중 유일한 사장이다.녀석은 월급쟁이 체질이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가장 빨리 시작했기에 월급쟁이가 답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달았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남이 채워주는 밥그릇을 걷어 차고 셀프 밥상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1인 기업의 사장은 일을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일은 더 많이 한다. 월급쟁이와는 달리 하는 만큼 자신이 가져가는 몫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재득은 주말, 휴일도 없이 일을 한다. 물론 일감이 많아서 이기도 하지만 사정은 달랐다.
"X발! 맨날 긴급 물량만 던져 준다 아이가"
"그럼 안 하면 되지"
"그게 말이 쉽지, 사실 긴급이 단가가 세거든, 그리고 명절 때 떨어지는 물량은 단가가 꽤 짭짤해서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네 명절 떡값이라도 벌려면 해야지 뭐, 니들이야 회사에서 주지만 난 내가 떡값을 벌어야지뭐 쩝, X발! 평소에는 개 좆같은 단가로 일 좆나 해봐야 기계 대출금 갚기도 빠듯하다."
녀석은 아마도 대기업의 5차, 6차 하청업체쯤 될 것이다. 사실 그가 만든 금속가공 부품들이 어디에 들어가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디 고객사로 흘러들어 가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아는 것이라곤 어떤 제품은 조선용 어떤 것은 풍력 발전용이라는 것 정도 뿐이다. 대기업은 재득의 회사 이름조차도 알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부품결함으로 인한 대형 풍력플랜트에서 큰 사고가 발생했고 관련 대기업에서 대대적인 감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자신의 공장까지 공정 감사를 나왔다. 검은 수트를 입은 말끔히 차려 입은 대기업 직원들이 공장에 들어와서는 이리저리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지적 사항을 얘기하고 갔다. 재득은 머리를 조아리며 굽신거리는 자신의 납품처 사장 옆에 영문도 모른체 서서 그냥 그를 따라 굽신 거렸다고 했다. 대기업이 쉴 때는 하청 협력업체들은 바빠진다. 그들이 쉬는 동안 물량과 재고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대가로 가격을 더 쳐준다.
그는 그것이 '명절 떡값'이라고 얘기했다. 협력사들은 그것들 받아먹기 위해 대기업 직원들이 가족 친지들과 여가를 즐길 때 출근한다. 하청에 하청으로 내려갈수록 쉬는 날은 줄어든다. 친구는 그렇게 밀려내려온 초긴급 물량을 쳐내느라 명절만 되면 손에 기름 떼가 마를 날이 없다. 명절 기간 동안 평소 한두 달 동안 벌 돈을 한꺼번에 손에 넣는다. 가족과 친지들의 얼굴을 까먹는 대가다. 당시 대기업 직원들은 두둑한 명절 상여금과 앞뒤로 며칠씩 더 붙여 긴 연휴를 보내고 와도 회사는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호수 위 백조의 우아한 모습은 그 수면 아래에 발버둥 치고 있는 무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기분이닷! 2차는 내가 쏠게!"
"오~ 공돌이! 명절에 쇠 깎아가 돈 좀 마이 벌었나 보네"
"오예! 고고씽!"
“오 역쉬! 재득이밖에 음따!”
“묵고 죽자!”
화려한 싱글들의 명절 밤은 흥청망청 마시고 즐기는 날이다. 추석 전야 시내의 주점과 유흥가는 그런 싱글 남녀들로 북적인다.
명절날 뿌려진 상여금과 떡값은 그렇게 돌고 돌며 경제를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