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죽음 앞에 진실하다

[오징어 게임]을 보고 난 후 (스포 일부 포함)

by 글짓는 목수

"얘기, 다른 사람에게 못해본 얘기, 어차피 우리 둘 중 하나는 여기서 죽어"


죽음 앞에서 비밀은 없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왜 꼭 죽음이 임박해서야 진실되고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오징어 게임] 중에서

모처럼 주옥같은 명대사들로 도배가 된 드라마를 봤다. 주말에 별생각 없이 클릭했던 드라마에 빠져 하루 종일 정주행을 해버렸다. 정말 각본(시나리오)과 연출이 환상적인 케미를 이루었다는 생각을 드라마를 보는 내내 하게 된다. 이런 감상은 나 뿐만이 아닌 듯 보였다. 드라마는 넷플릭스 시청률 세계 1위로 등극하며 전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오징어 게임]은 빚으로 삶의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들의 일확천금을 얻기 위한 목숨을 건 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린 드라마이다. 게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천라만상의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생사가 오고 가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사악한 본성과 그 안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애를 그린 작품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복음 15:13] -


서두의 대사는 구슬치기 게임에서 동료라고 생각했던 상대방을 죽어야만 하는 상황 속에 놓은 '지영'이 '새벽'에게 하는 대사이다. 처음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아픈 과거 속 이야기를 꺼내놓는 장면이다.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의심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사이였던 둘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하는 생사의 30분 동안 꾸밈없는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서로의 아픔을 나눠가진 둘은 진정한 친구가 되고 그 진솔한 대화는 친구에게 목숨을 내어주는 희생을 이끌어 낸다. 옛말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소외받은 누군가에겐 진솔한 대화가 목숨도 내어줄 만큼 간절한 빚이었을 수 있다.


죽음 앞에서 비밀은 사라진다


우리는 누구나 숨기고 싶은 가슴 아픈 비밀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간다. 그 비밀은 죽는 그날까지 잊히지 않고 계속 자신을 괴롭힌다.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지만 인간이란 존재를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신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말하며 그 고통을 덜어내고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되돌아올 시선과 부메랑 같은 후폭풍이 싫어 말하지 못한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우리는 기도하고 울부짖으며 자신의 비밀과 아픔을 고백하며 심적인 고통을 덜고 용서를 구하려 한다. 아무도 모르게...


만약 그 누군가 다시는 만날 일도 혹은 나의 생활 영역으로 다시 들어올 일도 없는 것이 확실한 사람이라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자에게는 자신을 꾸밈없이 드러낼 수 있다. 만약 드라마 속 내용처럼 내가 죽거나 상대방이 죽는 상황이라면 더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다. 나든 상대방이든 그 비밀을 가진채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목도한 상황에서 진솔해진다. 진솔함이 진정성 있는 대화와 관계 형성을 가져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여행자의 만남


나도 과거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 특히 외국인과 빨리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건 아마 앞에서 말한 그런 상황과 유사할 것이다. 다시 보지 않을 사람, 다시 본다고 해도 나의 삶의 영역과 겹치지 않는 사람이기에 진솔한 대화가 이어진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진솔한 얘기를 더 많이 나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까울수록 나눌 수 없는 것들도 많아지는 법이다. 우리는 그저 오랜 시간 그들과 같이 했기 때문에 눈치와 짐작으로 상대방이 기분이 좋고 나쁨을 좀 더 빨리 캐취 할 수 있고 말 못 할 무언가가 있다는 추측 정도는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세세하게 알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걱정과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배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친할수록 더 드러내지 않게 된다.


때론 낯설기에 진솔해진다


몇 해전 혼자 제주도를 여행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오토바이를 렌트해서 제주도 로드트립을 하고 있었다. 당시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한 대만 남자가 떠오른다. 꽁지머리에 나름 정돈된 콧수염과 턱수염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겉모습으로 혹시 일본인이 아닐까 했는데 알고 보니 대만 사람이었다. 그도 혼자 제주도를 도보여행 중이었다. 그는 예술가였고 학술 연구차 제주도에 왔다가 일정이 끝나고 여행 중이었다고 했다. 중국어가 익숙한 나는 그에게 더없이 편안한 말동무가 될 수 있었다. 한 번에 대화로 의기투합한 우리는 며칠간 같이 보도여행 동반자가 되었다. 하루 종일 그와 함께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걸으며 끊이지 않는 이야기 꽃을 피웠던 기억이 난다.


그와 나는 서로 다시 만나게 될 수 없을 거란 직감을 했을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그가 살아가는 세상은 완전히 달랐고 우리는 그 어디도 겹치는 영역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서로에게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나와 다른 세상을 간접 경험하는 그런 기분이랄까? 물론 굳이 만나려고 했다면 서로의 영역으로 가서 만날 수는 있었겠지만 서로의 영역에 그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 상황이 서로 짧은 시간에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주었다.


한국 사람이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의 말하기 힘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내가 먼저 시작한 진솔함은 처음에 그를 약간 당황하게 했지만 그도 어느새 자신의 비밀을 하나씩 털어놓았다. 그렇게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속이 한 결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려지는 건 그때 주고받은 대화와 그때의 감정들이 이전까지 나의 삶의 영역 그리고 관계 속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혼자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해외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와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경험했다. 여행은 먹고 보고 마시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과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생겨나는 경험들이 더 많은 추억과 감동을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밀을 털어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전래 동화를 기억하는가, 오랜 시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하는 것은 결국 마음에 병을 가져온다. 아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다. 말하기 힘든 비밀일수록 털어놓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매주 특별한 일이 없으면 교회에 간다. (물론 지금은 펜데믹의 락다운 기간이라 가지 않지만)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간증'이라는 것을 한다. 대중 앞에서 자신의 과거 말하기 힘들었던 얘기를 털어놓는 모습을 보게 된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비밀을 얘기하면 내 안에 갇혀있던 스트레스도 같이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비밀을 얘기하는 것을 털어놓는다고 얘기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털어내면 나에게서 떨어지는 것처럼 비밀이 사라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후 그 비밀을 들은 자들의 반응이다. 누군가의 진솔한 비밀 얘기는 대중의 가십거리가 되고 종종 따가운 시선과 지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진솔함이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오징어 게임] 중에서

"난 사람을 믿지 않아"


드라마 속에서 "새벽"이라는 인물도 인간들을 믿지 않았다. 탈북민으로 온갖 편견과 홀대를 묵묵히 참아야 했다. 말투도 숨기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감추며 살아왔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인간들은 모두 자신을 이용하거나 괴롭힘의 대상으로만 여길뿐이다. 사실 우리도 대부분 그런 '새벽'과 같은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 자신을 감추고 살아가긴 매 한 가지이다. 타인의 약점과 상처를 들춰내고 손가락질 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비열한 행동을 일삼는다.


한국 사회는 대부분 자신이 장점과 능력을 부각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상대방의 단점과 과오를 들춰내어 깍아내림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이 더 나아 보이는 비교 우위의 더러운 전략을 쓴다. 물론 그 전략이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치판이 더러운 건 이 때문이리라.


대중은 자극적인 것을 선호한다. 뉴스가 항상 부정적인 사건 사고로 도배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시청률과 조회수를 올리려면 어떻게든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이슈를 만들어야 한다. 아마 세상이 각박하게 변해가는 것은 그런 부정적인 사건 사고들로 도배된 언론과 매스컴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과 긍정의 생각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You do it, because you don't have anybody else - [오징어 게임] 중에서 -

"사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냐, 안 그럼 기댈 데가 없어서 믿는 거지"


주인공 '기훈'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인간은 서로를 불신하지만 또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와 사회와 가족은 모두 이 믿음이라는 것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다면 인간 세상은 모래성과 같다. 물론 이 믿음은 시간이 갈수록 헐거워지는 건 사실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일인가구, 혼밥의 시대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신을 믿는 것 또한 인간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각종 SNS와 여러 가상공간 속에서라도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다. 관계가 끊어진 세상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해와 간섭도 원치 않기에 직접적인 관계를 회피하고 간섭은 받지 않으면서 관심만 받고 싶어 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가상공간과 SNS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냥 할 말이 있으면 문자로 하시죠"


얼마 전 같은 집에서 셰어를 하는 동생에게 들은 말이 잊히질 않는다. 같은 지붕 아래 마주치면서 살아가면 부딪치는 일이 없을 수가 없다. 부딪치기 싫다면 혼자 사는 것이 맞겠지만 서로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같이 집을 셰어를 하지만 이점은 취하고 불편함을 피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나는 같이 생활에 있어 불편함이나 불만 사항이 생기면 서로 대화로 풀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생각은 나와 좀 다른 모양이다. 얼굴을 맞대고 불편한 얘기를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냥 불편함을 문자 메시지로 통보한다. 사실 그게 문제 해결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서로의 감정은 모두 배제되어 버린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문자의 내용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자 뒤에 있을 것들 상상해 오해와 반감을 만들어낸다. 결국 대화과 사라진 곳은 결국 사람이 살지만 마치 로봇이 사는 곳처럼 변해간다.


"그래도 서로 불편함이나 불만이 있으면 당사자와 직접 대화로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아뇨, 그러지 않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나의 생각이 옳다고 강요할 수 없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 기준에 틀린 것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가 나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할 수 없듯이. 대화 자체가 간섭이 되어버린 상황이 안타깝지만 이것도 어찌 보면 언텍트(펜데믹) 시대의 막을 수 없는 변화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시간이 갈수록 이 현상은 더 심화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아니라고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을 것을 억지로 버티려 애쓰는 것은 의미는 있지만 효과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화가 단절된 집은 냉랭함만 더해갈 뿐이다. 그 단절은 시간을 먹으며 더욱 견고해질 뿐이다.

"하나님 우린 오늘도 모두가 힘을 합쳐 많은 이들을 주님 곁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지영이 줄다리기 게임을 끝내고 난 후 한 팀원의 기도를 비아냥 거리며 하는 대사가 웃프면서 인상적이다. 드라마의 후반부에 예수를 찬양하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며 끊임없이 기도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을 죽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가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독단적인 기독교의 모습만을 보여준 부분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하는 기독교에 대한 불신과 변화해야 할 부분을 드러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중은 결국 예수가 행한 선행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예수의 가면을 쓰고 위선을 행하는 종교인들에게 질려버렸다.


예수보다 부처에게


내가 예수를 부처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은 예수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은 긍정에서 부정으로, 선에서 악으로,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가는데도 불구하고 성경 속 말씀은 대부분 그것들을 거스르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 또한 그런 삶을 살았다. 대중의 삶 속에서 그들을 설득하고 깨우치며 악을 선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흐름에 역행한 그는 배신과 핍박 속에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위대했지만 우둔한 성인이었다.

예수와 부처

나이가 들고 세상에 흐름에 거스르는 것이 점점 힘겨워지면서부터 마음속에 부처의 말과 행동이 더 깊은 공감을 가져온다. 어찌 보면 비겁한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변화의 흐름을 내가 거스를 순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정치인들의 사탕발린 말에 얼마나 오랜 시간 속아 왔던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보다 스스로가 변화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차라리 나의 언행의 변화가 타인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진 몰라도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언행은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모든 번뇌와 번민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도 못하는데 어찌 타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예수나 부처처럼 심지가 굳은 성인이 아니기에 결국 타인에게 휘둘리고 영향을 받아 부러지고 상처 받기 마련이다.


예수처럼 저항하고 변화시키려는 삶은 너무 어렵고 힘겹다. 나는 그럴 깜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누군가는 그런 역할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덜 삭막할 테니까 말이다. 나에겐 지금 나 자신 스스로를 다스리고 변화하는 것이 더 우선 되어야 한다.

[오징어 게임] 중에서

"자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없다는 거야"


옛부터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적당한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좌와 우로 갈리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뉜 양극화의 극단으로 치닫는 재미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가진 자들은 너무 많이 가져서 더 이상 뭘 해도 재미가 없고 없는 자는 가진 게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재미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극 중 노인은 어릴 시절 동네 친구들과 놀던 시절을 추억한다. 모든 게 평등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드라마 속 게임들은 그런 어린 시절의 재미있고 평등했던 시절로 돌아가고픈 간절함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벼랑 끝에 선 사람들에겐 현실도 게임도 모두 지옥이지만 그래도 차라리 평등한 지옥에 남으려 한다.


죽음 앞에 진실하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숨기고 감추며 살아가는 것들이 많아진다. 그건 아마 다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장 내일 죽는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내 안에 숨기고 있던 말 못 할 비밀들을 모두 털어놓게 될 것이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인간이 철들기에 너무도 짧다. 평생을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좇으며 살다가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부질없음을 깨닫고 눈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진실한 인간의 모습이다. 만약 우리가 항상 죽음을 생각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바뀌지 않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랑의 3 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