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려버린 수만 년

상처받은 나무를 바라보며

by 글짓는 목수

내가 다니는 수영장 입구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아마 수만 년의 시간을 견디며 이곳을 지켜왔을 것이다. 마치 콘크리트 회색의 줄기와 가지를 가진 유칼립투스 나무이다. 그 줄기는 어찌나 굵은지 성인 세네 명은 둘러싸야 감쌀 수 있을 정도로 두껍다. 높이도 30m는 훌쩍 넘어 보인다. 그가 내어주는 그늘 덕에 내차는 호주의 강렬한 태양을 피할 수 있다. 그 옆을 지날 때면 거대한 몸집에서 오랜 세월의 기운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무 전체를 카메라에 담으려면 한참을 떨어져야 가까스로 앵글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있다. 나무랑 같이 찍고 싶어 멀리 카메라를 세워두고 달려와서 찍힌 사진 속에 나는 마치 [월리를 찾아서]에 나오는 월리처럼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콩알만 하게 나온다. 나무 가지들도 웬만한 나무줄기 보다도 굵다. 가까이서 보면 마치 영화 속에서 본 그 옛날 거대한 공룡들의 근육과 피부조직 같아 보이기도 하다. 거대한 나무줄기 곳곳에는 누군지 모르지만 날카로운 무언가로 아무개 ♡ 아무개의 사랑을 새겨놓거나 누굴 비방하는 듯한 욕 같은 것도 적혀있다. 참 어딜 가나 인간은 지워지지 않을 자신의 추억을 남기려 한다. 나무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호주에는 수만 년이 넘는 수목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인류 이동 역사에서 보면 호주에 인류가 정착한 시기가 6만 5천 년 전쯤이라고 한다. 인간이 늦게 발을 디딘 만큼 자연은 더 오래 숨 쉴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시작한 인류(20만 년 전)가 호주까지 넘어오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배를 만들고 인도네시아 앞바다를 건너 호주 대륙으로 넘어온 것은 호주 대륙에 입장에선 재앙이었다고 한다. 처음 호주 대륙을 본 사피엔스들은 대형동물(유대목)의 사냥과 경작을 위해 울창한 수림에 불을 놓고 그 많은 삼림을 다 불태웠을 거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유칼립투스 나무는 가연성 오일을 분비하여 쉽게 발화하고 불에 취약하다. 지금 호주 대부분이 사막으로 뒤덮인 건 인류의 호주 정착과 무관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같은 위도 상의 아프리카와 남미대륙과는 대조되는 자연환경이다.


유칼립투스 나무의 원산지가 바로 호주이다. 호주 하면 코알라가 생각난다. 코알라는 그 잎을 먹고 살아간다. 코알라가 나무에 매달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이유 또한 그 잎에 들어있는 잠이 오는 신경안정제(Cellulose) 같은 성분이 때문이라고 한다.


난 산을 좋아한다. 한국에 있을 때도 시간만 나면 등산을 하곤 했다. 그런 내가 호주에서 산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말 그대로 오를 등(登)에 뫼산(山) 산을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호주는 등산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될 것 같다. 하산(下山)이라고 봐야 하겠다. 일단 내려가야 올라올 수 있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연상케 하는 시드니의 블루 마운틴은 일단 비탈진 계곡을 내려가는 것으로 하이킹을 시작한다. 땀 흘리고 고생해서 올라온 노력의 보상으로 멋진 경치를 내어주던 한국과는 달리 멋진 경치를 구경했으니 이제 고생해야지 하는 격이다.

지평선을 연상케 하는 평평하게 이어진 산 정상들과 그 아래로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인상적이다.


이곳 아이들은 산을 그릴 때 평평하게 그린다고 한다. 나무도 온통 하얗게 그린다. 어릴 적 뾰족한 산에 갈색 나무를 그리던 우리와는 다른 생각이다. 다른 환경은 다른 생각과 관념을 만들어낸다. 내가 호주에 오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이런 생각의 전환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반쪽이 다 잘려나간 나무 (이전 사진을 찾지 못했다 ㅜㅜ)
공룡 줄기

어느 날 수영장 앞 입구 하늘을 가득 덮고 있던 그 유칼립투스 나무가 그 많던 팔다리가 잘려나가 버렸다. 전기톱을 든 인부들이 사다리 차를 타고 와서 곳곳의 가지들을 잘라내었다. 무슨 이유(옆에 철로까지 넘어간 가지들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됨)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곳곳이 절단된 나무를 보노라면 왠지 가슴 한구석에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이곳에서 터줏대감으로 수만 년을 지키고 살아왔건만 고작 몇십 년 살다가는 인간들의 욕심 때문에 수만 년의 역사가 잘려나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45억 년 동안 번성해온 지구의 자연은 고작 수만 년 밖에 되지 않는 역사를 가진 그것도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에 의해 잘리고 깎이고 파헤쳐진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류의 편의와 번영을 위해 아낌없이 베어내고 잘라내고 파헤친다. 이제 당한 만큼 되갚아주려는 건지 자연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다.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희생된 모든 것들은 다시 인간의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이제 그 희생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건 아닐까?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2:17]


악의 고리를 끊는 것은 나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늘도 선악 가운데서 고민하는 나에게 선하심을 주옵소서


오늘도 일상 속에서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심에 감사하다.

KakaoTalk_20210401_180548179.jpg 블루 마운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