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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pr 05. 2021

관조(觀照)하는 삶

[이 순간의 나] 에크하르트 톨레

"참!  모르던 학생 때가 좋았었는데..."

"아! 빨리 퇴근하고 집에 가서 시원한 맥주 한잔 하고 싶다"

 

   위의 두 문장은 하나는 과거의 회상, 다른 하나는 미래의 상상이다.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 푸념처럼 자주 하던 말이다. 웃긴 건 학생 때는 빨리 졸업하고 돈 벌어야지, 퇴근하고 집에 가서는 다음날 제출할 보고서를 걱정했다. 과거와 미래 속에 현재는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현재에 살면서 항상 과거와 미래를 바라본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의 나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현재는 항상 희생된다. 현재는 버텨야 하고 벗어나야 하는 순간일 뿐이다.


   에크하르트 톨레, 이 책은 <이 순간의 나, 원제 : The Power of Now> 순전히 저자의 이름만 보고 읽게 되었다.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에서 동양의 일원론과 서양의 이원론을 비교(서평 참조)하며 기독교 내부에서 탄생한 일원론적 신비주의를 접한 바가 있었다. 신과 자아의 합일을 주장했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주장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현재의 기독교적 가치관과는 다소 상이한 그의 사상이 나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 궁금증이 풀리지 않던 차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공부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저자의 이름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저자의 원래 이름은 울리히 톨레(Ulrich Tolle, 독일), 예상했던 대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개명을 했다. 그는 유년시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자랐다. (학교가 해로운 환경이라며 정규 교육을 거부함) 심각한 우울증으로 여러 번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불운한 시절을 보냈지만 19세 때 영국으로 넘어가 캐임브릿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새로운 인생을 산다. 그의 나이 29세에 영적 깨달음을 얻은 후 2년 동안 노숙자 생활로 거리를 떠돌며 행인들에게 자신의 영적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그를 쫓는 무리들이 조금씩 생겨났고 곧 영적 스승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의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에 의해 소개된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며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로 올라섰다.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여러 번을 듣고 또 정독하며 책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14:20]


   우리는 신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뭔가 아우라가 퍼지는 형상을 가진 인물이 머릿속에 상기되곤 한다. 대표적인 성인인 예수나 부처의 표정은 항상 온화하고 평온하게 묘사된다. 우리는 그런 형상을 보며 우리 또한 그들처럼 심적 평온을 얻고자 그들을 쫓는다.


   성경 속 말씀처럼 우리 안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면 어떨까? 신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생각은 언뜻 보기에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적지 않은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나마스테(Namaste)!"


   인도와 네팔의 인사말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경배드립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도는 다신교인 힌두교 믿는 국가이며 불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힌두교나 불교에는 여러 종류의 신이 존재한다. 사람마다 자신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신들이 다르다. 그들이 쓰는 인사말과 같이 신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하늘 나라에서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은 신이 자신 안에 있다니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신의 본질과 합일되기 위해서는 신의 개념도 떨쳐내야 한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또한 내적 침참을 통해 신과 하나 되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의 개념까지도 떨쳐내야 한다고 설파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충격적인 발언이었고 그는 이단으로 몰려 교단에서 파면되었다. 그의 주장은 동양의 불교나 도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 우주와 나는 하나다), 무아 무심(無我無心 : 내가 사라지고 마음도 사라진다)의 그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신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처럼 인간도 자신이 사라지는 경지에 도달하면 세상의 이치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현실세계에서 우리의 마음은 쉴 새 없이 요동친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들이 모든 순간 나를 지배한다. 우리는 그런 마음 상태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뭐 기쁨과 즐거움은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다. 문제는 분노과 슬픔이 불러오는 고통이다. 우리는 항상 과거의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간다. 고통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마음을 자신과 동일하다고 생각하기에 그 고통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은 시간을 먹고 자라난다.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고통이 뿌리 뻗는다.


  만약 시간이 멈추고 현재만 있다고 가정해 보자. 간혹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시간이 멈춘 세계를 보곤 한다. 그 세계는 어떤가? 과거와 미래가 사라진 세계 속에서는 현재 밖에 생각할 수 없고 어떠한 마음의 고통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 순간을 관찰하고 유희할 뿐이다. 그건 마치 우리가 동영상을 볼 때랑 사진을 볼 때랑 다른 느낌이라고 하면 이해될까? 동영상을 볼 때면 흘러온 과거를 바탕으로 앞으로 벌어진 상황들을 추리하며 긴장과 궁금증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순간을 찍은 사진은 우리를 그 순간에 머물게 하고 그 순간의 기분에 몰입하게 한다.


  저자는 현재의 순간으로 자신을 갖다 놓으라고 말한다. 현존(現存)의 상태에서는 고통이 스며들 공간이 없어진다. 만약 현재가 고통을 맞닥뜨렸다면 어떡하나? 그럴 땐 그 고통의 마음을 자신과 리시켜 관찰하라고 얘기한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조하는 삶


  그럼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요즘 세간에 떠오르는 메타버스(Metaverse : 가상현실, 서평 참조) 세계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컴퓨터 화면 혹은 VR 안경을 쓰고 또 다른 내가 있는 세계를 경험한다. 우리는 그런 가상세계에 있는 아바타나 캐릭터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곳에서 다른 캐릭터로부터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상대방의 몹쓸 말로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물론 즐겁고 행복한 경험 또한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고통과 기쁨을 느끼지만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 속에 내가 있지만 나는 관조하는 입장으로 분리되어 고통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관조하는 자세로 고통을 받아들인다면 "고통아 왔니?" 하며 남일 대하듯 지켜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봄으로서 지나간 과거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번뇌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스승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하나님(신)의 존재를 자신의 안에서 찾으라고 말했다. 나라는 마음에 갇혀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하나님(신)을 느끼고 끄집어낼 때 비로소 자신은 사라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이런 주장은 기존의 서양 이원론적 가치관(신과 인간의 분리)이 동양의 일원론적 가치관(신과 인간을 합일)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기존 수백 년간 이어온 서양의 종교관을 뒤집어엎는 발상이다. 그렇기에 에크하르트는 당시 이단으로 교단에서 퇴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확장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예수나 부처(석가모니) 같은 성인들은 신과 하나 되는 경지에 도달한 인간이 아닐까? 모든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자신이 사라지고 신과 하나 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의 굴레 속에 각종 욕망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정말 신에 계시가 있던지 아니면 엄청난 내면의 수행을 거쳐야만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와 내가 모두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면 세상은 에덴동산이나 극락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인간 사이에서 생겨나는 그 어떤 갈등도 번뇌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주장처럼 신과 합일을 직접적으로 얘기하진 않는다. 그 또한 그것이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신을 "존재"라는 단어로 바꾸어 영적 깨달음에 도달한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표현의 차이일 뿐 그 의미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나에게 아주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나 또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상념들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집중하고 마음을 가만히 드려다 보는 연습을 하게 된다. 마음속의 자신이 사라지면 고통받은 나 또한 없어지겠지 하면서... 그럼 예수나 부처의 평온한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관조하는 삶을 통해 내가 사라지고 신(존재)이 된다는 생각... 신비롭다.  

이 순간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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