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 남자 시즌 2-100
[YTM 뉴스 속보입니다.
DG 오토모티브 대표의 여직원 성추행 사건 관련 행방이 묘연했던 해당 여직원 방모양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범인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같은 교회를 다니는 언니 안모 양으로 밝혀졌습니다. 안타깝지만 피해자의 시신과 함께 범인도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후 시신을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을 판단됩니다.
피해자 방모 양의 직접적인 사인(死因)은 두부(頭部) 골절에 의한 과다출혈입니다. 국과수(국가 과학수사연구원)의 사체 부검 결과 큰 바위 같은 물체로 위에서 수차례 내린 친 경우 이런 유의 함몰형 두개골절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DG 오토모티브 대표 이 모 씨는 사체가 발견되고 사인에 대한 의혹이 풀리자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았습니다.
사건 당일 여직원과 말다툼이 있었고 홧김에 논두렁에서 그녀에게 물리적 폭행을 가했고 그 충격에 논두렁 밑으로 굴러 떨어진 방모 양이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기절한 것을 죽은 것으로 오인하고 사건 현장에서 도주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가해자 안모양은 주변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다 용의자가 사라지고 난 후 방모 양의 머리에 바위로 여러 번의 충격을 가해 살해하고 시신을 자신의 집으로 옮긴 것을 추정됩니다.
가해자 안모 양은 그녀가 적은 일기장을 근거로 평소 흠모하던 남자가 자신을 무시하고 피해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그녀는 아파트 메인 입구에 가로등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폭우와 어둠으로 CCTV로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전조등과 미등을 켜지 않은 채 메인 입구로 빠져나갔습니다. 최초 범행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재판부는 가해자 집에서 발견된 사체와 그녀의 자술 일기장의 내용과 정황 등으로 미루어 살인 후 죄책감에 의한 자살로 판결 지었습니다. 그리고 혐의를 계속 부인해오던 DG오토모티브의 이모 대표는 폭행죄와 거짓진술 등의 혐의를 적용 징역 1년형이 내려졌습니다. ]
뉴스에선 여직원 성추행 관련 기사가 어느새 남녀 치정에 의한 살인 사건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막장에 막장을 추가한 1+1 패키지 사건은 대중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다. 하지만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에만 관심을 둔다.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뉴스들은 그렇게 사람들의 뇌리에 잠시 기억되었다가 금세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더 자극적인 뉴스를 기대한다. 일상의 지루함을 자극적인 뉴스로 해소하려 한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건 마치 대중의 따분함을 덜어주려고 생기는 듯하다.
대중은 사건의 당사자들이 겪었을 감정과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저 짧은 진술로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설명해 버리는 뉴스 아나운서가 야속하고 자신은 고상한 척 혀를 차고 욕을 하며 뉴스를 보는 사람들도 얄밉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매 맞은 사람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매를 든 사람이란 것을...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다들 매 맞은 기억만 떠오를 뿐이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만연하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사랑에 굶주렸던 두 여인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사랑을 이루려 했지만 그 사랑 때문에 파국(破局)을 맞이했다. 사랑받지 못한 자는 사랑을 이룰 수도 없는 그런 것일까? 사랑도 마치 돈처럼 가진 자들만 계속 가져가는 그런 불공평한 것 같다. 부가 대물림 되듯 사랑도 대물림 된다. 결국 사랑받지 못한 자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애정의 표현은 학습된 것이다. 학습되지 않은 애정은 표현될 수 없다. 무관심은 무관심을 생산할 뿐이다. 다가오는 관심과 애정이 어색하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간혹 정상적인 애정 교류의 방식에서 벗어난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생긴다. 사랑도 받아본 자들이 받을 줄 아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 두 어린양이 당신께 돌아가려 합니다. 죄지은 자 그 죄를 용서하시고 억울한 자는 그 영혼을 달래주옵소서,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소망이니 주의 위로와 평안을 더하여 주옵소서"
유진 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녀 옆에 안 에스더가 같이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하얀 국화꽃에 둘러싸인 둘의 영정사진이 나란히 놓여있다. 환한 둘의 미소 앞에 나는 또 한 번 오열한다. 목장 식구들과 몇 되지 않는 교회의 조문객들이 자리한 가운데 목사가 그녀들의 마지막을 위해 기도한다.
난 그녀를 용서하려 한다. 용서만이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 안 에스더가 가는 길에서라도 유진 씨의 용서를 받길 바라본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자신도 이유도 사라졌다. 이른 새벽 짐을 싸들고 집을 나선다. 회사 정문을 통과해 사무실로 들어간다. 경비실의 경비 아저씨는 고개가 옆으로 꺾인 채 새벽잠에 빠져있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사내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에 불이 켜지고 벽에 그려진 다정한 사내커플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다가가서 웃고 있는 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유진 씨와의 추억들이 영사기 속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책장을 둘러본다. 수많은 책들이 꽂혀있다. 이 좁은 공간에 수많은 세계가 함께 있다. 그녀는 그 수많은 세계를 드나들며 자신을 옭아매었던 과거를 벗어났는지도 모른다.
"어!? 뭐지?"
책장 가장 위쪽 한 구석에 하얀 아이보리 색으로 책 커버가 씌어진 두툼한 책이 보인다. 손이 닿지 않는다. 나는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그 책을 꺼내 든다.
"A little prince without crime and punishment"
어린 왕자와 죄와 벌이 한 권으로 묶여 있다. 표지에는 [죄와 벌이 없는 어린 왕자]라고 영문으로 쓰여있다. 아마 그녀의 일기장 커버는 이 두 책에서 떼어낸 듯하다. 그녀는 왜 이 두 책을 엮었을까?
어린아이들은 죄와 벌이 난무하는 어른들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른들은 그렇게 지나온 어린 시절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동심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죄와 벌로 얼룩져 간다.
"난 동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책을 들고 도서관을 나선다. 해외영업팀 사무실로 향한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은 아직 어둠 속에 잠자고 있다. 형광등을 켠다. 입사 첫날 사무실에 가장 먼저 도착해 사무실 불을 켰던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과 마지막이 같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의 사직서를 꺼내 팀장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있는 자는 망설이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사랑이 떠나고 직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