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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13. 2021

정돈에서 혼돈으로

[떨림과 울림] 김상욱

   루빅스 큐브(Rubikscube)를 아는가?


 정육면체의 색깔 맞추기 퍼즐이다. 어린 시절 한 번쯤은 하다가 밀려오는 짜증에 집어던지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퍼즐을 잘 맞추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무언가를 딱딱 맞추고 정리 정돈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듯하다. 퍼즐을 잘 맞추는 사람을 보면 그들의 방은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고 컴퓨터의 바탕화면은 한눈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있게 세팅해 놓았고 머리도 한오라기 잔머리 없이 정리되어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사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이다. 좋게 얘기하면 저항하는 사람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역행하는 인간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으며 혼돈의 시기를 늦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래간만에 과학서적을 읽었다. 저자는 현대 물리학의 개념을 쉽고 친근하게 이해시켜준다. 자칫 딱딱할 수도 있을 과학지식을 인문학적 관점도 섞어서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작가의 노고에 감사한다. 만약 현대 물리학(특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관심은 있는데 문외한이라면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요즘 들어 과학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다. 최근 김초엽 작가의 소설(공생 가설)을 읽으면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 혹은 철학적으로만 봐서는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읽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서평 참조)에서도 과학과 문학의 접목을 통해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의 신선함과 기발함을 경험했다.


  과거 데카르트 갈릴레오 혹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여러 위대한 철학자들 중에는 과학과 의학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까지 섭렵한 인물들이 많다. 그들이 여러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일 수 있는 건 세상은 모든 영역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새로운 진리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저자의 책을 읽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당시 책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이 기억에 남아 최근 다시 산책을 하며 오디오북으로 다시 읽었다. 역시 책은 한 번으로 이해할 수 없다. 처음 책을 읽어 내려갈 때는 새로운 지식들의 존재를 인지함으로써 희미한 스케치같이 머릿속을 스쳤다면 두 번째는 그 윤곽(개념)이 뚜렷(이해)해지면서 머릿속에 가지부터 잎사귀까지 보이기 시작하고 뿌리를 통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땅 속 지식들과 연결되며 새로운 생각들이 생겨난다.

  

   두 번의 완독을 통해 과학에 문외한인 나도 현대 물리학의 기본적인 개념을 깨우친 기분이다. 책 속에는 물리학의 여러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루브릭 큐브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부분에서 많은 상념들이 피어오른다.


시작은 정돈에서


  처음 루브릭 큐브를 사면 모든 색이 일치된 단면으로 정돈되어 있다. 자 이제 우리는 이 놀이를 시작하기 위해 큐브의 색깔을 뒤죽박죽 섞어야 한다. 우리는 섞으면서 섞는 순서를 기억하지 않는다. 뭐 기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리고 다시 큐브를 맞출 때는 섞을 때의 순서대로 맞춰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큐브가 가질 수 있는 경우의 수는 43,252,003,274,489,856,000개(약 4,000경)라고 한다. 우리는 평생 해도 이 퍼즐의 모든 형태를 구현해볼 수 없다. 한 가지의 색깔로 정돈되어 있던 첫 번째 형태에서 시작한 퍼즐은 수천 경의 형태로 바뀌면서 뒤죽박죽 섞인 혼돈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최근 락다운(Lock down)으로 방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방은 시간이 갈수록 지저분하고 어지럽혀진다. 책상 위에는 먹다 남은 간식들 찌꺼기와 머그컵들이 쌓이고 방바닥에는 벗어던진 양말 속옷이 널브러져 있다. 이건 마치 처음 이사 온 텅 빈 집안에 살림이 하나둘씩 쌓이면서 어지럽혀지는 것과 같다. 어떠한 형태로 어지럽혀질지는 큐브 퍼즐의 경우의 수만큼 다양하다.

빅뱅과 천지창조

빅뱅(Big Bang)과 천지창조


  빅뱅 이론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신이 천지를 창조한 순간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하는 이 이론은 세상의 시작을 설명한다. 모든 것은 한 점에서 시작되었다. 정돈된 하나의 입자였던 빛이 폭발과 함께 파동처럼 퍼져나가며 우주만물이 생겨난 것이고 지금도 계속 팽창하며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한 인간은 세포 팽창으로 뇌와 장기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모습의 인간으로 태어난다. 유전적 요인과 후천적 환경의 다양성에 따라 수많은 모습으로 변해간다. 어린 시절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동질감을 느끼던 친구들은 이제 그 어디서도 동질감을 찾아내기가 힘들 정도로 변해버렸다.


   셰어하우스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과 종종 식사를 한다. 모여 앉으면 대화의 공통주제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만약 나이 차이가 많다면 세대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지금은 서로가 보고 듣고 일하는 세계가 너무 다양해졌다. 맞춤형 AI 덕분인지 자신이 보고 듣는 세계만 더욱 심화 학습되고 그 속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과거에는 서로 보고 듣는 것(TV, 신문, 드라마등)이 비슷했기에 다른 점이 있어도 공통 관심사를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같은 시공간에 살아도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건 혼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큐브의 수만 가지 경우의 수와 빅뱅 이후 우주가 팽창하며 만들어진 무한대의 세계가 설명하듯 인간 세상도 모두가 각자의 세계 속에 서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뻗어나간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수많은 타인들의 다양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큐브의 모든 경우를 다 해볼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만큼 힘든 것은 없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힘들어한다. 개인주의와 무관심이 만연 해지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것에서부터 고통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어질러진 방을 다시 정리할 순 있지만 다시 어질러질 것이고 정리한다 해도 처음으로 돌아갈 순 없다.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머릿속을 지워내야 하는 것이다.   


갈수록 복잡한 세상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것은 결국 상태를 이루는 경우의 수가 적은 상황에서 많은 상황으로 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 [떨림과 울림] 중에서-

            

   오래전 인간 집단은 십계명같이 누구나 다 외울 수 있을 만큼의 기본적인 율법만 존재했다. 지금은 어떤가? 법조인도 다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법규가 생겨났다. 지금 이 순간도 빠른 세상의 변화에 쫓아가듯 새로운 법안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무한히 변해가는 혼돈의 세상을 법안에 가두려는 시도는 끝이 없다. 나중엔 우리가 무슨 법을 만들었는지 기억도 못할 것이다. (물론 그건 AI가 해결해 주리라) 어리석은 인간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법과 규율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그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한 건 만들면 또 그것 때문에 또 다른 걸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을 막으면 저곳이 저곳을 막으면 또 다른 곳이 센다. 애초에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포맷이 답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이나 시간이 지나면 속도도 느려지고 예기치 않은 오류들이 생겨난다. 쌓이기만 하고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데이터들의 엉킴과 충돌, 알 수 없는 악성코드들 혹은 바이러스들, 그 원인을 찾아내어 고치는 것보다 차라리 다 지우고 새로 세팅하는 것이 더 빠르다. 자주 백업하고 포맷하는 길이 가장 현명한 길이다.

 

   인생과 세상은 포맷할 수 없다.


   큐브퍼즐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혼돈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거하여 우리는 시간 되돌릴 수 없다. 아까 말했다시피 우리가 퍼즐을 어지럽힌 순서대로 테이프 감듯이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얘기할 것이다. 정리를 잘해서 다른 길로 색을 다 맞출 수 있지 않느냐? 맞다. 우리는 다른 길(방법)로 다시 색깔을 맞출 수 있다.


   그럼 우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결국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수많은 경우의 수와 긴 시간을 거쳐서 도착한 곳이 원점이다. 이건 삶과 죽음 그리고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 같은 곳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무언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 혹은 결과가 펼쳐지지 않을까 헤매고 찾으며 살아가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 도대체 누가 처음에 큐브를 맞춰놓았을까? 공장에서 맞춰놨겠지라고 할 것이다. 미안하다. 이런 농담을 좋아한다. 우리는 우주라는 이 무한한 큐브를 처음에 누가 맞춰놓았을까라는 의문에 도달한다.

 

  안타깝지만 빅뱅과 천지창조 이전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지(증명되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그건 빛과 전자가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함을 설명할 길이 없는 현재의 과학이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이라는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욥기 8:7 -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다. 미약과 창대는 어찌 보면 정돈과 혼돈을 희망차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미약하였지만 정돈된 존재로 시작해 창대하지만 혼돈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정돈에서 혼돈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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