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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16. 2020

울타리에 갇히다

팔공 남자 시즌 2-74

"전대리님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고마워요 걱정해줘서 유진 씨!"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인사팀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놀라던 그녀의 표정은 아래 위로 나를 훑어보고는 멀쩡한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미소를 띤다.


"근데 무슨 일로...?"

"아! 참 접수된 병가(病暇)를 철회해야 해서요, 본인의 확인이 필요해요, 여기 서류 확인하시고 사인해주시면 돼요"

"요즘 덕분에 책 잘 보고 있어요"

"헤헤 그게 뭐 다 대리님 덕분이죠 뭐"

"대리님 요즘 책 많이 읽으시는 거 같던데요"

"읽진 않고 빌리기만 하하하"


  그녀는 삭막하던 사무동 건물 안에 도서관을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그 아이디어는 내가 제공했지만 그 이후 모든 일은 그녀의 말과 행동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녀는 여리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있어서는 당차고 소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 모습을 알게된 건 우연잖은 두 번째 만남에서였다.  




퇴근시간이 지나고 어김없이 사무실에 남아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전대리님 그만 퇴근하시고 한 잔 하러 가시죠!"

"갑자기 웬 술? 안돼. 이번 주까지 설계원가 견적 제출해야 돼서..."

"오늘만 하고 죽을 것도 아닌데, 나갑시당"

"어딜?"

"저희 오늘 동기 모임 있는데 한 잔 하려고요"

"거기 내가 왜?"

"대리님도 뭐 입사 동기 아닙니까? 하하하"

"그래 뭐 동기는 동기지 하하"


  영대의 한 포차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술잔을 기울이며 앉아있다. 한눈에 봐도 신입 사원임을 알 수 있을 듯한 새로 산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다. 나도 예전에 신입사원이었을 땐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하며 잠시 회상에 잠긴다.


"어!? 봉래 부대장 왔다!"

"야~ 왜 이래 늦냐? 너가 회사일 다하냐?"

"몰랐냐? 내가 없음 회사 안 돌아 가는 거?"

"푸하하 역시 그 허세는 어딜가지 않는구만"

"이 분은?"

"어 인사해! 우리 팀 전희택 대리님이야, 우리랑 같이 경력으로 입사하셨어 나의 팀 소울 메이트이신 분이야 하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그게 도..."

"아... 아무것도 아녜요 하하하 자!자! 우리 대리님도 오셨는데 한잔하시죠!"


  다들 내가 대리하는 말을 듣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편히 앉으라고 얘기한다. 그들은 나에 대해 뭔가 들은 것이 있는 듯 무리 중에 한 남자사원이 말을 하려 하자 봉래 씨는 그의 입을 막으며 급히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다.

   그 와중에도 나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꽂혀있었다. 다름 아닌 눈부시게 하얀 날 통근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그녀이다. 그런 그녀도 나를 알아본 듯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한다.


  그들은 신입사원 연수 기간 같은 소그룹 멤버들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소그룹의 리더가 바로 그녀였다. 그들의 얘기로는 처음에는 다수결의 투표로 봉래 씨가 리더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특유한 유머감각과 재치 그리고 남자다운 우람한 체격이 팀원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수기간 소그룹에 떨어지는 여러 가지 과제와 프로젝트 수행과정 속에서 그녀 특유의 흡입력 있는 언변과 강한 추진력이 돋보이기 시작했고 봉래 씨도 그 부분을 인정하고 소그룹의 리더 자리를 내려놓고 자신은 그녀의 부대장이 되기로 자처했다.


  그녀는 무리 속에서 서서히 빛이 나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리더십은 팀의 단합과 화합을 이끌었고 신입사원 연수기간 가장 우수한 그룹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고 회장으로부터 최우수 신입사원 표창을 받았다. 그녀는 나도 몰랐지만 회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회사에 입사했다.


"대리님 생각도 일리가 있네요,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

"책 읽는 거 좋기야 좋죠! 그런데 인사팀에서 직원 역량 강화를 위해 독서를 강조하면서 정작 아무런 지원은 없잖아요, 사실 퇴근하고 책을 읽을 직원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독후감까지"

"대리님 말이 맞아, 우리 팀은 뭐 거의 매일 야근인데... 책은 무슨 얼어 죽을..."

"그래 그래! 요즘 인사제도 개편이다 직원 역량 강화다 뭐다 해서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건 갈수록 많아지고 힘들다 힘들어 정말"

"음... 사실 독서역량 강화는 인사팀에서 제가 제안했던 안이거든요 하하"

"야! 너는 현업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라, 그 회장님 옆에만 붙어있으니 알 수가 있나"


  그녀는 책을 좋아한다. 책은 좋다 누구에게나. 다만 좋은지 알지 못할 뿐이다.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런 책의 이점을 알리고자 했던 모양이다.


  인사평가 항목에는 교육훈련도 포함되어 있다. 모든 직원은 각 직급과 직무에 맞는 교육훈련과정을 받아야 한다. 교육과정은 정부기관에서 실시하는 사외교육부터 고객사에서 실시하는 교육 그리고 온라인 강의까지 다양하다.


  인사팀에서는 대대적으로 교육훈련 시스템을 바꾸고 있었다. 학점이수제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고 각각의 교육훈련에 학점을 부여하고 각 직급별로 이수학점을 부여하여 학점 미달 시 진급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초강수 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개편된 교육훈련과정 중에서 전 직원 공통 과제로 독서가 선정되었고 그건 그녀가 제안하고 추진하고 있는 업무였다.


  그녀가 좋은 취지에서 했던 일이 동기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일에 치여 독서를 하지 않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독서에 치여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 또한 원치 않는 일이다. 사실 독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업무는 오로지 회사를 위한 것이다. 인생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업무보다 독서를 통한 지식과 교양을 쌓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다.


  또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건 회사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중하는 회사는 장기적인 직원 육성에는 관심이 없다. 대외적으로만 회사 이미지를 위해 직원을 가족처럼 혹은 사람이 먼저다라는 둥 입에 발린 말을 하지만 당장 실적이 악화되고 회사가 힘들어지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인적구조조정이다.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안이지만 언발에 오줌누기랑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녀가 입사 전 신입사원 연수기간 동안 보여준 탁월한 언변과 기발한 생각들은 분명 그간 쌓여온 독서의 결과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매일 퇴근을 위해 일을 하지만 출근하지 않을 미래는 생각지 않는다. 쌓여온 업무경력은 회사를 떠나는 순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지만 독서로 쌓인 교양과 지식은 그대로 남아 삶의 지혜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버린다. 그 울타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높고 견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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