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1,2] 베르나르 베르베르
"당신이 기억하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백지로 태어난다. 하얀 백지에는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기록되고 뚜렷하다. 무엇을 기록할지는 당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자라온 환경(가정, 학교, 사회)이 기록한다. 그 기록들이 백지를 채우고 그것이 내가 아는 진실이 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한다. 거대한 우주 속 지구라는 행성 그것도 한국이라는 시스템 속에 세팅되어 있는 것들을 가감 없이 받아들인다. 옛날에는 그 정도가 심각했다. 세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어른들의 말씀과 교과서에서 알려주는 것들 그리고 TV와 신문에서 얘기하는 것들로 우리의 상식이 채워지고 그것들이 정형화된 진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어떤가? 5G 네트워크 망을 타고 전 세계의 수많은 정보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사람을 만나면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가 보고 있는 세상이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데이터(영상, 이미지, 텍스트)들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보느냐에 따라 나의 생각과 기억은 바뀌어간다. AI는 그런 나의 취향에 맞춰 관련된 더 많고 심화된 정보와 자료를 계속 노출시킨다. 결국 자신만의 특유한 정신세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누가 무엇을 더 많이 집어넣느냐가 이 시대의 성공 관건이 되었다. 공중파나 언론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 누가 더 완벽하고 자극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내느냐 그것이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돈과 권력을 가져다줄 것이다.
대다수의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기억이 역사가 되고 상식이 되며 진실이 된다. 그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마 저자 베르베르는 이런 의문에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최신작 [기억]을 읽고 난 후 나의 뇌리에 남긴 가장 의미 있는 기억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당신이라고 믿는 게 당신의 전부가 아닙니다."
- [기억] 중에서 -
그의 전작 [고양이](서평참조)에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기억과 시각을 통해, [죽음](서평참조)에서는 사후 세계를 통한 인간의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스토리로 그의 상상력을 펼쳤다면 이번엔 최면이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의 수많은 전생을 드나들며 또 다른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 그는 상상의 제한을 없애기 위해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소재와 주제의 한계를 벗어난다. 기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가상의 배경은 무엇을 어떻게 쓰든 작가의 상상력에 제약이 없다. 상상력의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또 한 번 그의 위대한 상상력에 감탄한다.
"르네"라는 한 역사 교사의 최면을 통한 전생의 경험이 그가 알고 있던 진실들이 아니 기억들이 진실이 아님을 깨달아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최면 속에는 수많은 전생의 문들이 등장하고 과거의 역사 속 또 다른 자신을 경험하며 현재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이 진실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결국 현실 세계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로 낙인찍히고 경찰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현재의 기정사실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사회와 격리된다. 기존에 구축되어 있는 국가와 사회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은 그런 자들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그런 혁명적인 인물이나 신진세력들이 나타나면 반사회적 혹은 정신이상자 등으로 몰아 억압하고 세상과 격리시키는 방식으로 제압해왔다.
"역사에는 세 가지 관점이 있다. 나의 관점, 타인의 관점 그리고 진실"
- [기억] 중에서 -
사실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설령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누군가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같은 시점의 역사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혹은 제삼자가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 결국 기록하는 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배제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역사가 진실인지 아닌지 판가름하기가 쉽지 않다. 오래된 역사일수록 남겨진 기록이나 증거 등이 부족하기에 더욱 알기 어렵다.
내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미디어에 노출되었느냐가 결국 나의 관점을 만든다. 성인이 되기 전 어떤 교육을 받을지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의무 교육과정이 끝나고 성인이 되면 우리는 즐겨 찾는 책과 미디어를 제한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제한적이라는 말은 내가 원하고 당기는 것을 보고 읽고 배우고 싶지만 사회적 성공이라는 미명 아래 세상이 요구하는 지식과 기술을 익히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쏟아부 울 에너지가 많지 않다.
우리는 자신을 매료시키는 가장 완벽해 보이는 스토리를 선택할 것이다. 저자의 집필 능력과 스토리의 완전성이 역사의 진정성이 될지도 모른다. 훌륭한 저자(스토리텔러)의 기억이 진실이 된다. 마치 삼국지의 정사(正史)보다 삼국지연의(演義)가 우리에게 더 익숙한 것처럼...
우리는 그런 완벽한 스토리에 매혹되고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 스스로가 선택해서 받아들인 스토리는 거의 없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와 학교 성인이 되어서도 국가와 사회, 미디어에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의 기억을 만들고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외의 것들은 거짓이고 이단이며 낯설고 불편한 것이 되어버린다.
인류는 각 집단(국가, 사회, 민족, 종교, 기업)의 시스템과 스토리를 공고히 하고 세력이 약한 집단을 침범하고 세뇌시켜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 확장한다. 과거 일제 식민 시기 우리말과 역사를 말살시키려 한 것과 같이. 영역이 확장될수록 더욱 진실을 가장한 완벽한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대로 강자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해 왔다.
"역사는 누구나 동의하는 거짓말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 나폴레옹 -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의 위대한 황제 나폴레옹이 당시 대중을 추앙을 받은 것이 자신이 언론의 자유를 금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과거 우리나라의 권력자들도 언론을 장악해서 여론 몰이를 하는 것이 대표적인 정권 유지 수단이었다. 그럴듯한 스토리와 화제를 만들어 대중의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놓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알면서도 속는다. 그만큼 완벽한 타이밍과 치밀한 스토리가 만들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누군가는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 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나 또한 그런 점을 우려스럽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생각들이 많아질수록 믿음과 신뢰가 설자리를 잃어가기 때문이다. 이상한 건 책을 읽고 지식이 쌓이면 세상에 대한 의문들이 생겨난다. 아는 것이 많아야 알고 싶은 것도 많아지는 법이다.
"무지로 인한 공백을 메우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의 위력이죠"
- [기억] 중에서 -
의문과 상상이 없다면 새로운 스토리도 생겨날 수 없다. 의문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새로운 창조의 과정이 아닐까? 만약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 믿고 신뢰한다면 고민이나 불안함으로 인한 고통은 줄어들지도 모른다. 기존의 것들을 답습하고 변화와 성장은 멀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믿음과 신뢰 속에서는 의문과 상상이 자라날 공간이 줄어듬을 느낀다. 요즘 같이 공포와 의심이 만연해 있는 시기에는 음모로 가득한 상상이 활개를 친다. 그런 상상은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장르가 어둡고 부정적이지만 그럴수록 대중은 빠져든다.
"믿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라!"
- 영화 [런] 중에서 -
나는 공포나 스릴러 영화를 즐겨본다. 최근에 본 영화 "런(Run)"는 나에게 불편한 충격을 선사했다.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몸은 불편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누리며 살아간다. 어머니를 향한 강한 믿음 속에서 자신의 신체적 불행을 극복해나간다. 우연한 계기로 생겨난 의문은 의심으로 발전하고 자신이 선천적인 장애가 있었던 것이 아닌 생체 실험을 위한 마루타로 이용당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깊은 신뢰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우리는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의해 혹은 볼 수 없지만 작용하는 어떤 힘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일 수 있다. 그런 불가항력적인 힘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었을 수도 있다.
책의 후반부로 넘어가면 저자는 아틀란티스 문명을 언급한다. 이 부분이 상당히 흥미롭다. 아틀란티스에 존재했던 장수 거인(현생 인류와는 비교되지 않는 큰 체구와 900살이 넘는 수명 -> 성경 속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930세)이나 노아(950세)같은 인물들 연결시킴)을 신의 존재와 연결시킨다.
자신만의 상상으로 이상 세계(아틀란티스)를 구체화 시키고 그들이 태초의 인류와 연결시키는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아틀란티스라는 앞선 문명의 당시 태초의 원시인같인 인간들을 다스리고 길들이며 자신들을 신으로 받들게 만든다. 그 내용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인간에 의해 전수되고 그것이 마치 현존하는 수많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경전의 모태가 된다.
물론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산물이지만 너무도 그럴듯해 보이는 스토리는 기존의 나의 생각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어쩌면 몇 백 년 아니 몇십 년 뒤에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실들이 진실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복종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게 참으로 놀라워요"
- [기억] 중에서 -
진실을 만들고 그것에 대한 믿음을 심어 넣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사람들을 모으고 복종하게 한다. 단체를 결속하고 나아가 민족과 국가와 종교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만약 기존의 진실이 사라지고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는 다시 새로운 진실을 찾게 된다. 인간은 실로 진실과 믿음이 없는 불안정한 세상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흔들릴 때 완벽한 스토리는 새로운 진실을 만들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느냐에 따라 그것은 그들 속에서 구전되고 카피되고 변형되며 새로운 진실이 되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가 될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기억]은 해리포터의 판타지 소설처럼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아닌
사실에 근거한 다방면의 지식과 사회 현상 속에서 피어나는 의문들에 자신의 상상을 불어넣는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모든 것을 신뢰할 수도 의심할 수도 없다."
- 글 짓는 목수 -
우리는 현실의 삶을 살아가기에 의문과 믿음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절대적인 믿음은 안정을 가져다주지만 나중에 큰 상처를 줄 수 있고 지나친 의문은 삶을 불안하고 피곤하게 만들지만 올바른 방향을 잃지 않게 자신을 잡아 줄 수 있다.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