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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17. 2020

협력사가 해결사다

팔공 남자 시즌 2-75

"어이! 전대리 오늘 오토패스 확인해봤나?"

"예? 아직..."

"아놔! 매일 확인하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설계원가 자료 준비 때문에..."

"그게 핑계라고 하는 소리가? 어이!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빨리 확인해서 처리해 고객사에서 연락 왔잖아!"

"네 알겠습니다."


  고객사에는 자사뿐만 아니라 전 1차 협력사를 대상으로 공지하는 오토패스(Autopass)라는 온라인 게시판이 있다. 그곳에는 고객사 내부 공지 사항이나 협력사에게 전달하는 공고사항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협력사에서는 항상 그 게시판에 공지되는 사항들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고객사의 중요한 전달 혹은 요청 사항들을 그곳을 통해 공지된다. 그래서 각 영업부서에는 오토패스를 항상 확인하는 담당을 지정해 놓는다. 보통 부서 내 막내들이 그것을 챙기고 있었다. 

  

[중국 차종 플라스틱 소재 소요량 조사의 건 ]


  '아놔! 오늘 또 집에 다 갔네' 


  또 자료 조사 관련 공문이 접수되었다. 마감기한이 오늘까지다. 양산 차종 계산서를 다 뒤져야 한다. 소재별로 소요량 및 금액을 산출해야 한다. 항상 예상치 못한 긴급한 사이드 업무들이 치고 들어와 기존의 메인 업무를 방해한다. 결국 시간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 


"전대리님 퇴근 안 하십니까?"

"오늘도 야근이야, 오토패스 조사 자료 때문에"

"아~ 그놈의 고객 놈들은 지들이 확인해보면 될걸 왜 맨날 협력사 직원들 달달 볶아서 일 시켜먹는지 모르겠다니깐요"

"그래서 협력(協力) 사 아니겠어요"


   고객에게 협력하는 회사라서 협력사이다. 고객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해결해 준다. 어쩌면 협력사보다 해결사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웬만한 일은 협력사에서 다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외주생산 부품 중 상당 부분은 어렵고 까다로운 품질을 요구하는 부품들이 많다. 수율이 잘 나오지 않는 돈 안되는 부품들을 일부로 협력사로 밀어내곤 한다. 그럼 협력사는 골머리를 앓고 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다. 그 과정 속에 적잖은 손실 비용이 든다. 뭐 그 덕에 제품 생산의 노하우를 익혀가는 것이다. 


  덕분에 고객사는 방대한 양의 자동차 부품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협력사 직원인 동시에 고객사 직원이기도 하다. 사실 월급만 협력사에서 받을 뿐 대부분의 일은 고객사의 일이다. 부품만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 용역 서비스도 포함되어 있다.


  국내 영업팀에서는 매달 원소재 가격 변동이 있을 때마다 혹은 고객과의 제품 및 개발비 가격결정이 끝나고 나면 고객사 본사로 불려 간다. 변동된 소재 가격에 의한 가격 변동 내역과 네고가 완료된 제품과 개발비를 고객사 자체 ERP 시스템에 입력하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시스템은 고객사 내부 전산 프로그램으로 내부 직원의 아이디를 통해 접속해야 한다. 편의상 고객사의 구매담당자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접속하여 방대한 양의 가격결정자료들을 하루 종일 혹은 며칠이 걸려 입력해 준다. 고객사 담당자가 직접 해야 할 일을 협력사 직원이 대신해주는 것이다. 마치 당연히 협력사 직원이 해야 하는 것처럼... 그들은 맨파워가 부족해서라고 하지만 그러면 직원을 더 뽑아야 하는 것이 맞다. 대기업이 직원을 많이 고용하지 않고도 방대한 업무를 다 처리할 수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부당한 일이 지속되면 나중엔 아무런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없이 그것이 마치 당연한 원칙처럼 되어버린다. 세상의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이나 원칙들 중 상당 부분이 그렇게 만들어져 왔다. 그 누구도 저항하지 않기 때문에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아~ 피곤하다! 벌써 9시야? 아직 많이 남았는데..."


   오늘은 수요일 가정에 날이다. 1층 사무동에 남아있는 직원이 그리 많지 않다. 이 날은 오후 5시가 되기 15분 전에 전사에 방송이 울려 퍼진다. 뭐 내용은 가정에 날이니 되도록 빨리 업무를 종료하고 퇴근하라는 내용이다. 

  과거 민혁의 과로사로 회사에서 야근 자제와 가정의 날 준수와 같은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설계 사무직의 야근을 차단하기 위해 저녁 7시 이후 사무실 전력을 차단하는 방법까지 동원했지만 어차피 쳐내야 하는 긴급 업무를 결국 가정으로 들고 가서 하는 직원들이 늘어났고 오히려 야근 수당도 못 받고 일해야 하는 상황에 직원들의 원성은 더 커졌다. 기름값 정도밖에 되지 않은 적은 수당이긴 하지만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빼앗기면 기분 나쁘다. 


 직원들은 생각 없는 회사의 정책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며칠 가지 않아 전력 차단은 중단되었고 다시 예전처럼 야근이 계속되었다. 결국 회사는 향후 더 많은 직원 채용을 통한 업무량 분산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전환했지만 그것이 결국 급여 인상은 제한하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전대리! 퇴근 안 해? 가정에 날인데..."

"뭐 난 아직 가정이 없어서 하하하"

"그럼 가정을 만들로 나가야지 하하하"


    국내영업팀의 고정안 대리가 백팩 가방을 둘러메고 사무실을 나가며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는 국내영업팀에서 가장 야근 수당을 탑(Top)을 찍는 직원이다. 얼마 전 결혼을 하고 조금씩 야근을 줄여가려는 모습이 보인다. 그가 던지고 간 말에 잠시 생각한다.


'기혼자들은 가정에 날이라도 있는데 미혼자들을 위한 연애의 날은 왜 없는 거야?!"


  푸념 섞인 한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사무실을 나가려고 1층 복도를 지나가는데 1층 서류창고에 불이 켜진 채 문이 열려있다. 문 앞에는 서류박스로 보이는 상자들이 놓여있다.


"어! 이 시간에 서류창고에 웬 불이 켜져 있지?"


  서류 창고 쪽으로 걸어간다. 반쯤 열린 문 안을 들여다본다. 눈에 익은 이마가 눈에 들어온다. 인사팀 배유진 씨다. 그녀는 박스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창고에 쌓인 먼지를 쓸고 있다.


"유진 씨!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해요?"

"엇! 대리님! 대리님이 어떻게 이 시간에?"

"전 뭐 야근 중이죠"

"아 그러셨구나. 전 보시다시피 청소 중입니다."

"뭐 청소 알바라도 하는 거예요? 하하하"

"여기 도서관 만들려고요!"

"예?!"


  그녀는 굽혔던 허리를 일으켜 세운다. 날리는 먼지 속에 마스크를 쓴 채 손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한 손에는 빗자루를 쥐고 서서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하얀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마스크를 때문에 입가에 미소는 보이지 않지만 초승달로 변한 그녀의 눈이 그녀가 웃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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