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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25. 2020

페인터가 되다

팔공 남자 시즌 2-79

"유진 씨! 완전 전문 페인터 같은데요"

"그런가효 하하하!"

"그 멜빵바지에 묻은 얼룩들은 뭐예요?"

"아! 사실 저 취미로 그림 그리거든요, 화방에서 작업할 때 입는 옷이에요"

"오! 그림이라...

 

   그녀는 주말마다 화실에 나간다고 한다. 취미로 시작한 그림이 벌써 1년이 다되어간다고 한다. 화실에서도 알아주는 그림쟁이가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자신이 소질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집중을 하게 된다고 한다. 화실의 선생님의 추천으로 아마추어 단체 작품전에도 몇 번 출품했다.


"와! 유진 씨 완전 예술가네요"

"에이 대리님도 참, 그 정도까진 아니구요 하하하"

"어쩐지 페인트 칠하는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하하하"


  그녀는 마치 양파 같다.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새로운 껍질이 나오는 신비한 그런 존재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관심이 증폭된다. 신비감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된다.


"대리님은 취미가 뭐예요?"

"저요?  음... 글쎄... 야근?!"

"하하하 장난치지 마시구요"

"글쎄요 등산하는 거 좋아해요""

"오 등산이요? 산에 올라가는 거 힘들지 않아요?"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산은 정직해요 힘든 만큼 보여주니까요.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마치 우리의 인생과도 닮아있죠"

"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삶이 시련의 연속이라죠.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면서 되뇌는 말이에요 인간은 시련을 통해 승리하는 거라고..."

"음... 예술만 하는 게 아니라 철학도 하시네 고흐와 니체의 만남인가? 그럼 뭐 고체인가?! 하하하"

"푸하하하 대리님 넘 웃겨요 어어어~ 아~~"

"쿵!"


   그녀는 작은 A자 사다리 위에서 페인트를 칠하다 나의 농담에 배를 잡고 웃다가 균형을 잃고 사다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다. 떨어지면서 한 쪽발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중력과 함께 무게중심이 한 쪽 발에 쏠리면서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목을 움켜쥔다.


"괜찮아요 유진 씨?"

"아~ 아무래도 발목을 삔 거 같아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괜한 농담을 해서"

"괜찮아요 인생이 시련의 연속인데요 뭐, 몸이 좀 파괴되긴 했지만 대리님 덕분에 오래간만에 배꼽 잡고 웃었네요 하하하"

"하하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발을 딛뎌보지만 통증 때문에 일어서질 못한다. 발목이 불룩하게 부어오르기 시작한다. 나의 부축을 받고 일어서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표정일 일그러지는 것으로 봐 발목을 심하게 다친 것 같다.  

 

"안 되겠다! 자! 업혀요!"

"아녜요 괜찮아요!"

"어서 업혀요 몸이 다 파괴되기 전에, 지금은 패배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파괴되지 않는 게 더 중요한 거 같네요"

"피식! 대리님 참 한 말빨 하시네요"


  그녀는 양팔을 뻗어 살며시 나의 목을 감싸 안으며 몸을 나의 등에 포갠다. 그녀의 체온이 나에게 전달된다. 그 느낌이 싫지 않다.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달되며 평형을 이룬다. 체온을 나누는 것은 서로가 하나 됨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이와 살을 맞닿는 것은 서로가 하나 되는 지점을 찾아가는 위한 행위이다. 오래된 연인은 서로의 살 냄새를 기억한다. 살을 맞닿지 않는 연인은 오래갈 수 없다.


  나는 그녀의 종아리와 허벅지 사이를 팔로 감싸 안아 그녀를 들어 올린다. 생각보다 묵직한 느낌에 순간 멈칫하다 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선다.


"무겁죠 대리님?"

"철학자는 아닌 거 같네..."

"예?! 무슨 말이에요"

"아... 아무것도 아녜요"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아니구먼 하하하'


  순간 떠오른 생각에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혼자 속으로 웃으며 삼키기로 한다. 여자에게는 정직이나 솔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칭찬과 배려이다.


  솔직함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솔직함이 그렇게 유용하지 못하다. 솔직한 사람은 외롭다. 그래서 철학자나 예술가들은 항상 외로움과 함께 한다. 사람들 속에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사유하고 고민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 속 사람들 사이에서 페르소나(Persona)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힘들어한다.


   과거 그런 여자들의 심리를 잘 몰라 생각나는 데로 날렸던 팩트 섞인 농담들이 당시에는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지만 그 농담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의 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몰랐다. 상대방도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대심한 척 웃으며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말은 상대방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는다. 그런 남자를 이성으로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운 여자는 없다.


 그럼 그녀가 나에게 이성으로 다가온 것인가?

  

"발목 인대가 파열되었네요 깁스를 해야 될 거 같네요"


  의사의 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굳어진다. 얼마 뒤 그녀가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은채 진료실에서 걸어 나온다. 애써 웃으며 나를 쳐다보지만 마음이 편치 않음이 표정에 드러난다.

   

"큰일이네, 도서관 만들어야 하는데... 참되는 일이 없네요"

"너무 걱정 말아요, 일단 페인트는 내가 마저 다 칠할게요"

"대리님이요? 어떻게 제가 대리님한테 다 떠맡겨요?"

"이렇게 다친 것도 내 탓인데..."


   나는 그녀를 위해 페인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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