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다르게 보는 자들
1년 전 이맘때 쯤이었을 것이다.
코로나 19가 번지기 시작하고 이곳 호주도 락다운(Lockdown)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중단되다시피 했다. 나 또한 하던 목수일이 끊겨버렸다. 락다운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곳에 왔던 워킹과 학생들은 하나둘씩 경제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씩 떠나갔다. 호주 정부조차도 시민권자와 영주권자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경제적 지원이 없음을 공표했고 자국으로 돌아가라는 비정한 말을 내뱉었다. 한국에서 재난지원금을 지원한다는 소식에 부모님께 내 것도 신청하라고 했지만 해외 체류자에겐 해당사항이 없다고 한다. 그 옛날 일제 시대 나라 잃은 설움이 이런 기분일까? 졸지에 난민이 되었다.
일자리가 없어지고 수입이 없어진 대다수의 워킹과 학생들은 비싼 시드니의 생활비와 렌트(주거) 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결국 자국행을 결심하는 듯 보였다. 코로나로 귀국행 편도 비행기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워킹과 학생들은 벌어놓은 돈을 탈탈 털어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일자리가 없던 나는 지인의 소개로 콜택시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수많은 워킹과 학생들을 공항으로 실어 날랐다. 덕분에 나는 락다운 기간 택시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락다운이 길어지고 코로나가 심각해지자 떠날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고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곤궁의 시간이 찾아왔다. 일도 없이 집안에 갇혀 있던 시기가 찾아왔다.
"형님! 이거 받으세요! 밥은 잘 챙겨 드시죠?"
그 시기 그가 찾아왔다. 그는 차에서 비닐 보따리를 한 꾸러미 꺼내더니 나에게 준다. 비닐봉지 안에는 라면부터 카레, 참치, 계란, 김치 등등 갖가지 식료품들이 가득했다. 교회 목장의 목자(牧者)인 그는 목원들의 가정을 돌아다니며 식료품과 생필품 등을 전달해주는 것이었다. 락다운으로 교회도 문을 닫고 교회 사람들과의 모임도 중단되었다. 가끔씩 화상(Zoom)으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정도였다. 당시 나 또한 벌어놓은 돈이 거이 다 떨어져 힘든 시기였다.
목자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다. 한국에서 사회생활할 때는 말도 한 번 섞어보기 힘든 어린 나이이다. 전 직장에서 회사에서 부서 내 제일 막내 사원보다도 어렸으니 내 눈에 그는 그냥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 어린애쯤으로만 여겨졌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찌 알고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정말 적절한 타이밍에... 처음으로 손아랫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란 것을 느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후임들 후배들 밥 사 주고 술 사주고 금전적 심리적 도움을 줘야만 하는 존재였고 그것이 손 윗사람으로서 나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에~ 이 뭘 이런 걸 또 가져왔어? 귀찬쿠로!"
"힘든 시기잖아요 서로 도와야죠"
그도 힘든 건 마찬가지이다. 그 또한 타일 일을 하며 학생비자로 힘들게 살아가는 처지였다. 더구나 그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내의 남편이자 갓 태어난 아기를 가진 가장이었다. 그런 상황에 그 또한 일도 끊기고 나보다 더 힘들면 힘들었을 상황이다. 그런 그가 내민 그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 그가 다시 다른 목원 집으로 향해가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이 이후로 목자 목녀 가정과 1년 동안 매주 밥을 같이 먹는다. 매주 모여 같이 저녁을 먹고 서로의 삶을 나눈다. 자기가 무슨 마더 테레사인 양, 그 옛날 예수가 걸어온 길을 흉내 내려하는 듯 보였다.
'도대체 뭐지? 이 자쉭?!'
처음 그를 대면했을 때, 근거 없는 자신감과 당당함에 뭔가 있는 녀석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말 그대로 쥐뿔도 가진 게 없다. 호주에서 결혼할 때도 가진 돈이 500달러(한화 약 40만 원)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도대체 이 녀석은 뭘까 그리고 이런 녀석과 결혼한 저 철부지 딸내미는 또 뭐지 하는 생각을 했다. 얼씨구나 그런데 아기까지 낳는다. 갈수록 가관이다.
이곳 호주에서 거주 비자(시민권, 영주권) 없이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돈만 많다면 문제가 없지만 시민권이나 영주권자들에게 주어지는 의료, 교육, 양육 주어지는 복지혜택이 없기에 말 그대로 뼈 빠지게 일해서 돈으로 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거주비자 없이 아이를 키우는 분들은 정말 쉬는 날 없이 밤낮없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런 목자 가정을 바라보는 나는 도대체 이 집구석은 어떻게 돌아가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열심히 그들과의 동행을 지속해 나갔다. 일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형님! 가난한 게 아니라 좀 부족한 것뿐이에요 하하하"
내가 없는 살림에 뭘 이렇게 음식을 준비하냐고 목자에게 말버릇처럼 가난을 얘기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가난은 불행을 가져온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곤궁함 속에서 같이 모여 먹는 한 끼의 식사 속에서 행복을 느낄 줄 알고 가진 자들의 풍요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에서 풍요를 찾는다.
내가 만약 이 땅에 오지 않고 이 어린 목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을...
"근심하나 기뻐하며 가난하나 다른 이를 부요케 하는 자로다..."
서로 한주의 삶을 이야기하고 식사를 나누며 같이 찬양을 한다. 1년이 넘도록 변함없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 또한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면 같은 집에 셰어 생들과 나누게 된다. 내 것만 챙기기 바쁘던 나였다. 가진 것이 없는데 뭘 나눠주냐며 불평하고 가진 자들을 시기하고 부러워하던 나였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6:35]
사랑은 입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다. 강단 위에 올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외친다. 왜냐면 입이 빠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모습은 누군가의 뇌리 속에 각인되고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외된 자들과 함께 빵 한 조각을 나누는 자의 사랑이 더 오래간다. 그 사랑받은 자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배운 데로 전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옛날 나라렛 예수가 빵을 나누며 사랑을 실천했던 방법이다.
감사하다. 오늘도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서로의 삶을 나누며 일용할 양식을 같이 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