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뭔지 더 알아야 해요, 사랑이 뭔지 더 알려면 우리 모두 더 살아봐야 된다구요"
- 영화 [엽기적인 그녀] 중에서 -
'사랑'(Love, 愛)은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갈수록 그 의미가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다. 나 또한 10대 때 생각하던 사랑과 20대, 30대를 거쳐오면서 사랑에 대한 정의와 생각이 바뀌어 온 걸 보면 사랑이라는 건 평생을 살아가면서 알아가야 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 -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네이버 국어사전]그런 일.
사랑(애, 愛)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한자를 한번 뜯어봤다. 사랑 애는 손톱(조, 爫) 아래 덮을 (멱, 冖) 그 아래 마음(심, 心) 그리고 가장 아래에 천천히 걸을(쇠, 夊) 자가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이걸 직역해 보면 손톱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부터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게 덮어 주고 천천히 함께 걸어가는 형상으로 볼 수 있다. 해석해 보자면 서로의 마음이 상처받지 않도록 항상 지켜주고 보호해 주며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함께 가야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위해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엽기적인 그녀]를 또 봤다. 10번도 넘게 본 것 같다. 하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이 영화를 왜 이렇게 많이 봤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전에는 이걸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카를 융의 심리학 관련 책을 보면서 왜 내가 이 영화[엽기적인 그녀]를 이렇게 여러 번 봐 왔는지 알게 되었다.
[엽기적인 그녀] 중에서 이상적인 그녀
2001년, [엽기적인 그녀] 영화를 본 이후, 나의 이상형은 영화 속 그녀(전지현)와 같은 여자가 되었다. 물론 당시 이 영화는 여파는 상당했다. 긴 생머리에 청순한 이미지 하지만 남성 못지않은 털털하고 당찬 성격의 여성이 뭇 남성들의 로망이 되었다. 어쩌면 이 영화가 당시 기존에 대한민국 여성상의 패러다임을 바꾼 영화이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사회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남녀의 양성성을 문화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문제는 여성의 남성화는 빠르게 수용되어 온 반면 남성의 여성화는 아직까지도 사회 문화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어쨌든 영화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전지현을 일약 스타 덤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후 이 영화는 코믹 멜로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영화는 1999년 당시 PC 통신(나우누리, 필명 '견우74') 유머란에 연재되던 실화 베이스의 웹소설이 세간에 호평을 받으며 영화로 재탄생했다. 작가는 자신이 겪은 실화에 픽션을 더해 한 편의 장편 멜로를 완성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영화 속 장면들이 현실의 디테일을 잘 담아내고 있어 당시 청년세대(70~80년대생) 관객들의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제목인 [엽기적인 그녀]는 사실 [이상적인 그녀]의 반어적인 표현으로 만들어진 제목이다. 극 중 그녀는 작가의 이상적인 여성, 즉 아니마가 반영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인물은 또한 나를 비롯해 수많은 남성들의 아니마가 투영되었다. 이상적인 이성이란 바로 자신의 아니마(아니무스)라고 볼 수 있다.
Anima & Animus 1. 아니마 (Anima)와 아니무스 (Animus): 끌림의 사랑
아니마는 '영혼'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심리학에서는 남성의 내면 깊은 무의식에서 품고 있는 미발달 에로스(Eros)가 현실의 여성 혹은 가상의 여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여자는 아니무스라는 미발달 로고스(Logos)의 형태로 현실 혹은 가상의 이상적인 남성을 통해 투영된다.
남녀는 불완전한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부족한 혹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이성을 통해 충족하려 한다. 스스로 음양의 조화를 찾으려는 무의식의 발현이다. 싱글 남녀는 무의식 속에서 스스로 음양의 조화를 찾아간다. 이것이 바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남녀는 이성에 눈을 뜨는 사춘기 이후부터 점점 자신만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상상하며 창조해 간다. 그리고 형체가 없던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점차 형체와 스토리가 입혀지면서 점점 구체적이고 리얼하게 재창조된다.
그것이 현실(주변 인물, 연예인등)의 이성에게 반영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가상(영화, 소설, 게임 속)의 이성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여자들이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과 내가 [엽기적인 그녀] 속 그녀라는 인물에게 빠져든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가상의 인물에게서 나타나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의 실제 인물에 투영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자신의 상상으로 창조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실제 사람(본질)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의식의 이 강력한 끌림은 모든 것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그래서 본인은 이것을 운명적인 사랑 혹은 인연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만약 결혼한 남녀 혹은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이성 간에 발생하면 문제가 커진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내로남불이 된다. 그래서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에서 이것을 '미발달' 에로스 혹은 로고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현실에선 결국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상처는 또한 순수한 내면과 상상이 파괴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상상력이 줄어드는 것 또한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왜냐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무의식 속 상상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상상에는 뭐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사랑에 관해서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순정 만화나 멜로 이야기는 모두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에서 기인한다. 또한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어떤 예술도 사랑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사랑이 빠진 예술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미움이나 분노 같은 감정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이 기만되면 생겨나는 감정들이다. 그래서 모든 스토리와 예술에는 사랑의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남녀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 사랑의 원천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건드리고 끄집어낼 수 있는 예술이 사람들에게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2. 채우고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내어주는 : 인내(현실)의 사랑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빨리 상처받아야 한다. 왜냐 그래야만 현실에 순응하고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상처받고 무너진 사람은 순수하고 연약한 사랑이 아닌 좀 더 성숙하고 단련된 사랑으로 나아간다. 이건 우리가 현실 세계에 몸 담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피해 갈 수 없는 부분이다. 상상 속의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불가능한 것들이 너무 많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와 현실에서 같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건 작가나 예술가들이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상상의 세계에 오래 머무는 자는 결국 현실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이건 그들의 상상력과 예술성을 극대화시키고 확장시키기 위해선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현실 세계는 예술가나 작가들이 살아가기 팍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비록 정신은 풍요롭지만 현실의 삶이 곤궁한 이유이기도 하다.
삶은 이야기보다 훨씬 더 크다. 영화와 소설은 현실의 모든 것을 담아내지 않는다. 현실의 삶은 영화와 소설의 장면 사이사이를 살아가는 것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순간보다 현실적인 것들, 오늘 저녁은 뭘 먹어야 하고 다음 달 카드값과 대출이자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서로 더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해결해 나가야 한다.
영화와 소설에서는 대출이자를 어떻게 갚아갈지에 대한 상세 계획이나 저녁을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 무슨 재료를 쓰고 소금과 간장등 조미료는 무엇을 쓸지에 대해서 보여주거나 서술하진 않는다. 이런 건 유튜브의 경제 관련 혹은 요리 관련 채널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걸 알고 싶어서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현실의 삶은 이런 것들에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현실적인 사람 즉, 전문가가 된다.
우리는 앞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결핍을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통해 채워가는 경험을 한다고 했다. 그 과정 속에서 정신적인 양성의 균형을 이루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채우는 과정은 나의 무의식과 상상을 통해서 이뤄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만나는 이성은 그것을 채워줄 수 없다. 오히려 내가 상대의 그 부족함과 어긋남을 채워주고 인내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부서지는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사랑인 인내의 과정이다. 기존의 자신이 부서지고 타인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없이는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을 '사랑이 식었다' 혹은 '사랑이 변했다'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을 견뎌야 사랑도 단단해지는 법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에서 느끼던 그 강렬한 끌림이 사라지고 참고 견뎌야 하는 과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태극 3. 태극 = 음양의 조화 : 포용의 사랑
음양의 조화를 표현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태극 모양이다. 왜 태극 모양으로 표현하는지 좀 이해가 되지 않는가? 반반이지만 서로의 공간을 내어주고 또 서로 침투하는 모습의 반반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녀 혐오가 만연한 한국의 국기가 태극 마크라는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현실의 남녀가 결합하고 서로 인내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상과 무의식 속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점점 부서져 간다. 현실에서 남녀 결합은 양기와 음기를 서로 나눠가져 가며 음양의 비율이 점차 평형을 이뤄간다. 이 과정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다. 남녀는 호르몬 분비에서 변화를 보인다. 세월이 흐르고 중년에 접어들면 여자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분비가 줄고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늘어나며 남성은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남성은 여성화되고 여성은 남성화되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적인 시선과 역할론 때문에 이것을 드러내어 표출하지 않고 억압하는 데 있다. 이것 때문에 또 한 번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상처받게 된다. 어찌 보면 우리는 시작도 그렇고 마지막도 그렇고 사회화 과정 속에 만들어진 남녀의 사회적 역할론에 얽매여 영혼(아니마)이 계속 상처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사회화 과정이 없다면 인간은 무의식과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발현되는 과정을 통해 남녀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포용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들 이런 말을 자주 한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건 누구나 공감하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결국 가장 마지막에 도달해야 할 궁극적 사랑을 알지 못한다는 뜻일 수 있다.
이건 과거 예수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사랑이다. 대항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는 사랑, 모든 것을 내어주고 끌어안는 사랑이다. 예수가 악에 대항하지도 저항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악마저도 포용하는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는 선으로 악을 멸하려는 순간 선이 악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신이 만든 우주의 섭리이지 않을까? 궁극의 사랑은 모든 것을 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첫 번째 사랑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갈길이 멀다. 과연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끌림에서 인내를 거쳐 포용으로 나아가는 사랑, 어쩌면 이것을 알아가고 실천하는 것이 신이 인간을 이 땅에 보낸 이유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사랑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엽기적인 그녀] 중에서
* 글짓는 목수 유튜브
https://youtu.be/xQMOJdg6jxA?si=xqyFpMUuEKMo7hO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