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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02. 2021

바이러스의 기원

[스위트홈]을 보고 나서

바이러스는 어디서 오는가?


   요즘 같은 시국에 한 번쯤은 궁금해할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장장 10부작의 드라마를 보고 처음 떠오른 문구이다. 호주 시드니의 기나긴 락다운(Lock down) 기간동안 오랜만에 드라마 정주행을 해본다. 락다운 기간 집안에 갇혀있던 친구가 넷플릭스($19/월)를 구독했단다. 덕분에 계정을 하나 빌렸다. 독서를 하려던 계획이 넷플릭스 감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보겠냐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정말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콘텐츠 홍수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스위트 홈

   뭘 봐야하지 한참을 넷플릭스 화면을 스크롤하다. 눈에 들어온 건 [스위트홈]이었다. 공포스릴러을 좋아하는 나는 이전에 봤던 [킹덤]이 생각나서 또 다른 한국 공포물에 대한 기대 때문에 장장 10부작 드라마의 정주행을 시작했다. 


   드라마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나에게 긴장감 있는 몰입감을 가져왔다. 긴장감 있고 신선한 스토리와 뛰어난 CG(Computer Graphics)효과에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삼박자가 잘 어우러진 것 같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주인공 현수라는 왕따 학생이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지고 그 바이러스는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방식으로 퍼져나간다. 아파트에 갇힌 주민들은 그 속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그 생사의 기로에 선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그린다. 


   최근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바이러스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증폭했다. 바이러스가 다른 질병보다 무서운 건 전염되기 때문이다. 혼자 죽는 건 상관할 바 아닌데 같이 죽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공기 중 혹은 접촉을 통한 강한 전염력은 사람들을 공포로 떨게 만든다. 문제는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해 사람간 접촉을 차단하면 또 다른 병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인간(人間) 은 본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한다. 그 말인 즉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어울려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그것을 차단함으로써 인간과 인간은 급속히 멀어지게 된다. 본격적인 언텍트 시대의 시작이다. 고립감과 우울함이 찾아온다. 인간은 좌절하지만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 인간들은 공기 중이 아닌 데이터라는 가상공간으로 모여든다. 가상의 온라인 공간에서 상대방의 음성과 영상을 공유하며 온기를 대신한다. 


욕망이 바이러스를 만든다


   드라마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이러스의 기원이다. 우리는 바이러스가 동물들로부터 오거나 아니면 최근 이슈가 되는 인간의 유전자 조작 등의 원인으로 생각한다. 만약 이 드라마가 여타 좀비 혹은 재난 영화처럼 접촉으로 인한 전염 혹은 공기 중으로 전염이라는 주제로 만들어졌다면 식상한 스토리가 될 수도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는 바이러스의 기원을 인간의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이거나 명확한 근거가 나타나지 않은 점이 좀 아쉽긴 하지만 마지막에 후속 편을 예고한 걸 보면 이후 그것에 대한 기원까지도 다루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소외받은 착한 괴물


   인간들은 자신이 감추고 있던 욕망에 의해 하나둘씩 괴물로 변해간다. 이상한 건 그 괴물들 중에서 인간을 해치지 않는 괴물도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을 돕고 그들의 편에 서서 다른 괴물들과 싸우는 괴물이다. 괴물 세상도 인간 세상과 마찬가지이다. 삭막하고 냉혹한 세상에도 비록 소수이지만 따뜻한 인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괴물 중에도 그런 괴물이 존재한다. 주인공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학교에서의 괴롭힘 그리고 가족들로부터 소외로 인한 상처 받은 아이이다. 


   상처 받은 마음이 분노로 바뀔 수도 있지만 그는 분노가 아닌 방식으로 그것을 타인에게 되돌려 준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파트 주민들로 받은 작은 사랑의 손길 때문이었다. 선과 악의 가운데서 고민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받고 외면받은 인간도 사랑으로 위대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바이러스의 기원


   우리는 바이러스가 어디서 왔을까에 대해 궁금해하며 역학조사나 과학적 분석을 통해 찾아내려 한다. 그 기원이 가축으로부터 왔건 아니면 환경오염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인간이 직접 만들어내었건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생각지 못한다. 가축도 인간의 육식과 필요에 의해 길들어진 것이며 신속한 대량 생산을 위해 그들에게 가해진 인간들의 행동은 생명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도 부여하지 못했다. 우리는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말하면서 동물이 받는 스트레스가 병을 만들꺼란 생각은 하지 못할까? 가축이 인간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바이러스로 되갚아주는 것일 수도 있다. 환경오염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류의 번영을 위한 산업발전이 가져온 기후변화는 인간이 지구에게 준 스트레스에 대한 대가이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이제 인간에게 향하기에 이른다. 제한된 지구의 자원과 물질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된다. 더 가지고 더 올라가기 위해선 이제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선 타인의 욕망을 죽이거나 잠재워야만 한다. 내가 선방 치지 않으면 뺏길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생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심해진다. 


    드라마 속의 슈퍼마켓 사장도 그 모습과 닮아있다. 재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생필품이다. 그 생필품을 움켜쥐고 뺏기지 않으려는 모습이 우리의 욕망을 대변한다. 같이 죽기 보단 혼자 살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은 다른 이를 죽이는 걸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대중에게 소수의 희생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선동한다. 다행히도 바이러스의 기원을 알 수 없기에 주민들은 결국 자신도 그 소수가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한다. 


바이러스가 무기이다.


   과거 인간은 더 저렴하고 효과적으로 인간을 살육하기 위해 바이러스(생화학무기)를 이용해 왔다. 출처도 알 수 없게 뿌려진 바이러스가 사실 엄청난 화력의 지닌 전쟁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무기를 이용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왜냐?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건 가장 최후의 선택이다. 아직까진 내가 살고 네가 죽어야 하는 단계이다. 지금은 생물에게 작용하는 바이러스와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킨다. 승부의 관건은 누가 더 치밀하고 정교한 바이러스를 만들어내는가이다.  요즘 유전자 편집기술과 코딩 기술(컴퓨터 프로그래밍)이 대세로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경에는 태초에 우리에게 내려진 원죄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 얘기한다. 물질과 정신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아담과 하와)은 결국 신에게 버림받고 원죄를 짊어지고 땅 위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대홍수를 내리고 예수를 보내시어 그 욕망의 헛됨을 깨닫게 하고자 하였으나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더 큰 욕망의 인간만 만들어내는 길을 걸어간다.

스위트 홈 중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복음 15:13]


   드라마는 마치 인간의 욕망이 결국 인간을 파멸로 몰아간다는 성경 속 진리를 얘기하는 듯하다. 드라마 중간중간에 성경 속 말씀이 나타난다.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사람 속에서는 불신만 쌓여가고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을 보며 믿음이 싹트기 시작한다. 


"상대방이 그러지 않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며칠 전 셰어생과 같이한 식사자리에서 나눈 대화 중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만을 기다리고만 있다. 모두가 그러하기에 희생과 베품은 시작되지 않는다. 변화의 시작은 타인이 아닌 나로부터이다. 그것을 "왜?"라고 되묻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 현실이 안타깝다. 처음 셰어하우스에 들어왔을 때 기억이 난다. 아무도 음식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 처음 내가 음식을 준비하고 다 같이 불러 모은 자리는 어색했다. 지금은 서로가 음식을 준비하고 같이 나눈다. 우리는 마치 모두가 예수나 부처 같은 희생의 아이콘이 다시 재림하여 세상을 구원하길 기다리는 모습이다. 바라고 기다리지 말고 너와 내가 예수나 부처가 되려 노력하면 세상은 이와 같이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에서는 생사의 기로에 선 인간들의 욕망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치 지금 펜데믹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기도 하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로 고통받는 이 상황 속에서도 인간들의 욕망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자산 시장(주식과 부동산)은 들썩거리며 치솟는다. 누군가에겐 생사(死)의 순간이 누군가에겐 부를 쌓은 순간이다. 욕망이 들끓으니 바이러스도 들끓는다. 욕망과 바이러스는 함께 한다.


  바이러스는 결국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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