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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10. 2021

아가페(Agape) 사랑

팔공 남자 시즌 2-91-2

"유진 씨! 괜찮아요? 정신 좀 차려봐요"


 결국 홀짝홀짝 들이키던 소주가 그녀의 중추신경계를 무력화시켜버렸다. 그녀의 볼은 술기운에 붉게 달아올랐다. 너무 느리게 껌뻑이는 그녀의 눈꺼풀은 금방이라도 붙어버릴 분위기다. 


"아~ 대리니임! 오늘 왜 이렇게 기부니 좋죠?"

"좀 일어서 봐요 집에 가야죠"

"대리님 땅이 자꾸 움직여요"


  그녀의 말은 늘어난 테이프처럼 늘어진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균형을 잃는다. 나는 그녀를 부축한다. 인파가 북적이는 곱창 골목을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녀는 술기운에 기분이 좋은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다. 눈꺼풀이 닫힌 채 웃고 있는 그녀는 마치 안동 하회탈을 연상케 한다. 


"택시!"

"어서 오세요! 아이고 아가씨가 떡이 됐네"

"아... 네 분지 아파트로 가주세요"


  우연찮게도 여자 택시기사다. 중년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택시기사는 뒷좌석에 만취한 그녀를 보더니 혀를 차며 한마디 한다. 그녀는 택시에 오르자 그나마 남아있던 몸의 기운을 놓아버린 듯 고개를 나의 어깨에 기댄 채 축 늘어진다. 그녀의 머리에서 샴푸 향이 은은하게 스며 나온다. 


  취한 사람은 체중은 평소보다 더 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몸이 모든 긴장을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은 모든 긴장을 내려놓은 것이 분명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무게가 가중되는 느낌이다. 목이 꺾인 그녀의 머리를 아래로 내려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몸을 뉘인다. 

  그녀는 그 자세가 편했던지 얕게 코를 골기 시작하며 깊은 잠에 빠져든 모양이다. 그 모습이 귀엽다. 


"호호, 아가씨가 완전히 곯아떨어졌네요" 

"그러네요 못 마시는 술을 왜 그리 마셔대는지.., 참..."

"아가씨가 총각이 믿음직했나 봐요 호홋"

"예?! 그런 건가요?"

"아님 뭐 속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었나?"

"예?!"

"아니 뭐 남자가 답답하면 여자가 그럴 때도 있죠 호홋"

"무슨... 뜻인지?"

"아아아 암... I... can't wait to love you"

"아이고! 아가씨가 영어로 잠꼬대를 다 하네 호호호"

"기사님 천천히 가주실래요"

 

  그녀를 내려다본다. 옆으로 젖혀진 고개를 손으로 돌려 바로 뉘인다. 얼굴을 가린 머리칼을 손으로 넘긴다. 그녀의 하얀 이마가 드러난다. 사랑스럽다. 차 안 룸미러에 택시기사의 시선을 확인하고 몰래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나의 입맞춤을 눈치챈 것일까? 그녀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번진다. 이렇게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택시는 그녀의 기숙사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다. 


"죄송한데 혹시 여기 좀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그래요 그럼, 여기 이 시간에 택시잡기가 쉽지 않죠, 그럼 여자 친구 데려다주고 와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를 부축해 택시에서 내린다. 힘겹게 그녀를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그녀의 집 앞에는 또 그 러닝 팬츠의 배불뚝이 아저씨가 담배를 꼬나물고 있다 걸어오는 우리를 발견한다.


"오! 형씨! 오늘은 역사를 이루것구마이, 아가씨가 완 저이 맛탱이가 가부렀네!"

"아녜요 그런 거!"

"아니긴 뭐 아녀, 나도 다 이런 때가 있었지, 뭐 내 마누라는 술이 세가 내가 실려오긴 했지만 그때 그렇게 술만 안 마셨어도 내가 이래 살진 않았을 텐데... 우 씨! 술이 왠수여~ 훗~" 


  그는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연신 담배연기를 품어댄다.


"유진 씨 좀 일어나 봐요"

"아... 여... 기.. 가?"

"기숙사 왔어요 열쇠 어딨어요?"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가방을 뒤져 열쇠를 찾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뒤에선 배불뚝이 아저씨가 또 음흉한 미소를 띠며 손바닥과 주먹을 부딪치며 파이팅을 외친다. 


  그녀의 방을 찾아 침대에 눕힌다. 그녀를 부축해서 올라오느라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한숨을 돌리려 잠시 의자에 앉는다. 창밖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다. 하얀 이마부터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매끈한 목선, 봉긋한 가슴, 여리여리한 허리, 매끈한 허벅지 그리고 종아리를 따라 발끝까지 스캔한다.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 나의 모습에 나도 놀란다.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얏!'


  자리에 일어서 방문을 열고 나간다.


"가지 마요~"


 그녀가 침대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뭔가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킨 도둑처럼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아.. 안 자고 있었어요? 이만 쉬어요, 전 밑에 택시가 기다리고 있어 가볼게요 내일 연락해요!"

"...."


  나는 서둘러 아파트를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머릿속은 두 마리의 이성과 감성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양쪽의 팽팽한 접전은 끝이 나질 않고 택시에 앉은 나는 아파트에서 멀어지고 있다. 


"총각이 여자 친구한테  자상하네요"

"예..."


  자상함은 이성에 가깝다. 자상함 이라는 이성에 묶여 감성이 살아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녀는 용기 내어 나의 감성을 건드렸지만 나는 이성으로 막아섰다. 그리고 다시 둘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아무런 결정과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사랑은 때론 주어진 상황을 무시하고 빠져들 필요가 있다. 일단 빠져들면 주어진 상황은 보이지 않게 된다. 그게 두려워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가고 사회화 되어가면서 사랑의 감성이 설자리는 갈수록 줄어든다.  


  우리는 사랑하기 전엔 보상을 바라지만, 사랑하면 헌신한다. 


  헌신하는 사랑이 바로 진실한 사랑(Agap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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