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시즌 2-22 (개정판)
♩우리는 무명하나 유명한 자요 죽음의 위기 속에도 참 생명 가졌고 근심하나 기뻐하며 가난하나 다른 이를 부요케 하는 자로다♪ ♬
일요일 오전 기숙사 근처의 한 교회 예배당에 조용히 숨어들었다. 때마침 예배가 시작되고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다. 나는 예배당 뒤쪽 후미진 구석에 자리를 잡고 다른 이들과 같이 서서 찬송가를 따라 부른다. 예배당 앞에 걸린 화면에 나타나는 찬송가의 가사들이 가슴속을 파고든다. 어릴 적부터 주말이면 친구들을 따라서 습관처럼 나간 교회였지만 그 어떤 신앙심이나 그들이 말하는 하늘로부터 받는 기적 같은 은혜 같은 일은 생겨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예배당 앞 벽에 내려온 커다란 빔 프로젝터 스크린에 적힌 가사를 보며 찬송가를 따라 부르다보면 나도 모르게 정수리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 뜨거운 기운은 찬양을 하는 동안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가끔씩 그 뜨거운 기운이 온 몸을 채우고 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곤 했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기분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찬양을 부르고 나면 내 몸 속에 뭔가 알 수 없는 신비롭고 긍정적인 기운이 충만해짐을 경험하곤 했다.
그 기운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 주일에는 항상 즐거운 기분으로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두 다 기억나진 않지만 일요일은 항상 좋은 일이 하나씩은 생겨났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일요일 저녁 외식에 인색한 부모님이 저녁에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를 잔뜩 사가지고 들어오신다던지, 아니면 내가 짝사랑하던 같은 반 여학생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던지 하는 그런 사소한 일들 말이다.이상하게도 내가 예배시간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들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는데 예상치 않은 다른 좋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저런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이제 어린 시절 친구들이 없어도 주말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엇이 다시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까?그 신비롭고 긍정적인 기운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지금 나에겐 무언가에 기댈만한 것이 필요하다. 나 홀로 타지에서 친구도 가족도 없다. 성인이 되고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해관계이다. 그건 남녀관계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여자나 남자 모두 자신에게 기대는 상대는 원치 않는다. 그럼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 X발! 머리가 깨질 것 같네.”
방바닥에는 빈 술병들이 뒹굴고 있다. 전날 밤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뒤 괴로움에 잠을 이룰 수 없어 정신을 잃어 쓰러질 때까지 홀로 방에서 술을 마셨다. 그 술기운이 남아 아직도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린다.
술로 마음의 고통을 잠시 잊어보려 했지만 잠시 잊은 대가는 두통과 속쓰림이라는 육체의 고통을 가져다 준다.결국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술이 조금씩 깨자 다시 가슴속에 조금씩 차오르는 먹먹함과 터져 나오지 않는 슬픔을 해소해낼 수 없었다. 그냥 누군가를 향해 고함치고 싶었다.
민혁의 죽음에도 나의 일상은 변함없다. 전날 회사에 남아 저녁까지 밀린 업무를 마무리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기숙사 안방의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 편의점에서 사 온 술과 안주를 내려놓는다. 무의식적으로 TV 리모컨을 들어 전원을 켠다. TV 속에서 무슨 방송이 나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그곳에 붙잡아둔 채 사 온 술을 마신다. 조금씩 데워지는 방바닥에 열기와 몸 속에서 올라오는 취기가 정신을 조금씩 혼미하게 만든다.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
맨 정신에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괴로운 상념들이 사라진다. 상념이 사라지는 대신 다물고 있던 입이 열리고 담기 힘든 욕설이 터져 나온다. 상념을 털어내는 과정인가 보다. 술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가슴 깊숙이 숨어있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그 폭발이 다른 누군가를 향했다면 사회 부적응자나 알코올 중독자로 오해 받겠지만 홀로 마시고 내뱉는 폭발은 일종의 스트레스 혹은 분노 해소 방법이다.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 방법은 일시적인 효과는 있으나 장기적으로 심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든다.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교회 예배당이다. 어릴 때도 뭔지 모르지만 그 군중 속에 묻혀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때 느낌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어릴 때 느꼈던 그 기운까지는 아니지만 찬양을 따라 부르다 보니 마음은 한결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자~ 다 같이 주님께 기도드리겠습니다."
"@$$#$%$&**@#$%^&&
“하늘에 계신 아버님~ $%#$$%#@*&*$%#$&*%#@#$%$##$%% 오~ 주여! 으흐흐흑"
찬양이 끝나고 목사의 기도에 수많은 신도들이 두 손을 모으고 혹은 손을 높게 들고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내 옆에 앉은 한 아주머니는 큰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쏟아낸다.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당을 빠져나가려는 찰나였다.
"형제님 어디 가세요?"
"집에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여성이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다. 턱 선까지 차분히 내려오는 진한 커피색의 단발머리와 단정하게 차려입은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균형 있는 얼굴을 가졌다. 그냥 한 마디로 외모에서 바른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인상이다.
보통 대중적인 장소에서 누군가에게 다가오는 자의 미소는 보통 이해관계적인 목적을 때문에 인위적이게 마련이지만 그녀의 미소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냥 그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것마냥 편안한 미소로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건다. 그녀는 친밀한 관계에서나 가능한 1.2m의 퍼스널 스페이스 안까지 접근한다. 그 때 그녀는 나에게서 아직 가시지 않은 입안의 술 냄새를 눈치챈 듯 약간 멈칫하는 모습이다.
"형제님 식사하고 가세요, 오늘 마침 시원한 콩나물 국이에요"
"예?!"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며시 나의 옷깃을 잡아 끌고는 교회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안내한다. 얼떨떨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에 이끌려 교회 식당에 앉아 콩나물 국밥으로 뜻하지 않은 해장을 하고 있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낀 두 팔을 식탁에 올린 채 나를 쳐다본다.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 채 허겁지겁 국밥만 퍼 먹는다.
“근데… 거 언제까지 앞에 앉아서 그렇게 쳐다만 보실 껀가요?”
“아! 네 실례했어요,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뭐가? 신기해요?”
“교회 오래 다녔지만 술 냄새 풍기며 예배당에 들어오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아! 술… 냄새가 많이 나나요?”
“조금… 괜찮아요 어서 드세요, 속 쓰리실꺼 같은데”
“으으음… 그 쪽은 안드세요?”
“전 생각이 없어서요, 참 인사가 늦었네요 전 안 에스더예요 반가워요. 근데 형제님 이름이 뭐예요?"
"희택입니다 전희택."
"희택이면 ‘즐거운 집’이라는 뜻 인가요? 하하”
“뭐 그런 셈이죠, 한자를 좀 아시나 보네요”
“어릴 때 천자문을 좀 외웠죠 하하”
“희택 형제님 저희 교회는 처음이신 거 같은데... 어디 사세요?"
"분지 아파트요"
"저희 집에서 가까운데 사시네요"
"우물 우물 쩝.. 쩝.."
"좀 있다 예배 끝나면 저희 목장 모임이 있는데 들렀다 가세요"
"아뇨~ 됐어요 감사하지만 그냥 갈게요, 전 그냥 찬양하고 기도만 드리고 가려고 왔어요"
"그러시구나... 그럼 다음 주에 또 오실 거죠?"
"...."
나는 아무런 대꾸를 않는다.약속을 하고 싶지 않다. 약속은 곧 의무가 되어버린다. 나는 왠지 모르지만 약속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말을 밥 먹듯이 내뱉는 사람들이 많다. 그냥 전날 혹은 당일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는 그 시간 동안 쌓아왔던 상대방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한 순간에 무너뜨려 버린다. 약속을 깨뜨린 사람은 또 다른 약속이나 만남을 가질 수 있지만 갑작스러운 약속 파기를 당한 당사자는 하루의 기분을 망쳐버리게 된다. 기다림이 길면 길수록 그 실망과 배신감은 커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언짢은 기분을 드러내는 건 속 좁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웃으며 받아넘기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상대방의 미안함을 덜어주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약속의 소중함이 사라져 간다. 법적 효력과 강제성이 결여된 언약은 우선 순위에서 밀리기 마련이다.
나는 속 좁은 사람이 되기 싫고 어쭙잖은 미덕을 베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상대방에게 쓸데없는 기대나 믿음을 심어주는 말을 하는 건 더 싫다. 그냥 그 날 내 발걸음이 여기로 향하면 오는 것이고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잘 먹었습니다."
"여긴 헌금함이 없나요?"
"예 헌금함은 예배당에 있어요"
"음... 그럼 담에 오게 되면 오늘 먹은 것까지 같이 낼게요"
"예?!"
자리에서 일어나서 지하 식당을 올라와 교회를 빠져 나온다. 그녀는 교회 건물 입구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어 보인다. 나도 얼떨결에 손을 들어 흔든다.
'뭐야? 내가 왜 손을 흔든 거지, 저 여자 참 대게 부담스럽네"
교회 정문 담벼락을 돌아나가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는 담벽 위로 솟아오른 교회 지붕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담배연기가 피어 오른다. 연기 뒤로 보이는 십자가가 왠지 모르게 야속하게 느껴진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교? 진짜 있긴 있는 거가?'
사실 뭐 난 그의 존재가 중요하진 않다. 그가 어떤 말을 했으며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잠시 마음 쉴 곳을 찾은 것 뿐이다. 오늘 목청 높여 소리치고 따끈한 국밥으로 해장하며 마음의 안식과 배속의 허기를 달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러고 보니 교회에 있는 동안은 민혁의 죽음과 그로 인한 두려움에 사로 잡혀있던 나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가 남기고 간 그림자가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전까진 이곳을 찾게 될지 모른다.
산자는 살기 위해 죽은 자를 잊어야 한다. 그렇게 잊으면서 살아가야 한다.예배당 모인 사람들은 고통을 잊기 위해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고통을 잊고 또 다른 한 주를 살아가는 것이다.
내일이면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게 바로 진정한 프로 직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