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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14. 2022

당신이 타인에게 이성적인 이유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박찬국  -세 번째 이야기 -

"오! 정말 이성적인 판단이시네요"

"이성을 잃지 말라!"

"정신 차려! 이성적으로 생각해"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한다. 혹시 또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이 있다면 댓글로 부탁합니다. ^^;;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요소로 이성(理性)을 꼽는다. 그만큼 이성은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이성이 없다면 인간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올바른 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을 야만적 혹은 교양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는다.


  하지만 이성적이라는 생각과 행동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책을 읽다 생각지 못한 쇼펜하우어의 또 다른 남다른 발상에 또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그의 발상은 뭔가 허를 찌르는 듯한 혹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치는 생각을 도출해 낸다.


   계속 빠져든다. 책 속에서도 언급했듯이 철학자로서 문학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그의 철학은 내가 쓰는 소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성적이라는 듣기 좋은 말


 우리는 왜 이성적인 삶을 강조하는가? 이성적인 삶이 인간 사회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것이라는 이유 말고도 이성이 사회에서 자신의 꿈(긍정적 : 목표, 부정적 :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이성적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도 있다. 보통 비이성적 방법은 가장 빨리 자신의 꿈을 이루는 방법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지속성이 짧거나 불법적으로 사회의 용인이 불가한 행동일 것이다. 쉽게 말하면 비도덕적 혹은 불법과 편법을 이용한 욕망 실현이다. 물론 들키지 않고 성공한다면 그보다도 더 신속하고 효과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허를 찌르는 발상이 튀어나온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주 철저히 이성적으로 변한다면 다른 말로 아주 치밀한 계산과 계획을 동원한다면... 비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을 이성적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이성적 이성 판단과 행동이 소위 배운 자들이 하는 나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의 가면을 쓰고 비이성적 행동을 일삼는 것, 욕망(야욕)을 이루기 위해 법망을 피하고 더러운 일은 타인의 손과 발을 빌리고(돈과 명예를 이용), 겉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타인의 눈과 귀를 속이고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실현할까를 고민한다.


이성적인 그리고 감성적인


  과거 내가 쓴 칼럼(감성과 이성사이)에서 두 가지 유형의 직장상사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한 상사는 감정적이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말과 행동의 기복이 컸다. 나의 실수에 얼굴 표정이 변하고 욕설과 폭언을 내뿜는다. 반면 이성적이었던 상사는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차분한 어조로 남들이 모두 듣는 곳에서 나의 실수를 하나하나 세심히 들춰내며 한치의 틀린 말이 없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 과정에 욕설이나 폭언은 없다. 비방조의 논리적인 언어로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안겨준다. 주변에서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 상사의 지적이고 이성적인 부분이 더 크게 부각되며 나의 존재감은 소멸된다. 하지만 욕설과 폭언을 내뿜는 상사는 주변 사람들의 머릿속에 교양 없고 야만적인 사람으로 각인되고 나에겐 오히려 동정과 위로의 시선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두 상사는 모두 자신의 목적, 즉 나를 변화시키고 자신이 우월해 보이려는 욕망을 달성할 수 있지만 이후에 자신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다르다. 전자는 나중에 본사에서 좌천되어 다른 곳으로 쫓겨났고 후자는 실력을 인정받고 승진과 함께 승승장구하는 성공한 직장인으로 인정받았다.


  겉으로 보기에 후자의 상사는 우리가 말하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비칠 수 있지만 그 이성적임에 뭔가 찝찝함이 묻어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아니라면 이 글을 더 이상 읽어 내려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성적인 사람인가?"


 만약 당신이 이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한다면 다시 한번 더 묻겠다.


 "당신은 타인에게 이성적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이성적인가?"


 마음속에 대답을 떠올렸다면 이제 이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를 읽고 빠진 세 번째 고민의 주제이다.


 앞에서 얘기한 두 상사의 스토리에는 타인의 시선이 존재한다. 그 말은 두 명 다 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은 모두 대외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로서 조직과 단체 속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그 관계가 자신을 정의하고 규명한다고 생각한다. 일과 관계에서 성공은 바로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이 의미 있고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는 얘기다. 여기엔 자신의 내적 상태는 배제되어 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자는 바로 타인에게 이성적이라는 말이다. 타인에게 이성적인 사람이 반드시 자신에게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끔 영화 속에서 대외적으로 나무랄 곳 없이 교양 있고 이성적인 인물이 혼자 있는 순간, 즉 독백에서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는 장면을 통해 이중적인 모습을 여주곤 한다. 타인에게 보이는 이성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성취하지만 내적으로는 아주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성과 비이성을 확실히 구분할 줄 알며 자동반사적으로 둘 사이를 오고 가는 생활에 익숙하다. 그들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이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세간에 주목을 받는 사회 주요 인사 혹은 전문가들이 만약 이런 이중적인 인간이라면 사회은 위험천만한 세상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일전에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참조)를 읽고 쓴 서평에서 철학없고 교양없는 전문가들이 세상을 병들게 한다는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곳, 자신의 일상 혹은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성적인 사람, 소위 우리가 말하는 일상을 통제하는 이성, 유식하게 표현하면 극기(克己 : 자신을 극복하는 것)와 지기(知己 :자신을 아는 것)를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이성적인 사람인 것이다. 그들은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이성이 체화된 사람이다. 도구는 자신과 분리될 수 있지만 체화된 이성은 삶 전체를 통제한다.

  

"욕망은 '절름발이를 어깨에 메고 가는 힘센 장님'이다"

                                      -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중에서 -


  여기서 장님은 욕망이고 절름발이는 이성이다. 욕망 없는 인간이란 없다. 우리는 그 욕망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해 항상 고민하며 살아간다.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부와 명예)을 이룬 자들은 대부분 타인에게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물론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이성적인 훌륭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만약 이 두 가지 모두 이성적이라면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그건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성인(예수,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 등)의 경지가  아닐까? 그렇게 산다면 욕망 없는 고통과 권태 속에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성만 존재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이성은 욕망을 통제하는 주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동원되는 욕망의 노예에 불과할 때가 많다."

  

                                               -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중에서 -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타인을 설득하고 이해시킨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 학창 시절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따져서 교육하던 교사의 가르침에 따라 훌륭한 사람이 되었어야 맞다.  


"넌 잘 난 척 좀 하지 마라!"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같이 노는 친구 무리 중에 항상 튀는 놈이 꼭 하나씩 있다. 항상 바른말만 하며 공부 잘하는 그런 캐릭터다. 친구들끼리 작당모의를 하고 있으면 항상 고춧가루를 뿌리며 분위기를 흐린다. 문제는 그가 하는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기에 받아칠 수가 없어 더 화가 난다.


  그 친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말로 우리를 설득시키려 한 말이지만 그 말은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결국 녀석을 제쳐두고 어차피 할 건 다 한다. 그 친구는 욕망이 이성 위에 존재함을 몰랐다. 만약 누군가를 설득하고 이해시켜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한다면 상대방의 욕망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욕망을 자극하면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이성이 '절름발이'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절름발이는 누구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방법과 방향은 제시할 수 있지만 갈 수 있는 건 장님의 다리를 이용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배고픈 장님의 식욕(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건 저기 앞에 사과나무를 본 절름발이의 음성 내비게이션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성공(成功)과 성인(聖人)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성공을 꿈꾼다. 많은 자기 계발서나 성공 관련 책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성공 법칙이 있다. '절대다수의 욕망을 자극해라' 산업자본주의 세상은 재화의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자본(피)이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가장 기본은 욕망을 자극하는 재화가 우선되어야 한다. 지금은 오프라인상의 재화나 서비스뿐만 아니라 온라인 상의 재화(각종 플랫폼의 서비스)까지 포함한다. 많은 이들의 욕망을 자극해 그들의 끌어모으는 자가 성공한다. 철저히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며 논리적인 판단을 통해서 소비자의 욕망을 분석해야 한다. 그 말은 타인에게 철저히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미치광이 일지라고 그건 아무 상관없다. 이쯤 되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부를 이끌어가는 자들 예를 들면 일론 머스크, 제프 베조스 같은 인물들은 철저히 타인에게 이성적인 인물들 인 것이다. 그들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성공한 사람이다.


  반면 성인은 자신에게 철저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 내적 철저함은 결국 외적 철저함으로 드러나게 된다. 내외(內外)가 일치하는 삶을 살아온 자들이다. 우리가 말하는  4대 성인(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을 보며 그들이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얘기할 사람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욕망을 부정하려는 욕망조차도 버릴 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평온한 환희를 경험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환희의 상태를 열반(涅槃: Nirwana)이라고 부른다."


                                        -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중에서 -


그들은 욕망이 가져오는 고통과 권태사이에서 완전히 벗어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 안에 비워진 욕망 대신 자비(慈悲)로서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베푼다. 어찌 보면 성인은 자신의 성공이 아니 타인의 성공을 이끄는 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인을 바라보며 현실에서 그들의 생각을 이용해 성공을 꿈꾸기 때문이다. 과거 성인들의 제자들 중에 많은 사회적 성공을 이룬 제자들이 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 수많은 성공한 인물들이 이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가지만 성인은 찾아볼 수 없는 건 현실 속 욕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 세상은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을 성취해야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것을 믿는 인간은 계속 욕망을 쫓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성공하는 자가 이성적으로 욕망을 쫓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당신이 타인에게 이성적인 이유이다.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글짓는 목수 유튜브 계정


https://youtu.be/HoEshSMh5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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