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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21. 2021

선(線)을 넘는다는 것

[응답하라 1988]을 보다가

"선 넘지 마라! 넘으면 혼날 줄 알아!"


  초등학교 시절(당시 국민학교)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서로 의도치 않는 두 남녀가 짝꿍이 되어 한 책상을 같이 써야 했다. 녹색으로 칠해진 2인용 일체형 책상 위에는 분필 혹은 연필 등의 필기구로 갈라진 남북의 휴전선처럼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만 넘으면 전쟁이다. 내가 그 선을 넘으면 짝꿍은 잡아먹을 듯이 나를 때리곤 했다. 휴전선을 넘으면 안 되듯이 분필 선도 넘으면 다툼이 생기는 빌미가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들을 지키고 살아간다. 차선이나 휴전선같이 눈에 보이는 선들도 있고 감정이나 관습 혹은 관계같이 눈에 보이지 않은 선들도 존재한다. 보통 눈에 보이는 선들은 서로의 질서와 평화유지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들은 때론 우리가 넘어서야만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것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선들이 새로운 세상과 규칙 그리고 관계를 차단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영화 [기생충]

"전에 있던 아줌마는 매사에 선을 딱 지켜, 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데"

                                                                                                - 영화 [기생충] 중에서 -


   영화 기생충에서 이선균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헌법 제11조에 따라 사회적 신분에 의해 그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아니하는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신분 혹은 빈부에 따라 스스로가 자신의 선을 만들고 그 선을 지키려고 한다. 그 선은 마치 사회적으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헌법의 이념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선에 사로 잡혀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선들은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선들로 나누어진 세계는 서로 넘어설 수 없는 경계가 된다. 그것을 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것이고, 사생활을 침범하는 것이고, 개념이 없는 것이며,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선을 쉽게 넘나들지 못하고 자신만의 익숙한 공간에 머무르며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규칙을 혹은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응답하라 1988] 중에서

"새로운 관계를 꿈꾼다면, 사랑을 꿈꾼다면 선을 넘어야 한다. 선을 지키는 한 그와 당신은 딱 거기일 수밖에 없다."                                           

                   - [응답하라 1988] 제9화 중에서 -


   [응답하라 1988] 중에서 선우와 보라의 러브라인이 흥미롭다. 극 중 보라는 동생의 친구인 선우에게 "선 넘지 마라!"며 그의 선을 넘는 행동과 감정을 불쾌해한다. 보라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선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려다 보지 못한다. 주변의 시선과 사회적 통념이라는 규칙에 얽매여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결국 선우의 끈질긴 선 넘기가 보라의 마음을 움직였다. 누군가는 자신만의 선을 만들고 그 선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그렇게 지키고자 하는 자신만의 선은 대부분 자존심인 경우가 많다. 자존심이 사라지면 자신도 사라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누군가의 선(자존심)을 넘으려는 말과 행동을 견디지 못한다.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자신을 드려다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선을 지워야 서로의 공간으로 넘어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책상 위에 그어진 분필선을 고의로 넘어가며 짝꿍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기에 당장 그녀의 관심을 끌기에만 급급했던 순수함이 만들어낸 행동이다. 관심이 없다면 선도 넘지 않는다. 선을 넘지 않으면 관계도 발전할 수 없다. 선을 넘는 것이 관계의 개선이 될지 악화가 될지는 넘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랑과 우정 사이


   사랑과 우정도 종이 한 장처럼 얇은 선을 넘느냐 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사랑을 위해서는 우정을 포기해야 한다. 드라마 속 정환과 덕선의 러브라인이 그와 같다. 남녀 사이에 사랑과 우정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오랜 시간 쌓여온 우정의 견고함 때문에 사랑의 시작이 쉽지 않다. 오랜 기간 쌓아온 우정을 부수고 새로운 관계로 넘어가는 것은 마치 교복을 벗고 군복을 입는 것처럼 어색하고 거북하다. 그렇다고 교복을 벗지 않을 수 없다.

Reply 1988

"선이라는 건 딱 거기까지만이라는 뜻이다. 선을 지킨다는 건 지금껏 머물던 익숙함의 영역, 딱 거기까지의 세상과 규칙과 관계를 유지하겠단 뜻이다. 그건 결국 선을 넘지 않는다면 결코 다른 세상과 규칙과 관계는 만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 [응답하라 1988] 제9화 중에서 -


   사랑과 우정의 교집합이 생기는 순간부터 마음은 평정을 잃어버리고 고통이 찾아든다. 두 감정이 오랜 시간 공존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두 감정은 마치 자석의 같은 극이 만난 것처럼 서로를 밀어낸다. 그 고통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 스며들면 다시 우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이다. 사랑을 위해 우정을 포기해야 한다. 재수가 없다면 두 가지를 모두 포기해야 하는 큰 모험이 될 수도 있다.


    과거 나 또한 그러했다. 우정이 아쉬워 선을 넘지 않던 짝사랑은 커져가고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사랑만큼 더욱 견고해진 우정 앞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우정도 사랑과 함께 사라졌다. 사랑이 찾아들면 빨리 고백해야 한다. 누가 그랬던가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남녀의 사랑은 선을 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선을 넘는 타이밍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선을 넘기 힘든 시대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요즘같이 사람과 사람 간의 믿음과 신뢰가 사라지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언텍트 시대에는 그런 선 넘기가 더욱 쉽지 않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지만 감정을 표현할 기회도 없을뿐더러 표현하는 것이 반감을 사고 실례가 되어버렸다. 쉽게 다가갈 수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관계의 거리도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그렇기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도, 규칙도, 관계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혁명과 혁신 그리고 사랑


   과거 선을 넘고 저항했던 조상들이 독립을 이뤄냈고 선을 넘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가져왔다. 선을 넘은 생각이 아인슈타인을 만들었고 선을 넘은 사랑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수많은 선들이 새로운 세상과 규칙과 관계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걷어내야 한다. 걷어내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세상은 선을 긋는 자들과 그 선을 넘으려는 자들의 투쟁속에서 변화되어 왔다. 선을 넘는다는 것은 두렵고 부담스럽고 위험한 과정일 수 있다.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과 규칙 그리고 관계는 선을 넘으며 탄생한다. 혁명과 혁신과 사랑은 선을 넘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선을 지키는 자와 선을 는 자 그리고 선을 는 자.


당신은 어느 부류인가?

[응답하라 1988] 중에서


글짓는 목수 (유튜브계정)

https://www.youtube.com/watch?v=DXfSkJHF1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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