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는 것을 느끼고 보지 못하는 건 느끼지 못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보는 게 보는 것이 아니고 보지 못하는 게 사실은 보이는 거예요"
- 영화 [지상의 별처럼] 중에서 -
영화 속 주인공인 꼬마 아이 이샨의 대답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현혹되어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진다. 오랜만에 가슴 찡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인도 영화를 보고 나면 후회가 없다. 흡입력 있는 스토리와 곳곳에 숨어든 유머와 그 속에서 사무치 듯한 감동과 함께 던져주는 시사성 있는 내용 인상적이다.
믿고 보는 인도영화
"아미르 칸" 이젠 나도 믿고 보는 배우가 되었다. 처음 본 그의 첫 영화는 [PK 별에서 온 얼간이]였다. 그의 대표작인 [세 얼간이]에서도 등장하지만 그는 얼간이(idiot)라는 순수한 존재를 영화 속에서 잘 활용하는 것 같다. 모순으로 가득 찬 인간 세상을 순수한 존재가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우리의 오염된 내면을 바라보게 한다. 영화는 신을 이용해 인간들을 농락하는 타락한 종교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다음 영화는 [당갈]이었다. 레슬링이란 스포츠를 통해 여성차별이 만연한 인도 사회에서 여성 인권에 대해 깊이 있는 자각을 일으킨 영화이다. 우리에게는 뭐 크게 대수롭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도라는 나라의 특성상 파격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왼쪽 부터 [pk 별에서 온 얼간이], [세 얼간이], [당갈]
[지상의 별처럼](원제 : Like Stars on Earth, 2007)은 교육에 관한 내용이다. 인도의 교육열은 한국 못지않다. 이곳 호주 사회에서도 인도 사람들의 자식 교육은 한인이나 중국인들을 능가할 정도로 유별나다. 이곳의 인도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에게는 아직까지도 땀 흘리는 육체노동은 수드라(천민계급) 혹은 불가촉천민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인도인들은 대부분 캐셔(계산원), 운수(배달, 우버) 아니면 금융, 회계 쪽 일들을 많이 한다. 건축현장이나 땀 흘리는 노동현장에서 그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육체노동을 하는 인도인들은 아마 이곳 호주로 올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아직까지 비공식적으로 남아있는 신분과 계급을 지키고 혹은 올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공부이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은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공부만이 전부가 되어 버렸다.
주인공 '이샨'은 난독증을 앓고 있는 아이이다. 이샨은 난독증으로 인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아이로 낙인찍는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가지지 않은 세상을 보는 다른 눈과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 능력을 그림 속에서 발현한다. 경쟁과 공부만 강요하는 환경 속에서 그가 가진 무한한 상상력은 무참히 짓밟히고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여기저기 나 있는 수많은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나의 세상을 발견하네"
- 영화 [지상의 별처럼] 노래 가사 중에서 -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우리는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면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교과서와 교사의 머리에 있는 것을 얼마나 많이 카피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냥 교사의 뇌를 스캔해서 옮기면 될듯하다. 학창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베끼고 외우고 기억하는데 쓰는데 어찌 새롭고 창의적인 사람을 만들겠는가? 우리의 교육은 아이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어른들의 편의를 위한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배우는 자를 위한 교육이 아닌 가르치는 자를 위한 교육이 되어버린 현실은 학교가 마치 공장이 되어버린 것과 같다.
"그래서 그게 뭐가 도움이 된단 말이오? 내가 그 애를 언제까지 계속 먹여 살린 순 없지 않소 저래서 어떻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소"
- [지상의 별처럼] 중에서 -
영화에서 이샨의 아버지가 주인공 교사 '니쿰'에게 따지듯이 말한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같은 모양이다. 자식이 못되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아이가 잘되게 하는 방법이 경쟁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전사로 키우는 것인가? 싸워이기는 법만 배운 아이들이 만들어갈 세상은 지금보다 더 삭막해질 뿐이다. 세상을 전쟁터로 가르치는 어른들이 겉으론 세계 평화를 이야기한다.
그들이 말하는 교육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건 애초에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바람과 욕망을 자녀들에게 투영시킨 것이다. 수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삶이 아닌 부모와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먼저 가르친 탓에 아이들은 세상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알아갈 기회를 모두 잃어버렸다. 푸른 싹이 나자마자 노랗게 변해버린 것은 양분이라고 생각했던 어른들의 말과 행동이 사실은 독약이었던 것이다.
나는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라는 본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의 선한 본성을 교육을 통해 끌어내어야 하지 않을까. 억압과 경쟁 속에서 자라온 아이들은 선한 본성보다 악한 본성을 더 많이 발현될 수밖에 없다. 악을 잠재우고 선을 이끌어내는 가르침, 그것이 교육의 본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세상의 모든 지식은 내 손안의 스마트폰에서 모두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지식을 쌓는 교육을 멈추고 널려있는 지식을 서로 연결하고 새로운 생각과 가치를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천편일률적인 가르침은 똑같은 붕어빵만 만들 뿐이다.
교육 본질의 변화
우리의 교육은 지덕체(智德體)의 고양을 지향한다. 사실 이건 표면적인 목표이고 대부분 교육을 통해 성공의 길을 가는 것이 실질적인 목적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지식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공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개념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이제 지식은 언제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 공공재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교사의 지식보다 구글과 유튜브가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제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의 역할을 벗어나야 한다.
앞으로의 학교 교육은 학생들이 자아와 소명을 찾고 선함을 배우고 실천하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철학과 교양 없이 지식만 쌓은 전문가들이 사회와 국가를 병들게 만드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바뀌었기 때문에 지식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해치고 이용하는 도구로 전락되어 버린다.
Like stars on earth
아이들이 살아갈 다음 세상은 피 터지는 전쟁터가 아닌 웃음과 활기가 넘치는 놀이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또 다신 전쟁터를 물려줄 것인가? 우리가 과거에 보고 듣고 느낀 데로 가르치는 것은 무의식 중에 아이들에게 자신의 피해의식을 전해주는 것일 뿐이다. 다시 동심의 그때로 돌아가 자신을 바라보듯 아이들을 바라봐야 한다. 그럼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의 동심을 파괴하고 욕심만 심어주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