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은 도서관에 앉아 창밖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잔과 책을 읽는 호사를 누려본다. 도서관에서 반가운 책을 만났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책장에 꽂혀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 전자책으로 그녀의 단편들을 읽고 [공생가설] 서평을 적었다. 시간이 모자라 다 읽지 못했던 책을 종이책으로 마무리해본다.
책은 총 7편의 단편소설을 싣고 있다. 그중에서 [관내분실]이 <제2회 한국 과학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책의 제목으로 선정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가작 수상작이다. 그런데 왜 대상 수상작을 뒤쪽으로 배치했을까?
[관내분실] in Lidcombe
뭐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작품의 가치나 우선순위는 심사자 혹은 출판사 편집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도서관 데이터 분실?!
[관내분실]은 엄마의 실종이라는 사건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그런데 그 실종이라는 것이 죽은 사람의 생전 데이터의 실종이다. 제목은 말 그대로 도서관내 엄마의 데이터 분실이다. SF 소설은 소재와 배경의 신선하고도 황당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배경은 SF지만 그 속에는 부모와 자녀 간의 이해와 공감의 내용을 담고 있다.
미래의 도서관에는 '마인드'라는 죽은 사람들의 생전의 뇌의 정보를 저장해서 보관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VR( Virtual Reality)로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죽은 자를 추억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과학기술로 실현시켰다.
소설은 '지민'이라는 여자 주인공이 임신을 하게 되면서 엄마 '은하'의 '마인드'를 찾게 되고 도서관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머니의 '마인드'에 접속할 수 없다는 설명을 한다. 누군가가 그녀의 마인드에 접속할 수 있는 인덱스 지워버렸다. 실종된 죽은 엄마의 마인드를 복구하기 위해 그녀의 유품을 찾으면서 알게 되는 엄마의 과거 그리고 용서를 이야기한다.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
한 번쯤 이런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는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않아 부모 마음을 체감하진 못하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소설은 그 부분을 이야기하려 하는 듯하다.
주인공에게 엄마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산후우울증으로부터 시작된 엄마의 정신병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고 그 병은 딸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고 결국 서로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부모가 되면서 자신의 삶은 사라지고 내가 아닌 누군가의 부모로 살아가야 한다. 기존에 자신이 일구어 놓은 삶은 송두리째 바뀌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적지 않은 정신적인 충격과 도전에 봉착하게 된다. 소설은 엄마와 딸이라는 여자의 관점에서 서술되긴 했지만 이건 비단 여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자 또한 부모가 되기 전후 적지 않은 변화와 도전에 봉착하는 건 매한가지이다.
단지 여성=엄마=주양육자라는 연결고리로 인해 자신의 본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라는 두 가지를 모두 포기 혹은 양보해야 하는 현실이 우울증이라는 정신병으로 발현된다. 물론 남성 역시 본질적 자아를 포기하긴 하지만 가정의 생계를 위해 사회적 자아는 계속 이어가고 더 강화해 나가야만 한다. 이때 여성이 자신의 기존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 아니 포기하지 못하는 의지가 강하다면 그 의지가 자녀와 남편에게 의도치 않은 집착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녀와 남편으로 향한 잘못된 집착이 결국 가정을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대부분의 여성은 출산 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산후우울증을 겪으며 이 과정을 경험한다. 이때 기존의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회적 정체성을 자녀에게 투영하려고 한다.
한국 여성들의 자녀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관심(치맛바람)은 어쩌면 자신들이 지키고 이루지 못했던 사회적 정체성을 자녀에게 투영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자신이 임신을 하면서 인정받던 자신의 직장에서 자녀 출산과 양육에 대한 배려 차원의 업무 분장(단순 업무)이 그렇게 달갑지 않은 것은 자신 또한 과거 자신의 엄마가 자신을 출산하고 양육하기 위해 그녀가 꿈꾸던 일(출판)을 접어야만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본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
주인공은 과거 엄마 삶을 알게 되면서 엄마가 아닌 "김은하"라는 한 여자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도 지금 "송지민"과 태어날 아이의 엄마라는 두 정체성이 충돌하게 될 거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과거의 엄마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녀를 '마인드'를 복구하고 VR을 통해 재회한 그녀를 용서한다.
우리는 본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 두 가지를 가지고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과 학교 사회를 거치면서 본질적 자아보다는 사회적 자아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으며 본질적 자아는 잊고 사회적 동물로 변해간다. 학교와 사회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중요성만 강조해 왔고 결국 그것은 출세와 성공이 삶의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만들어 왔다.
그나마 사회적 자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면 그 곳에서 나름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자아까지 포기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지 모르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자아를 상실하고 우울증을 겪거나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들도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본질적 존재이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자신이 본질적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데 어찌 새로운 생명을 본질적 인간으로 양육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 성공과 출세만 강조한 나머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본질적 인간으로 보살피는 행위의 중요성을 너무 오랜 시간 간과해 온 것은 아닐까? 사회적 지위가 높고 고연봉의 전문직 여성이 자녀 낳고 돌보는 여성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인가? 신이 내린 여성의 원초적이고 생리적인 역할보다 인간이 만든 사회적 역할이 우선되어 버린 세상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여성들 스스로가 출산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상응하는 사회적 대우와 지원을 해야한다.
소설은 표면적으로 모녀간의 갈등을 자신이 부모가 되어가며 엄마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인간애를 표현한 것 같지만 그 속에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가끔씩 사회는 언론매체를 통해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며 사회 구성원을 생산하지 않는다며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듯한 비난을 쏟아낸다. 개인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라는 앞뒤가 바뀐 비상식적인 말을 통계적 수치를 들이대며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이제는 인간은 더 이상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 인간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희생해야 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과거 나라잃은 설움은 이제 국민잃은 설움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영화 '자산어보' (玆山魚譜)
"상놈도 없고, 양반도 없고, 임금도 신하도 없는 세상, 백성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희망한다"
- 영화 [자산어보] 중에서 -
얼마 전 본 영화 [자산어보]의 극 중 정약전의 대사가 떠오른다. 정약용의 명성에 묻혀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형은 '형만 한 아우 없다'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시대의 요구에 부합한 정약용의 생각과 업적은 그를 당대의 최고의 학자로 추켜세웠지만 그의 형인 정약전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위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년은 앞서간 그의 생각은 결국 속세를 떠나 유배의 삶을 살다 쓸쓸히 죽게 했다.
최근 불거진 LH 공무원의 부정 재산 축적 등의 소식들은 국민들을 분노케 한다. 과연 국가와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들의 피를 빨기 위해서 인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기업은 국민을 노동자로만 생각하고 국가는 국민을 세납자로만 생각한다. 더 싸고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고 더 많은 세금과 소비만 부추긴다. 이럴 거면 태초의 수렵인으로 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지구도 살고 인간 존엄도 되살아 날 것이다.
모녀간(부모 자녀간)의 갈등과 여성의 경력단절을 다룬 [관내분실]의 짧은 단편 소설 속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너무 확장 혹은 비약 (飛躍)해서 늘어놓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김초엽 작가가 나의 서평(독후감)을 읽으면 어떤 기분일까? 물론 내 글이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책을 읽어도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매력과 가능성 아니겠는가? 생각의 확장이 글을 만들어가는 경험이 내가 글을 쓰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여성의 사회적 경력 단절 문제를 SF 소설 속에 녹여낸 작가의 발상이 대단하다. 젊은 나이(93년생)에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인문 사회적인 문제와 접목시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녀의 상상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시스템 속에 자아를 분실하며 집착과 혐오로 가득찬 현대인은 이제 그 문제를 개인과 가족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봐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