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0)에서 유(有=1)가 탄생했고 세상(e^πi )은 -1로 수렴한다.결국 무로 돌아간다.
내가 이 수식을 이해한 바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 봤다. 수학으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수학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 수(e:자연상수, π: 원주율, i: 허수 그리고 1과 0)로 만든 가장 아름다운 등식이다. 수포자가 수식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 신기하다. 너무도.
눈부시게 밝은 일요일 아침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유난히도 푸르르다. 평소 같았으면 그 푸르름의 유혹을 따라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육체의 피로함이 나를 침대에 잡아둔다. 주중에 태양 볕 아래 더위와의 사투 속에 한 주를 보내서일까? 지금 창밖에 보이는 저 푸르름은 그렇게 감성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때 숨가쁘고 고된 노동 속에서 보이지 않는 법이다. 노동은 삶에 필수적이지만 때론 삶을 갈아먹기도 한다.
안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안식의 시간에서도 의미를 찾고 싶다. 피곤하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처럼 영화감상이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넘쳐나는 영상 속에서도 의미 있는 영상을 찾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 발견한 영화였다.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서 시작된 감상은 어느새 노트북을 펼쳐 놓고 책상에 앉아 노트를 하고 사진을 찍으며 보고 있다. 영화가 많은 상념을 던져준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정답보다 중요한 건 답을 찾는 과정이다"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중에서 -
e^ i π+ 1 = 0 (e^πi = -1)
오일러 등식(Euler's equation),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식이라고 한다. 동의하는가? 수학자나 과학자들은 이 수식을 볼 때 가장 큰 평온함과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한다. 마치 우리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음악 혹은 미술)이나 풍경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나의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 이곳은 글과 친숙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수학 전공자가 있다면 모를까. 이 수식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을 숫자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수식을 이해하려고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수식을 설명하는 수학 관련 유튜브 영상을 여러 편 찾아봤다. 그래도 이해가 쉽지 않다. 나는 수포자이다. 수포자가 이 수식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라곤 0과 1 그리고 π(원주율) 정도가 전부이다. 그런 내가 불혹의 나이에 다시 수학 공부를 하고 있다.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다.
글(文)과 수(數)
글과 수는 세상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방식이지만 이 두 가지는 그리 친근하지 않다. 그래서 이 두 영역을 오고 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세상은 학생 때부터 문과와 이과로 나눠져 서로 멀어져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은 모호함을 품지만 수는 모호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글로 세상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책(문학서, 철학서, 인문서 등)은 많지만 수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책은 없다. 왜냐 아직까지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글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해가지만 수는 그렇지 않다. 숫자로 못 박힌(정의된) 세상은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도 불변한다. 영원 불변한 명료함을 지닌다. 수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 불변한 것은 없다는 철학적 그리고 문학적인 주장과 표현을 거부하려는 학문이다.
리만 가설 (Riemann hypothesis)
수학계에서 160년간 풀리지 않는 난제가 하나 있다. 리만이 제시한 가설 (Riemann hypothesis)인데, 그는 어떠한 규칙도 발견할 수 없는 소수(素數, Prime number : 1과 자기 자신 이외에 수로는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숫자)들에서 아주 큰 소수까지 만들어 가면서 그 과정 속에 어떠한 패턴(규칙)이 있는 것 같다는 가설을 주장했다. 이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이 규칙이 참으로 증명되면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리만가설 중에서, (원주율로 수렴하는 소수들의 소수들의 제곱)
왜냐 이 소수의 규칙(리만가설)이 과학(물리학)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인 양자역학의 소립자 운동(파동과 입자로 동시에 존재하는)까지 설명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이 만든 세계의 법칙을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은 정말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일까 많은 수학자들이 이것을 풀려다 의문의 병과 죽음을 맞이했다. 수학자들 사이에선 이 리만 가설을 푸는 것이 영생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다고 한다. 이 리만 가설은 리만이 오일러의 공식을 보고 난 후 시작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중에서
“자연상수(e)에 파이(π)에 허수(i)로 제곱(^)을 했는데 어째서리 0이라는 실수로 딱 떨어지냐는 말이지?! 아무리… 아무리 봐도 기가 막힌 답이지”
-[이상한나라의수학자] 중에서 -
영화 속에서 최민식이 이 오일러 공식을 설명하는 순간,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그 소름은 감성적인 느낌이었고 너무 강렬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다. 그래서 이유를 찾으려 이성을 장착하고 오일러 공식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공식의 의미, 아니 내가 상상해 낸 공식에 관한 상념이라고 해야겠다. 이것을 얘기해 보려 한다. 나는 수학자가 아니다. 난 그저 이 공식이 던져준 느낌을 문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세상을수학으로설명하다. = 오일러의등식 (e^ i π+ 1 = 0)
우선 이 오일러 공식을 이해하려면 각 수(용어)의 의미부터 파악해야 한다. 수학에서는 빠질 수 없는 다섯 가지의 수 (e:자연상수, π: 원주율, i: 허수그리고 1과 0)를 이해해야 한다.
1과 0
1(참,有)과 0(거짓, 無)
우선 1과 0은 모두가 알 것이다. 이걸 단순히 1과 0의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좀 더 깊은 의미에서 해석해 보자. 1과 0 은 참과 거짓을 의미한다. 컴퓨터는 이 0과 1로 세상을 표현한다. 이것을 우리는 이진법(二進法, binary)이라 일컫는다. 또한 이것을 논리적으로 보면 참과 거짓,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유(有)와 무(無)를 의미한다. 있고 없음이다. 우주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커다란 의미로 확장할 수 있다.
원주율 π
원주율 (π = 3.141596......) ≒ 현실의 삶 (보이는)
원주율은 수학과 기하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이다. 영원히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무리수이다. 수학시간에 수도 없이 보았던 수이지만 그땐 왜 그리 친해지지 않았는지… 원이라는 둥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어느 방향에서도 대칭을 이루는 도형이다. 이 도형은 숫자로는 명확하게 딱 잘라서 표현할 수 없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숫자들의 행렬은 마치 우리 삶 같지 않은가. 한 사람의 삶을 딱 잘라 얘기할 수 없다. (우리는 딱 잘라 얘기하려들지만…) 다음엔 무슨 숫자가 나타날까? 가봐야 풀어봐야 알 수 있다.
삶도 내일과 모레 또 무슨 일이 생길지는 가봐야 안다. 영화를 보다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이 원주율의 숫자를 ‘도레미’로 바꿔서 건반 위에서 치면 멋진 음악(파이송)클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 음악을 들어보면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적절히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완벽한 음악으로 들린다. 마치 희로애락을 모두 담고 있는 한 편의 인생 교향곡 같다. 계속 듣게 된다.
파이송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중에서
원은 삶을 의미한다.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은 규칙 없는 비순환의 끝없는 반복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희로애락을 품고 있으며 가만히 시간을 가지고 떨어져서 보고 듣고 느끼면 아름답다.
허수 (虛數, i) ≒ 비현실의 삶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가짜 숫자이다. 영어로는 Imaginary unit이다. 상상의 숫자이다. 그럼 왜 가짜 숫자를 만들었는가? 이건 우리가 왜 가짜 세상(온라인 세상, 상상이 세계)을 만들었는가로 되물으면 그 물음에 답이 될까?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고 숭배하며 소설(이야기)을 읽고 쓰고 온라인 공간에서 대화하고 생활하는 것 모두 가상 세계이다.
인간의 세계는 보이는 실재 세계, 즉 수학으로 치면 실수가 존재하는 세계가 있듯이 보이지 않는 세계(온라인 혹은 상상의 세계, 미시 세계)도 공존한다. 다만 그 세계는 눈으로 보이지도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세계이다. 왜냐 가상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수학에서는 허수로 표현한다. 그리고 허수를 y축에 놓고 실수를 x축으로 늘어뜨려 실수와 허수의 조합인 복소수의 좌표평면 위에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세계를 표현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수학으로도 현실과 가상을 표현할 수 있다. 이 허수가 없이는 현대 물리학의 핵심인 양자역학을 설명할 길이 없다. 양자역학을 표현하려면 허수가 있어야만 한다. 수학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이건 마치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상을 글로 혹은 그림으로 현실 세계에서 표현하는 것과 같다.
복소수 좌표평면
자연상수 (e = 2.718281......)
원주율처럼 끝없이 나눠지지 않는 무리수이다. 이 자연상수를 철학적 혹은 문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나에겐 너무도 생소한 수이기 때문이다. 수학의 미적분에서 빠질 수 없는 수이다. 그런데 이 자연 상수의 의미를 찾아보니 ‘성장(growth)’을 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연 성장이라는 것이 장기적 보다는 단기적로 쪼개어서 성장하면 더 많은 성장을 이룬다. 이건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복리의 개념과도 비숫한데 일 년에 100% 성장하는 것보다 1년에 두 번 50%씩 나누어 성장하며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계속 쪼개어서 성장하면 조금씩 더 많은 성장률을 얻을 수 있지만 이 성장률은 갈수록 미미해지고 이건 자연 상수(2.718281…….)에 수렴하게 된다. 처음에는 크게 성장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계속 쪼개어 단기 목표를 설정해 성장해 가다 보면 성장률이 더뎌지는 것과 같다.
자연 상수 (e)
이건 세상의 모든 성장의 이치와 같다. 국가 경제도 고속 성장기를 거치고 나면 성장률이 줄어든다. 개발도상국은 1년에 10%가 넘는 성장률을 보이지만 선진국은 1~2%의 낮은 성장률을 보인다. 성장률을 성장할수록 줄어든다. 인간도 동물도 태어나서 아이 때는 해가 다르게 커가지만 성인이 되고 나면 성장판이 닫히고 성장이 거의 멈춘 듯하다.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새로운 지식을 접하면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쭉 빨아들이지만 그것이 초급 중급 고급으로 올라갈수록 그 지식의 증가속도는 줄어든다. 최고급 수준에서는 이제 거의 변화가 없을 정도로 미비한 성장을 보인다. 한 끝 차이로 최고급과 고급이 나눠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초급과 중급 그리고 고급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지만 어느 정도 높은 수준에 도달하며 그 차이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이건 마치 100m 육상 선수들의 기록이 0.01초 차이로 메달의 색깔이 갈리는 것과 같다. 메달의 색깔은 완전히 다르지만 그들의 속도 차이는 현실에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없다. 자연상수는 바로 이 자연(세상)의 성장을 수학으로 표현한 것이다.
e^ i π ≒ 세상(우주)
이제 어려운 공식의 각 용어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럼 이제 그 의미를 종합해 보자. 그런데 종합하는 게 더 어렵다. 갈수록 난제다. 이건 정말 내가 과거 수학 수업시간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문과생이 이과생을 이해하는 게 참 쉽지 않다.
과거 회사에서 영업(원가) 담당으로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내가 가장 답답해하는 자들이 바로 설계부서 사람들이었다. 공학적인 원리 원칙만을 보고 현실의 유도리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들과의 회의는 끝을 맺을 수 없는 도돌이표가 계속 이어지는 음악과 같았다. 감성과 이성을 적절히 배합한 설득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고객을 상대하는 것보다 그들을 설득하는 게 더 어려울 정도다. 그래서 그들은 신제품 개발과 혹은 개선 회의 때마다 나의 내부고객이 되었다. 그들은 감성과 이성이 먹히지 않았다. 그들은 원리와 원칙으로 안전성과 내구성을 확보해야 한다. 나는 원리와 원칙을 부수고 이익과 성장을 이뤄내야 했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모순이다.
이야기가 또 잠시 딴 곳으로 샜다. 미안하다. 어쨌든 오일러 등식의 하이라이트인 저 자연상수에 허수와 파이를 곱한 것을 제곱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혹시 독자 중에 이것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제발 좀 알려주시길… 다만 이 결과가 -1로 수렴해 간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울 따름이다. 오일러가 발견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복잡한 세상이 -1로 수렴한다는 놀라운 사실.
현실(원주율 ≒ 삶)과 가상(허수 ≒ 죽음, 꿈, 무의식, 상상…) 그리고 성장(i)이 서로 뒤섞여서 만들어내는 것이 -1로 향해간다. 일단 수식의 대상이 되는 자연상수(e)가 대상이고 메인이다. 우리의 현실(삶)과 가상은 모두 이 성장이라는 것에 포커싱 되어 있다. 여기서 성장이라는 것은 현실이든 가상이든 더 잘살고 싶고 더 아름답고 싶은 인간(세상?!)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현실은 물질을 가상은 정신을 대변한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두 성장하고 싶다. 이 성장을 위해 현실과 가상을 계속 더해간다. 끝이 없다. 그것이 더 큰 성장을 가져올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인가?
-1이다. 정확히는 -1로수렴해간다.
이건 결국 -1+1=0이다.
이제 감이 오질 않는가? 태초에 세상은 무(0)에서 유(1)로 창조되었다. 그렇지만 세상이 인류가 지향하는 '성장'을 위해 현실의 삶과(π)을 갈아 넣고 가상의 세계(i)를 끊임 없이 만들어내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결국 무(無, 0)로 돌아간다.