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굳이 두 종류로 나누라고 한다면 여러 방식이 있을 것이다. 남과여, 백인과 유색인, 나쁜 놈과 착한 놈, 부자와 가난한 자,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혹은 치약을 끝에서부터 짜서 쓰는 자와 앞에서부터 짜서 쓰는 자 등 수도 없이 구분 지을 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인간의 지적 능력과 신체적 능력에 관한 상관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 왔다. 어린 나이에 무슨 그런 과학적이고 심오한 고민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짬뽕과 짜장면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요하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는숙제같은 거였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삼국지 3(KOEI사의 전략 시뮬레이션)이라는 게임에 빠져 있었다. 지금 3,40대 남자라면 이 게임을 접해보진 않았더라도 한 번쯤을 들어봤을 거라 생각한다. 학교만 파하면 집에서 그 게임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주말에는 친구 집에서 모여 서로 다른 세력의 군주가 되어 밤이 새도록 게임 삼매경에 빠져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삼국지 게임을 하면서 나의 머릿속에 인간이란 존재는 두 가지로 구분 지어졌다.
KOEI 삼국지 3
힘센 놈과 똑똑한 놈
"저 사람은 힘만 세고 무식한 게 장비 같구먼!"
"우아~ 어찌 그런 생각을... 머리가 제갈공명 뺨치는 수준인데요"
삼국지 속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많은 인물들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유비, 관우, 장비, 여포, 제갈공명, 조조, 손권 등 일반인들도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삼국지 속엔 세상 모든 인간 유형들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임을 통해 알게 된 삼국지 속 인물들은 나중에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간관계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곤 했다.
삼국지 게임 속 모든 인물들은 아라비아 숫자(1~100까지)로 각각의 능력치를 표시한다. 무력, 지력, 정치, 매력 등 여러 가지 능력치가 있다. 그 중에서도 게임에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능력은 뭐니 뭐니 해도 무력과 지력이다. 삼국시대는 난세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였다. 전쟁의 승패에 나라의 존망이 달렸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전투력(힘)과 전략전술(두뇌)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여포냐 제갈공명이냐는 당시 천하제일의 무력과 지력을 가진 자 중 누구를 선택하느냐는 어린 나에게 참으로 어려운 고민이었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나온 게 짬짜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인간을 내 맘대로 섞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게임에서는 가능했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게임 속에 참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력도 100, 지력도 100인 무장을 만들어 '이순신 장군'이라 칭하고 중국을 조선의 장수가 통일시키는 대반전의 판타지 역사를 쓰곤 했다.
천하무적의 장수를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는 곳마다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맥없이 쓰러진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재미가 없다. 아무런 이변 없이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다. 그때 난 완벽하면 재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쩔 수 없다. 좀 부족하더라도 재미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부족한 존재로 만든 게 아닐까? 세상 재밌게 살아보라고...
"세상에는 왜 이렇게 최고의 문무를 모두 겸비(兼備)한 사람이 없을까?"
현대사회에서 문에 능한 사람(문관)을 기업가나 정치인 혹은 전문 지식인이라고 칭한다면 무에 강한 사람(무관)은 운동선수나 전문 기능공 혹은 특수 육체노동자쯤으로 볼 수 있을까? 기업가이면서 운동선수이고 정치인이면서 전문 기능공인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뭐 눈을 씻고 찾아보면 있을 수 있겠지만 아주 드문 경우이다. 있다고 해도 두 분야에서 모두 최고 수준은 아닐 것이다. 둘 중 하나는 취미 수준에 그치는 정도이다.
최고와 최악은 종이 한 장 차이
현대 산업사회를 이루는 기본 구조는 분업에서 비롯된다.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세상이다. 뭘 잘하느냐가 중요하긴 하지만 여러 가지를 어중간하게 하는 것보다 한 가지만 잘하면 대우받는 세상인 건 확실하다. 과거 원시 수렵 시대에 태어났으면 가장 살아남기 힘든 쓸모없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중이떠중이가 푸대접을 받는 시대지만 과거에는 그들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 달리기도 잘해야 하고 나무도 잘 타야 하고 불도 잘 지펴야 하고 사냥의 작전도 잘 짜야된다. 자본주의 세상은 한 가지만 잘하면 돈이 모이고 돈이 다른 일을 대신해 주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한 가지에만 집중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뛰어난 전문가는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 봤을 때는 가장 불완전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가정을 해본다. 국가와 사회는 그런 유용한 전문가를 양성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 왔다. 그런 전문가를 양성하고 적재적소에 이용해 국가와 사회발전의 초석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제조기술과 선박 건조기술 및 쇼트트랙 세계 3관왕, 한국 아이돌 빌보드 차트 1위 석권 등등 최고에게만 돌아가는 스포트라이트와 찬사들은 자칫 사람들을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편협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 일등이 되기 위해 밤낮없이 한 분야의 지식이나 기술 등을 연마하는데 젊은 날의 열정과 시간을 쏟아붓는다. 다른 세계는 내 알바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만의 세계가 견고해지고 타인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내가 학창 시절 때는 시험이 끝나면 성적표는 물론이고 항상 전교 석차를 복도에 붙여놓곤 했다. 그리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방과 후 별도의 교실에서 등급별 공부를 했고 전교 1부터 100등까지는 등수와 이름이 적힌 칸막이 책상이 있는 별도의 정독실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했다. 그렇게 학교는 학생 때부터 계층을 나누고 소외계층을 양성해 내고 있었다.
가끔씩 TV나 매스컴에서 정치인이나 사회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사회 소외계층을 이해하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소외계층을 책과 지식으로 학습한 것이지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긴 어렵다. 대다수가 그들의 표심이나 인기를 얻기 위함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일등이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가장 불완전한 사람이다. 그들은 하늘에 떠가는 구름과 새들의 지저귐을 감상할 여유도 자신이 쓰는 화장실의 변기가 매일 깨끗한 이유에 대해서도 다 큰 어른이 [어린 왕자] 책을 읽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일등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서만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자살과 학대, 이혼, 고독사 등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것은 자기 것만 보고 타인의 세상은 전혀 들여다 보지 않으려는데서 생겨난 것은 아닐까? 머리도 쓰고 때론 땀도 흘리고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보고 책 속의 다른 세상과 사람도 만나고 해 봐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태평한 소리 하고 자빠졌네, 먹고살기도 바쁜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냐?"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먹고살기 바쁜 세상은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 너와 내가 모여서 만들어낸 것이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속에서 살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태평성대(太平聖代)는 세종대왕이 다시 돌아와야 하나?
소통 소통
소통(疏通)이란, 트이다는 뜻에 소(疏)와 통하다의 통(通)이 합쳐진 말이다. 트여야 통한다는 뜻이다. 한 분야의 일등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소통을 강조한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까? 한 곳으로 쏠리면 막히기 마련이다. 현 정부는 소통을 외치며 청와대 게시판도 만들고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취지는 좋지만 게시판이 소통의 역할보다는 자신의 이권을 대변하는 창구로 변질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낳게 된다.
소통은 문무를 고루 겸비한 교양 있는 자들 사이에서 가능한 것이다. (내 생각엔 문무를 고루 접하면 교양은 따라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장비와 제갈공명이 만나면 대화가 안 되는 것처럼 세상은 차라리 유비처럼 문무는 어중간하지만 교양(덕)을 갖춘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어야 소통 가능한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깊고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얕고 넓은 지식과 기술을 가진 자들이 많아야 세상은 소통소통해진다. 이런 사람들이 대접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남북으로 동서로 남녀로 여야로 갈라져 모두 자기만 옳다고 아우성이다. 자기 것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결국 치우친 사회를 만든 것이다. 대화와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 또한 학창 시절 학교에서 토론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대학 와서 그룹과제 때문에 처음 마주 앉아했던 토론은 너무 어색했고 익숙하지 않았기에 토론이라기보다는 서로 뭘 잘하는지 확인하고 과제 업무 분장을 하는 수준에 그쳤다. 결국 분업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문무에 모두 출중할 수 없지만 문무를 겸비할 수는 있지 않을까?
지덕체
학창 시절 교실 칠판 위 태극기 양 옆에는 항상 그럴싸한 글귀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한쪽은 기억이 가물하지만 다른 한쪽에는 학년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글귀가 있었다. '지덕체(智德體)'를 겸비한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학교는 덕체는 빼고 지(智)만 올리기 바쁘다.
"맨날 지만 잘난 척이네!"
경상도 사투리로 어린 시절 잘난 척하는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지만 올렸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보다. 너도 나도 다 제갈공명이다. 그러니 너나 나나 다 잘한 척이다. 귀는 닫고 입만 살았다. 입은 열고 닫을 수 있다. 닫아야 할 줄 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귀는 항상 열려있다. 왜일까? 지(智=문, 文)와 체(體=무, 武)가 균형을 맞출 때 비로소 덕(德=교양)이 가운데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