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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06. 2021

베이스캠프와 대피소

[인생의 원점] 김영하

  우리는 베이스캠프(원점)에서 시작해서 베이스캠프로 돌아와야 한다.


   마치 한 편의 멜로 블랙 코미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탄탄한 구성과 반전까지 갖춘 단편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자주 영화화되곤 한다. 그의 치밀한 스토리 구성과 예상을 뒤엎는 반전 등의 요소들이 그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을 쓰는 사람마다 각자의 색갈이 있겠지만 소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건 , 사고 등 줄거리 전개가 빠른 스토리 위주의 소설과 대화와 묘사가 많이 가미된 마치 그림 혹은 영상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 두 가지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는 모두 포함되지만 작가의 성향에 따라 그 비중이 달라진다.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잘 섞으면 희곡도 시나리오로의 전환도 쉬워진다.

  

    스토리 위주의 소설은 감독의 연출력이 관건이지만 묘사와 대화가 많은 소설은 감독의 연출력이 떨어져도 영화나 연극의 완성도를 올릴 수 있다. 소설 속 묘사와 대사를 그대로 가져다 쓰면 되기 때문이다.  제일 좋은 건 원작자가 연출에서 감독까지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면 금상첨화이다. 봉준호 감독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가지만 잘하기도 힘든 영역을 모두 잘 해내었기에 아카데미 4관왕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의 원점]은 후자의 요소들이 잘 가미되어 있어 단편소설이지만 마치 단편영화를 보는 듯한 생동감이 살아있는 것 같다.


     결혼한 여자(인하)와 불륜에 빠진 남성(서진)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을 함께 자라온 그 여자는 남자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존재이고 남자는 힘든 결혼 생활에 지친 그녀가 잠시 쉬어가는 대피소 같은 존재이다.


   남녀는 서로를 갈구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쳐 숨은 대피소에서만 사랑을 나누는 관계이다. 남편의 구타와 폭언에 결국 그녀는 남편을 살해하고 살인 현장에 그를 끌어들인다. 그런데 남편이 아직 살아있다. 더군다나 남편은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여자는 남자가 사건을 수습하고 자신을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구원해주길 바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여자에게 112와 119를 동시에 부르고 자수를 권유한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 목숨도 내놓은 그런 러브스토리는 이제 식상하다. 남자는 여자에게 나중을 기약하며 사건 현장을 혼자 빠져나온다. 그리고 얼마 뒤 여자의 투신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슬픔에 찬 남자는 여자의 복수를 준비하며 그녀의 남편을 기다리던 장소에서 뜻밖의 다른 복병이 그 남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복병의 남성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이름을 외치며 울부짖는다. 결국 남편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원점과 달리 대피소는 눈물 나게 고마울지는 몰라도 언제든지 새로 만날 수 있다]

                                                                                              - 글 중 인용문 -


     베이스캠프(원점)는 하나지만 대피소는 많다. 자에게 베이스캠프는 떠나고 싶은 곳이지만 남자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다. 둘 다 맞다. 베이스캠프는 떠나야 하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 곳이다. 누군가는 베이스캠프에서 안정감을 얻고 행복을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여러 대피소를 찾아다니며 그 속에서 안도감 찾고 행복을 느낀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내가 베이스캠프처럼 돌아가야 할 곳이라 생각했던 장소나 사람들은 나에게 대피소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있었기에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고 다시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난의 길에서 만난 인연이 오래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소설은 베이스캠프(원점)와 대피소를 남녀 관계에 비유해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언뜻 생각하면 베이스캠프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는 대피소의 소중함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삶이라는 머나먼 여정의 길 위에 원점은 처음과 마지막이다. 삶의 과정은 여정의 길 위에서 만들어진다. 그 험난한 길 위에서 쌓인 여정의 피로와 고통을 풀어줄 대피소를 만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그 대피소에서 새로운 동반자를 만날 수도 있고 삶의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며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과 공간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래야 다시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응급실을 나온 그는.... (중략)  이 순간이 인생의 새로운 원점이라고 생각하면서.]

                                                                                                       - 글 중 인용문 -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남자는 새로운 베이스캠프를 찾았다며 식물인간 남편이 누워있는 응급실을 힘차게 걸어 나온다. 영원할 것 같던 베이스캠프(사랑한 여자)도 결국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바뀌어 버렸다. 베이스캠프라고 생각했던 그곳은 사실 그에게도 대피소였다. 단지 오래 머물렀기에 베이스캠프라 착각한 것뿐이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의 컨트롤센터처럼 베이스캠프도 옮겨 다닌다. 과거 수렵인들이나 대륙의 유목민들의 베이스캠프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머무는 곳이 베이스캠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이동하고 새로운 곳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베이스캠프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새로운 베이스캠프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 좋고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우린 다시 베이스캠프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고 대피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대피소는 어디인가?

인생의 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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