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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10. 2021

욕망과 고통의 상관성

격리의 시간 속에서


락다운(Lock down) 격리에 시간 속에 화상(Zoom)으로 지인의 안부를 확인한다.


   바이러스의 공포 속에 사람들의 온기는 이제 공기 중이 아닌 랜선과 와이파이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살을 맞대고 음식을 나누는 것조차도 사치가 되어버리는 세상이 도래한 것인가?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공간은 이제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넘어가는 것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이 펜데믹이 종식될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우리는 이 바이러스와 공존하며 살아가야 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만남과 소통을 통한 공감은 이제 온라인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정신세계는 또 다른 큰 변화의 흐름 속에 바뀌어갈 것이다. 누군가는 이 변화가 달갑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런 변화에 발 빠르게 변화하여 새로운 부와 권력을 가져갈 것이다.


    처음엔 이런 비인간적인 변화가 빨리 종식되고 다시 과거의 일상으로의 복귀를 염원했지만 그건 바꿀 수 없는 현실을 푸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집착하기보다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현실 속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더 현명한 길임을 믿게 된다. 락다운이 이어지고 내가 집안에 갇혀 정부와 사회의 지침에 충실히 따른다고 펜데믹이 종식되진 않는다.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행동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법과 규율로만 모두 통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욕망도 바이러스도 사라지지 않는다.


위기는 기회?!


    나도 처음엔 코로나19가 퍼지고 락다운(Lock down)이 실시되며 사람들이 고통받고 힘들어할 때 나도 집안에 격리되어 힘든 생활 속에 그 고통을 같이 하고 공감하며 이 시기가 빨리 종식되기만을 기원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자기 계발서에서 얘기하듯 위기는 기회이다라는 말이 있다. 다른 이들의 위기와 고통은 또 다른 이들에게는 기회가 기쁨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언텍트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다른 이들의 고통과 불편을 좋게 얘기하면 해소, 나쁘게 말하면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했고 또 다른 새로운 신흥 부자들을 되었다.


    그들이 과연 다수의 고통을 공감하고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려는 예수나 부처 같은 마음에서 그런 비즈니스를 창안한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선의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황과 시기를 적절히 이용한 것이라고 본다.


비지니스 모델의 변화


    자본주의 세상에서 부를 축적하는 가장 기본 전제은 다수의 편의를 가져오고 불편을 해소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 팬데믹 시대에서는 그 기본 전제가 변화를 맞이했다. 편의의 증진과 불편의 해소보다는 안전의 확보와 공포의 회피를 위한 것들이 주류가 되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비즈니스인 것이다.


    판데믹 상황 속에서도 업무(일)를 하고 수업(학업)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든 화상회의 플랫폼이, 맛집을 갈 수 없는 상황이 딜리버리 플랫폼을, 발품 팔던 쇼핑의 즐거움을 클릭의 즐거움으로 바꾼 소셜 커머스 플랫폼,

격리의 무료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웹툰이나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이, 소통과 오락을 함께 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과 메타버스 플랫폼이, 집에서도 건강을 지키는 홈트레이닝 플랫폼이, 사람의 온기를 대신할 반려동물 케어를 위한 플랫폼이, 밀려난 여행과 서비스 소비를 투자로 바꾼 코인과 주식 플랫폼이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욕망을 실현시켜줄 백신 기업들까지 사람 간 언텍트(Untact) 비즈니스에 배팅한 자들이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닌 서로가 더욱 멀어지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이 돈을 버는 방식이 되었다. 물론 이런 비즈니스들이 우리를 바이러스로부터 당장의 안전은 보장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려되는 것은 지금 바뀌어버린 우리의 환경과 생활패턴이 만들어내는 우리의 정신세계가 또 어떤 다른 변화 혹은 재앙을 가져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인간 세상에서 발전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은 대부분 현재의 불편을 벗어나는데 집중할 뿐 그 불편을 벗어나면 다가올 또 다른 불편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까지 다 생각하면 돈을 벌 수 없다. 인간이 현재 봉착한 욕망의 해소를 위해 비즈니스는 움직이고 그 해소가 가져올 또 다른 욕망은 또 다른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해소하며 변화하는 비즈니스는 또 다른 욕망을 만들고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마치 우리의 욕망이 끝이 없는 것처럼.... 그 욕망도 끝이 없이 어딘가로 향한다.


돈과 욕망


  돈은 인간의 욕망을 대변한다. 욕망이 끝이 없듯이 돈도 끝이 없이 불어난다. 욕망이 돈을 벌고 또 벌게 하는 동시에 돈은 욕망에 의해 또다시 찍어내고 찍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 가진 자들이 부를 쌓는 방식이 돈을 더 벌어오는 것(대중으로부터)이었다면 지금은 돈을 더 찍어내게 하는 방식에 가깝다고 봐야겠다. 뿌리고 가져오고 뿌리고 가져오고 하는 방식이다. 마치 씨를 뿌리고 벼를 수확하는 느낌이다.


   뿌려진 돈은 가진 자들의 욕망을 채우는 동시에 가난자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는 영원히 써도 다 쓸 수도 없을 만큼의 부가 세상에 쌓여있다.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돈은 이제 미지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까지 쓰이기 시작한다. 가난한 자는 부의 낙수를 받아먹으며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는 동안 가진 자들은 새로운 세계로 그들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거시적 세계와 미시적 세계

 

  바이러스의 창궐과 지구의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이 해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지고 더 이상 지구에서의 삶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진 자들은 과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탐험하듯 새로운 세상의 탐험하고 구축하기 위해 우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돈을 우주개발에 쏟기 시작한다. 모자라면 더 찍어내면 된다. 일론 머스크가 우주 유인선을 만들고 세계의 거부 제프 베조스가 아마존의 CEO 자리를 내주고 우주개발에 올인하는 모습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한 또 다른 비즈니스 경쟁이 시작되었다.


  현실 세계의 암울함은 현실에 존재하는 시간을 고통받게 한다. 현실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우울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우리는 헤드셋으로 귀를 막고 VR고글로 눈을 가리고 심지어 손과 발을 무언가에 묶인 채 나노 반도체 속의 무한한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먹고 마시고 호흡하는 것만 현실세계에 의존할 뿐 모든 감각은 반도체 칩이 만들어낸 세상 속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게 된다.


[가진 자는 오프라인에서 못 가진 자는 온라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책에서 -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문구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건 왜일까? 가진 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오프라인 세계를 개척하는 동시에 다수의 인간들이 머무를 온라인 세계(메타버스)를 동시에 구축하고 있다.

엘리시움 (Elysium) 중에서

[하나의 인류, 두 개의 세상 버려진 '지구'와 선택받은 1% 세상]

                                         - 영화 엘리시움 중에서 -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엘리시움"을 기억한다. 디테일에서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향해가는 방향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진 자들은 이제 좁혀질 수 없는 빈부의 간극을 공간적인 분리로서 해결하려 한다. 같은 공간 속에서는 공멸로 간다는 것을 알기에 격리를 통해 시간을 벌고 분리를 실현하는 것은 아닐까?

현재 세계 각국의 대표들은 지구에서의 공존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기후협약을 통해 지구의 온난화를 늦추고 팬데믹 종식을 위해 국경을 차단하고 바이러스 전파를 막고 백신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악화를 늦출 수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


욕망을 줄일 수 있어도 없앨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만들어낸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지금의 생체 바이러스로 인해 누군가는 고통받지만 누군가는 이 상황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고 있다는 것이 세상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신을 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 행복을 느낀다. 가진 자들은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 행복을 느끼는데 익숙하고 능숙하다. 못 가진 자는 욕망을 채우는 방법에 낯설고 미숙하기에 행복보다 고통의 비중이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부에 미숙한 자신의 모습을 책망하며 더 큰 고통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재산을 늘리는 것보다 욕망을 줄이는 것이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

                                                                                    - 아리스토텔레스 -


   부유하진 않아도 풍요한 모습을 가진 자들이 있다. 그들은 욕망을 줄이는데 익숙한 자들이다. 다행히 행복에는 빈부가 없다. 어찌 보면 안타까운 모습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부와 행복을 같이 누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부 또한 행복으로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부로 가기 위한 불행(희생)은 또 다른 불행만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위대한 성인들이 욕망을 없애는 수련을 한 것은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

제8일의 밤

   [우리는 욕망에 사로잡혀 지나간 것을 떠올리며 잊지 못해 슬퍼하는 번뇌(煩惱)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번민(煩悶) 속에 고통받는다.]

                                                                                      - [제일의 밤] 중에서 -


  누군가의 욕망은 누군가의 고통이 되고 고통은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온다. 그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욕망과 고통은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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