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을 보고 난 후 그 여운이 오래 남는다. 며칠 전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나서 피어오르는 감흥에 바로 썼던 관련 에세이(죽음 앞에서 진실하다)가 조회수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세간에 이 드라마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넷플릭스 1위 (전 세계 2위)를 차지했다는 뉴스까지 접했다.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고 독특한 소재 속에 함축적으로 잘 그려낸 것이 전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영화 [기생충](리뷰 참조) 이후 또 한 번의 한국 이야기의 신드롬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나도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오징어 게임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부산에서 자랐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이 게임을 "오징어 달구지"라고 불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 학교 운동장 바닥에 그렸던 이 모양이 오징어 모양이라서 오징어라는 명칭이 붙었다. 극 중에서 오징어의 허리를 통과하고 나서 외치는 '암행어사'는 우리 동네에서는 '달구지'라고 불렀던 것 같다. 달구지는 세모와 네모 사이를 가르는 '다리'를 경상도 방언으로 달구지라고 불렀기에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서는 오징어 달구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문득 이 오징어 게임의 규칙이 궁금해 다시 찾아본 후 게임의 문양과 규칙이 사뭇 인간사와 너무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떠오르는 상념들을 적어 볼까 한다.
네모 세모 그리고 동그라미 - [오징어 게임] 중에서 -
동그라미
드라마 속 주인공 '기훈'은 이 시대의 백수 혹은 잉여인간의 전형적인 유형이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가정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그런 류의 하류 인생으로 비친다. 하지만 그는 둥글둥글한 성격을 지녔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하며 적어도 우리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성과 타인에 대한 예의는 갖추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바른 인성과 예의를 가진 인간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드라마 중반부에 오징어 게임의 숙소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자신과 동료를 적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야간 보초를 서고 있을때바닥에 퍼지는 체류탄 가스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는 노동자였다. 그는 회사에서 시키는 데로 열심히 살았을 뿐이었다. 그게 국가와 기업이 원하고 바라는 이 시대의 시민이자 노동자의 올바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동자는 기업가 혹은 정치인의 잘못과 그릇된 생각 혹은 음모로 인해 한 순간에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가정에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다. 법인(회사)이야 죽이고 다시 살릴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기훈' [오징어 게임] 중에서
우리 사회에는 그런 둥글둥글, 허허실실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대부분은 피고용인으로 누군가의 요구에 의한 육체적 혹은 정신적 노동을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 대가를 받고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들은 원천징수로 국가에 한 푼의 체납 없이 꼬박꼬박 세금을 납부하는 성실하고 올바른 인간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일자리를 잃고 기업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면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기업에서 쫓겨난 인간은 왜 국가와 가정으로부터까지 그렇게 철저하게 외면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기업이기 때문이다. 잉여생산물을 만들고 그것을 자본화시키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겨난 자본은 금융을 통해 부풀려지며 그 규모를 증식해 나간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꽃은 바로 기업인 것이다. 기업이 국가와 국민을 먹여 살리는 구조이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이 없다면 기업 또한 존속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 가지가 항상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화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바른생활'이라는 과목을 기억하는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이 과목이 있었다.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도덕에서 윤리로 사회에 나와선 인문학으로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과목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똑같았다.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상한 건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바른생활'에 따라서 둥글둥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난을 면치 못하고 세상의 푸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학교에서는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면서 정작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이라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은 나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행동을 늘 내가 통제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게 진실이다" - [인간 본성의 법칙] 중에서 -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가 통제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교육받은데로 말하고 행동하며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바른생활, 도덕, 윤리 그리고 인문학은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학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편법과 불공정이 만연한 세상이 옳고 그름의 가치관까지 바꿔놓는다.
깨끗함은 절대 더러움을 이길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때가 묻고 먼지가 쌓이는 것은 세상의 진리이다. 가진 자들은 그 진리를 빨리 깨달았기 때문일까? 남들보다 빨리 더러워지고 남겨진 자들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바른생활을 권장한다.
승자독식이란 말처럼 가진 자들이 먼저 장악한 더러운 세상에 뒤늦게라도 올라타는 사람은 근근이 밥이라도 먹고살지만 그들이 만든 인성 교육에 사로잡혀 한결같이 살아가는 인간들은 잉여인간으로 전락하고 현실은 지옥이 되어 목을 죄어온다.
세모와 네모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말이 틀리진 않다. 하지만 모가 나도 정만 피하면 된다는 말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얘기했듯이 정 맞고 둥글둥글해지면 결국 백수나 잉여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은 대부분 모난 사람들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아마존의 CEO 제프 베조스 등 우리가 말하는 세계의 유명한 재벌들의 성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얼마나 모가 난 인물인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그런 편향적이고 광적인 성향이 그들에게 그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것이다. 그들에게도 수많은 역경의 과정들이 있었을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다. 하지만 분명 그들은 그들의 모난 부분을 때론 감추고 때론 날아오는 정을 피하면서 자신의 모난 부분을 더욱 날카롭게 갈고닦았을 것이다. 더 이상 정을 칠 수 있는 놈들이 없어질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삼각형(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자리 잡았다.
오징어 게임의 가장 바닥에는 동그라미가 있다. 그 위에 네모가 있고 그 위에 세모가 위치해 있다. 밑바닥은 둥글둥글한 인간들이 중간에는 아직 피라미드 정상에 오르지 못한 모가 난 인간들이 버티고 있다. 거기서 정을 피하고 올라간 인간들은 세모에 안착해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리는 구조이다. 게임이 너무도 인간 세상과 닮아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제일 위에 동그라미
그럼 누군가가 물을 것이다. 세모 위에 동그라미는 무엇인가?라고 나도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우리는 처음 제일 위에 동그라미에서 게임을 시작한다. 제일 위 동그라미에서 출발한 인간은 밑바닥 동그라미로 내려가 네모진 인간과 세모진 인간들을 뚫고 다시 제일 꼭대기의 동그라미로 올라가야 한다. 최종적으로 세모와 제일 위의 동그라미가 교차하는 부분을 발로 밟는 순간 "만세"를 외치며 게임이 종료된다. 그건 인간 세상의 종말 혹은 인류의 재탄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제일 위의 영역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신의 영역인 것이다. 세모는 항상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 그게 세모가 동그라미를 찌르고 있는 형상인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전 과정은 신이 만든 인간이 밑바닥으로 내려가 다시 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모습을 하고 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 [오징어 게임] 중에서 -
마치 신이 만든 인간인 예수나 석가모니가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과거 성인들의 삶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항상 낮은 곳에서 대중과 함께 하며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갖은 핍박과 억압을 이겨내고 그들을 이끌고 신의 영역으로 가고자 하였다. 그 과정 속에서 돈과 권력에 현혹된 동그란 인간들의 배신까지 감수해야 했다. 고난과 역경의 과정 속에 신에게 다가가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보다 돈과 권력의 유혹으로 속세의 부귀영화를 선택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예수나 붓다처럼 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것은 위대하고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가운데 두 개의 동그라미
그럼 가운데 두 개의 동그라마와 세모와 네모를 가르는 다리는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해봐도 무슨 의미일까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후에 그 모습이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대중을 이끌고 그곳을 지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홍해를 가름으로서 왕이 아닌 신의 뜻을 받든 암행어사가 된 것이다. 이건 아마도 네모와 세모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갖은 억압과 유혹을 뿌리치고 성장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세모와 네모 이어진 끈을 잘라내는 의미도 내포하는 것 같다. 한 몸이었던 세모와 네모를 잘라 놓음으로써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과 피로 여기에 살아남았다" - [오징어 게임] 중에서 -
동그라미에서 네모와 세모로...
오징어 게임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부분 그들도 처음에는 둥글한 모습을 태어났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이리저리 깎이면서 모난 인간으로 변해간다. 그들은 신의 말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고, 돈을 위해 여자와 동료를 배신하고, 알면서도 죽이기 위해 감추고, 타인의 죽음을 돈벌이로 일삼는다.
결국 대부분이 돈의 유혹에 넘어가 타인을 괴롭히고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 속에서도 기훈, 새벽, 알리, 지영 같은 선한 본성으로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인간들도 나타난다. 하지만 횡재 아니면 죽음이라는 양극단의 선택 속에서 그 누구도 타인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면서" - [오징어 게임] 중에서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복음 15:13] -
그럼 의미에서 보면 스스로 친구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 "지영"의 모습이 가슴속에 가장 애잔하게 남는다. 주인공인 '기훈' 조차도 노인과의 구슬 게임에서 죽음 앞에서 비열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고통스러워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 또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자살이 만연하는 세상에 스스로 의미 없이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늘어가지만 내가 죽음으로서 다른 이를 살리게 하는 죽음은 흔치 않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그 옛날 나라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서 만인을 구원하고자 했던 사랑이다.
Fly me to the moon - [오징어 게임] 중에서 -
Fly me to the moon
[오징어 게임] 중에서 가면을 쓴 게임 관리자 이병헌의 방에서 울려 퍼지는 이 노래가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신세기 에반게리온 '1995]에서 처음 들은 후 이 노래만 들으면 왠지 마음속에 평안함이 찾아든다. 왜 이 노래가 극 중에서 울려 퍼졌을까?
얼마 전 추석 밤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뜬 걸 보았다. 우리는 둥근 보름달을 보면 마음에 평안이 깃든다. 그건 아마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아직까지 둥글둥글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난 세상에 둥근 달처럼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지만 쉽지 않기에 가야 할 길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