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Jul 16. 2021

공간이 나를 만든다

[어디서 살 것인가] 유현준

바야흐로 갈 곳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최근 나타난 코로나19 델타 변이 바이러스는 공기 중으로 쉽게 감염될 수 있다고 한다. 이제 공공의 공간은 두려움의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요즘 사람들이 접촉을 피해 산으로 들로 나간다고 한다. 문제는 다들 산과 들로 가서도 접촉을 피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바이러스 입자도 같이 날아가겠지 하는 생각에 공포심은 줄어든다.

 

   [어디서 살 것인가]는 공간에 대한 깊이있는 생각을 하는 계기를 던져주었다. 과거 내가 살아온 시공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정말 과거에 내가 머물렀던 공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지금 내가 머물고 누리고 있는 공간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학교와 교도소


   저자는 대한민국에 담장이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을 학교와 교도소라고 꼽는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군대도 포함하고 싶다. 저자의 말로는 학교나 교도소나 매한가지라는 뜻이다. 초중고 도합 12년이라는 시간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 속에 머문다. 징역 12년을 살고 세상 밖으로 나간 복역수가 세상에 잘 적응할 수 있겠는가? 다시 교도소를 찾아가거나 와 비슷한 공간을 찾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다녔던 초중고 모두 담장이 있었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는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 전방 휴전선에서나 볼 듯한 원형 철조망까지 설치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학교는 시내에서 S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학교로 입소문이 퍼져 많은 학부모들이 우리 학교로 자녀들을 보내기 위해 그 지역으로 이사를 오기까지 했을 정도다. 당시 주변 학교들과 학생들 사이에 우리 학교의 별칭은 **교도소였다. 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교도소를 거쳐서 SKY로 날아오르는 아이러니한 희망을 품는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갇히자?!)


  같은 복장에 짧은 잔디머리, ㄱ자 혹은 ㄷ자 형태의 건물과 모래사막 같은 운동장(연병장)에 매일 배식되는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정해진 시간에 벨소리(혹은 나팔소리)에 따라 교실 내무반 혹은 감방에 격리되어 나갈 수 없다. 정해진 교육과정(교화, 훈련)에 맞춰 제조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와 민주의 권리가 모두 박탈당한 공간이다.


  인지능력과 신체능력이 가장 왕성한 아동청소년기 동안 장기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나오면 뭐가 될 수 있을까? 한국에 창의력이 뛰어난 천재들이 나올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이 자라온 환경 때문이 아닐까?


   미국의 수많은 IT 천재들은 서부 캘리포니아 출신인 것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해 모든 대부분의 건축물이 낮게 조성된 데서 기인한다고 한다. 푸른 잔디와 저층의 주거공간이 사람과의 만남과 교류를 이끌어낸다. 아파트같은 고층주거지역일수록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근접도가 떨어져 밀폐된 공간 속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 멀어진 콘크리트 속 밀폐된 공간은 폐쇄적인 사고와 편협한 사고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인구가 밀집되고 고층 건물이 즐비한 도심지라도 뉴욕처럼 주변에 공원이나 산책로 등의 자연이 어우러진 공공의 공간이 많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탁 트인 잔디밭에서 호수의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사적 공간의 확장을 누릴 수 있다.


  나 또한 휴일이나 여유 시간 공원을 자주 찾는다. 이곳 호주도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휴식과 여가를 즐기기 좋다. 넓고 한적한 공원 잔디밭 나무 그늘 아래서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운동도 하고 도시락도 까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공원이 많아 오늘은 이곳 내일 저곳 골라가며 다니는 재미도 누린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여의치 않아 주말에 등산을 자주 다니곤 했다. 등산은 등산로를 따라 계속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이가 머무르며 휴식과 여가를 즐기기엔 쉽지 않은 공간이다. 게다가 봄이나 가을, 꽃이 피고 단풍이 지면 산의 등산로는 떼 지어 올라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람에게 밀려서 올라가고 내려간다. 한국은 공공의 사적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도시에 카페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것은 그것을 방증한다. 스타벅스는 더 이상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라는 것쯤을 아시리라.


그 후로 오랫동안


   12년의 시공간이 심어준 무의식의 세계는 평생을 이어간다. 그 후로 오랫동안 직장이라는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 12년간의 훈련은 사회생활을 위한 것이었다. 장기간의 의무교육(훈련)은 가혹한 노동을 정당화했고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뭐 급여도 받고 자신의 의지로 퇴사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몸에 베인 습관에 따라 학교 때와 다름없이 학교처럼 직장을 다닌다. 그래서인지 직장에서는 학교에서와 같이 대부분 자유의지가 사라진 채 머무르며 출근(등교)과 동시에 퇴근(하교)을 꿈꾸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청장년 시기를 학교와 회사같은 비슷한 공간과 환경 속에서 보낸 후 직장을 떠나면 이제 아무도 컨트롤해주지 않는 낯선 환경에 벌거벗겨진 듯한 기분을 느낀다.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며 삶을 이어나가야 할지 혼란스러워진다. 중년과 노년의 자살증가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누군가가 자신을 붙들어주었으면 하지만 이제 늙은 몸과 낡은 머리를 받아줄 직장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세상이 지정한 공간과 방식대로 교육받고 일하며 살아온 길이 결국 자신이 홀로 서는 길은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다. 학교는 기업과 사회가 원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공간으로 전락하였다. 이제 기업도 사회도 원치 않는 시기를 대비해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으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한다. 나중에 불어닥칠 백성들의 원성과 후한을 위한 국가차원의 강제보험인 것이다.


 후드티와 메타 버스


   저자의 흑인 힙합 문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힙합은 미국의 빈곤 문화의 상징이다. 자신의 공간을 가질 수 없는 흑인 빈민들이 후드티를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헤드폰을 낀 체 양손을 이리저리 휘젓는 행위가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사회 불평등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랩 가사들은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공간도 적은 데 갈 수도 없는 상황은 이제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려 한다. 폐쇄적인 방 안에서도 다른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다. 다만 몸이 아닌 정신만 간다. 그 속에는 무한한 세계가 펼쳐진다. 갈 곳 잃은 많은 이들이 가상의 공간에 머무르며 그곳에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간다.

 

   부의 양극화는 공간의 양극화를 포함한다. 가진 자들은 돈으로 사적 공간(부동산)을 넓혀가고 몸 둘 곳 없는 자들은 가상공간으로 넘어간다. 공간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책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공간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잘 설명한다. 더 이상 공간이 사람을 제약하고 가둬두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넓고 다양한 공간,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건축학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내 소유의 땅이 많고 적음을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사람을 위한 자연을 위한 그리고 다수가 머물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을 더 많이 만들고 조성해야 하지 않을까? (뭐 이것도 바이러스가 잡혀야 하겠지만...)


  공간이 나를 만든다.

어디서 살 것인가
이전 04화 정돈에서 혼돈으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