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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y 14. 2020

디자인과 설계는 다르다

팔공 남자 시즌 2-32

  "! 그럼 헤드램프 파트는 DG오토모티브가 맡아주시고, 리어램프 파트는 한국 오토모티브가 해주시기 바랍니다. 원가 절감 아이디어는 최소 10가지 이상 도출하셔야 하고 원 단위 기준(차량 한 대당 해당 투입되는 원가)으로 최소 4,000 이상 뽑아내셔야 합니다. CF차종이 년간 판매 예상 대수가 7만5천대이니까, 절감 금액이 년간 3억은 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 못 갑니다. 아시겠죠? 그리고 한 가지 유념할 사항이 있어요. 외관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절감 안은 저기 앞에 앉아있는 디자인팀 여직원에게 승인을 받아야만 인정됩니다."


   회의장 앞쪽에 '디자인(Design)'이라고 적힌 명판이 놓인 별도의 책상이 보인다. 그곳에는 캐주얼한 재킷 안에 아이보리 니트를 받쳐 입고 다리의 실루엣과 발목이 드러나 보이는 정장 스판바지를 입고 있는 젊은 여성이 맥북프로 노트북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터치패드를 휘젓고 있다. 칙칙한 아재들로 가득 찬 회의장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당시 자동차 업계에서는 디자인의 중요성이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었다.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도 디자인이 꽝이면 매출로 이어질 수 없다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었다. 여성 운전자 증가와 차량 성능의 평준화로 디자인으로 차별화 전략을 취하는 분위기다. 한국 자동차도 프랑켄슈타인인지 뭔지 하는 독일의 유명 자동차 수석 디자이너를 영입했고 그에게 부사장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위임했다. 그는 해외 유학파 출신 디자이너들을 대거 영입했다. 더욱이 그가 취임하고 탄생한 K시리즈 차종의 판매고가 급부상하고 그의 파워는 더욱 막강해졌다. 아무도 디자인팀의 행보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


   문제는 자동차는 그림 그리는 화가 마음대로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림은 상상이지만 설계는 현실이다. 하지만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자동차 설계팀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었다. 설계팀의 원성은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그건 협력사의 설계팀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신대리님, 헤드램프 턴 시그널(Turn Signal) 쪽에 있는 그물형 내열 PC(Polycarbonate) 구조물을 삭제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왜죠?"

"일단 그 구조물 때문에 배광 조건 맞추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고 저 좁은 공간에 구조물이 들어가다 보니 내열에도 문제가 생겨요, 그래서 일반 PC는 적용이 안 되는 상황이라 내열 PC를 써야 는데 가격이 비싸다 보니 굳이 성능면이나 비용면에서 없애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음... 근데 저 그물 구조물이 디자인 사양이라서, 디자인팀에 물어봐야 할 거 같네요 잠깐만요"


  램프 설계원가 담당인 신대리는 국내 원가절감 활동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온순한 성격에 책을 많이 읽는지 박학다식하다. 평소 같으면 절감 안은 후다닥 해치우고 나에게 자신의 지식 썰을 푸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오늘은 주어진 과제가 너무 커서 그럴 여유가 없어 보인다.


  설계원가팀은 구매팀 못지않은 파워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제품의 구매단가를 산정하기 이전에 제품 원가를 산출한다. 구매팀은 그 원가를 기준으로 구매단가를 산정하기 때문에 설계원가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설계원가가 낮게 산정되면 구매단가 또한 높게 책정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설계원가 대응은 자동차 협력사 영업 담당자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구매팀 못지않게 설계원가 담당자들과 우호적인 관계 형성은 필수이다.


  신대리는 디자인팀 여직원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그녀와 잠시 얘기하더니 그녀와 같이 우리 테이블로 온다.


"샘플 좀 볼까요? 어느 파트를 얘기하는 거죠?"

"여기요, 여기 턴 시그널(Turn Signal) 쪽 그물 형상 보이시죠?"

"음... 그건 안 되겠는데요"

"왜요?"

"차량 후드 양쪽을 감싸는 측면부에 일부로 그물형으로 상어 아가미 형상을 구현하기 위해 넣은 부분이거든요"

"상어 아가미요?"


 차가 무슨 생선도 아니고 상어 아가미는 왜 넣는 것일까? 사실 그게 상어 아가미일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녀의 그 말에 신대리와 조 부장, 그리고 양 부장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정말 예술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르긴 다른가 보다. 그녀는 '상어 아가미'라는 말만 던지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영어로 디자인(Design)은 설계와 같은 말이지만 현업에서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요즘 디자인팀 때문에 죽을 맛이에요 정말, 뭣도 모르는 것들이 그림만 그리고 앉아가지고~휴"

"정말 힘드시겠네요 쩝"

"신대리님 램프는 대부분 외관부품이라 이런 식이면 절감 안을 도출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아놔~ 그러니까요 목표금액을 어떻게 채울지 걱정이네요, 일단 외관과 상관없는 것부터 제안하시죠"


  신대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디자인팀 여직원을 한 번 흘겨본다.  


"전대리 너~ 중국말 좀 한뎃지?"

"예 과장님"

"서커스가 중국어로 뭐냐?"

"서커스요?"

"응 그래 오늘 일정 마치고 출장 온 본사 직원들이랑 상해 서커스가 유명하다고 해서 보러 갈 거거든"

"아~네 자지요!"

"'뭐? 자지?"

"예! 자지"

"하하하"

"하하하"


  독고과장의 느닷없는 중국어 질문에 이은 나의 답변이 한 바탕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정말 서커스는 중국말로 '잡기(杂技)'로 표기되며 발음은 자지다.


"진짜야?"

"예! 맞아요 자지"

"야~ 그럼 보지는 뭐냐?"

"보지는... 아 맞다! 장백지(張柏芝) 아시죠 중국 여배우?"

"어 알지"

"그 여자가 짱보지예요"

"푸하하"

”하하하"


 또 한 번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번엔 옆 테이블에서도 듣고 있던 다른 협력사 직원들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한다. 멀리서 디자인팀 여직원은 이런 상황이 의아한 듯 바라보고 있다. 남자 직원들의 세계는 이런 저질 농담에 환호한다. 뭐 농담이 아닌 사실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류의 농담이 삭막한 분위기의 전환을 가져오곤 한다.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제조업 세계에는 음양의 조화가 깨진 탓인지 이성에 대한 갈급함이 이런 류의 농담으로 터져 나오곤 한다. 그리고 이런 류의 농담을 잘하는 자는 남자들 사이에서 적잖은 인기를 구가(謳歌)한다.


  자지든 보지든 뭐든 일단 웃고 볼 일이다. 여자들이 없다면... 수컷들의 삭막함을 깨뜨릴 외설이 필요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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