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부어버린다. 그릇은 비워졌는가? 아니면 채워졌는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할 것이다. 물은 비워졌지만 그 안에 공기가 채워졌다. 비워냄은 또 다른 채워짐을 의미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준으로 채워짐과 비워짐을 얘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망각하며 살아간다. 안타깝지만 인간이 가진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중에서도 시각의 의존도가 80% 이상이라고 한다. 그만큼 눈에 의존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시각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른 감각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충격과 불편이 찾아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시각 없이 다른 감각들로 세상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비구(승려)들은 수행의 많은 시간을 눈을 감고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고자 한다. 그건 아마 시각을 통해 들어오는 유혹과 정보의 오류를 배제하고 사물과 세상의 본질을 깨닫고자 함일 것이다. [붓다처럼] 8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전기소설을 며칠 동안 스치듯이 읽고 들으며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었다. 과거 성인들이 걸어온 길은 만인을 위한 고통과 수행의 길이었다는 것을 싯다르타(붓다 佛陀: 깨달은 자)의 일대기를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야기는 석가 왕족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가 왕족의 신분을 벗고 수행의 길로 들어가면서 네란 자라 강기슭에서 불가촉천민인 물소치는 어린 소년 스바스티와의 만남으로 전개된다. 그 후로 45년이 흘렀다.책의 마지막 부분 또한 스바스티의 모습으로 귀결된다. 스바스티는 싯다르타가 열반(죽음)에 들고 난 후 그가 싯다르타를 처음 만났던 그 강기슭에 서서 물소를 치는 목동들을 바라본다. 한낮 물소 치는 천민이었던 스바스티와 왕족이었던 싯다르타는 같은 수행자의 길을 걸어왔고 그도 지금 다시 물소 치는 목동들에게 과거 자신이 얻은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전하려 한다. 붓다는 죽어도 다시 살아 다른 누군가에게 깨달음을 전하고 또 다른 붓다를 탄생시킬 것이다.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
처음에 얘기했던 것처럼 만물은 사라짐이 없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부처의 가르침 또한 부처가 사라졌지만 이 순간에도 세상에 남아 누군가가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전달되고 이어지고 있다. 눈으로만 보려 하기에 사라짐과 비워짐을 두려워한다.
코로나19로 무료한 격리의 시간이 이어지는 순간 계좌의 잔고는 줄어들고 일하지 못해 벌지 못하는 돈이 나에게 빈곤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하며 걱정한다. 가진 것이 줄어들고 비워짐이 두려워 견지디 못한다. 따뜻한 햇살 아래 인적드문 한적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나무와 강과 하늘을 바라보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비워진 계좌의 잔고와 쓰고 먹고 사라진 것들 대신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 그리고 신선한 공기로 나를 채우고 있다. 비워져야만 다른 것이 채워진다. 눈에 보이는 것을 채우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채울 시공간이 없다.
집 안에 있으면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다. 집 안에 채워진 온갖 물건들이 나의 시선을 유혹한다. 책상 위의 컴퓨터와 핸드폰이 각종 볼거리로 시각과 청각을 유혹하고 따뜻한 침대 위 이불이 촉각을 유혹하고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미각을 유혹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 존 스튜어트 밀 -
비구들이 두벌의 가사(袈裟: 승려의 의복)와 하나의 발우(鉢盂: 공양 그릇)만 가지고 매일 탁발(托鉢: 동냥하는 일)을 하며 하루 한 끼로 살아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가진게 없으면 강도나 도둑을 만나도 뺏기거나 지킬 것이 없기에 두려움이 없다. 뱃속을 채우면 머리가 멍해지지만 뱃속을 비우면 머리가 맑아진다. 뱃속에 채워진 음식은 에너지원이지만 채워진 음식물은 소화를 위해 에너지를 소모한다. 머리로 가야 할 혈류량이 뱃속으로 몰려 산소 부족으로 뇌사상태로 빠져들고 졸음이 밀려오는 것이다. 비구들은 비워짐을 통해 더 많은 깨달음을 받아들인다. 질량을 가진 것들로 채워진 공간은 질량이 없는 것을 채울 수 없게 만든다.
존재함이란...
다시 그릇을 바라보자. 우리는 그릇을 통해 비움과 채움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릇은 비어있기도 하면서 차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릇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비움과 채움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릇이라는 존재는 실제 하는가? 그릇에 물은 비워냈지만 사실 그릇은 아직 물을 가지고 있다. 그릇은 물과 흙이 섞여 반죽되었고 불이 공기를 만나서 나무를 태우며 열을 내어 만들어졌다. 나무 또한 태양의 빛과 빗물과 흙이 만들어 낸 존재이다. 그릇의 근원은 무수히 많은 곳에서부터 온 것이다. 그 근원을 다 돌려주고 나면 그릇의 존재는 없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작용한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 만물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 속에 저것이, 저것 속에 이것이 존재하며 공존한다. 인간 또한 내가 있기에 네가 있는 것이고 네가 있어 내가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홀로 살아가갈 수 없는 것이다.
돌고 도는 세상
만물이 자신의 성질을 지니고 형태만 바뀌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이 내뿜는 에너지 또한 사라지지 않고 전달된다. 화는 화를 부른다는 말이 있다. 내가 뿜어낸 화는 사라질 수 없다. 화를 품고 있을 순 있어도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처럼 화 또한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또 전달될 것이다. 부처에서 시작한 가르침이 너와 나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가듯 화도 그렇게 퍼져나간다. 선함은 선함으로 악함은 악함으로 돌고 돌며 순환하는 것이다. 보통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들 얘기한다. 눈으로만 보기에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산에서 바다로 흘러내려간 물은 태양의 복사열로 수증기의 형태로 바뀌어 다시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가 되어 내려온다. 결국 물은 위아래로 모두 흐른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이 스바스티가 싯다르타와 처음 만난 장소인 네란자라 강기슭으로 돌아간 것은 다시 시작되는 순환의 고리를 의미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 돌고 돈다. 나는 아니겠지 하며 생각하며 한 말과 행동은 같은 성질의 다른 형태로 언젠간 나에게로 돌아오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